제72화
이러다가 이혼 합의서를 받는 날이 닥치지 않을까.
한규가 쓰러지고 보름이 지났다. 총수가 부재한 북두 그룹에서 가장 바빠진 게 세정이라지만…….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을까. 집에도 들어오지 않으면 잠은 어디서 자는 건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호연이 세정을 본 것도 보름 전의 일이란 말이었다.
그날 터진 입술을 혀로 닦아내 감추던 세정은 호연에게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자신은 한규의 곁을 지켜야 한다고.
지킬 게 참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회사와 부친을 지켜야 하는 남자의 심정을 감히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가 세정을 사랑했다던 소라까지 생각이 머물게 되면 목이 졸아붙는 기분이었다.
호연은 휘영의 말이 진짜일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정 한번 하지 않는 세정의 체념 어린 눈이 떠오르면 막막해졌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남자가 제 마음을 자각할까 봐 혼자 걱정했잖아. 이렇게 마주치지 않고 흐지부지한 채로 갈라서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잖아.
좋잖아…….
“……뭐가 잘되고, 뭐가 좋아.”
분명 잘되고 좋은 일인데,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정더러 죽으라던 은선의 폭언이 생생했다. 당사자가 아닌데도 문득문득, 가슴이 뜨끔한데 세정은 어떨까.
계속 세정이 걱정되었다.
기다리다가도 안 되겠어, 호연이 찾은 세정의 집무실에는 그가 없었다. 출장을 갔다고. 기다려도 되겠냐는 물음에는 기다리지 말라는 대답이 비서실 전동현 대리를 통해 돌아왔다.
직접 말해주지. 기다리라고 했어도 오래오래 기다렸을 텐데.
남자는 그날 그 얼굴이 보여주기 싫은 또 다른 치부였나 보다.
이해하면서도, 만나지 못한 게 다행이라고 자위하면서도…….
“보고 싶어.”
조용히 고백한 호연이 손에 든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고희원 피아노 리사이틀-서울
예술의 전당 음악당 콘서트홀]
세정이 주었던 초대장의 날짜가 오늘이었다. 호연은 혼란한 마음을 누르며 예술의 전당 로비를 서성였다.
그러다 곧 핸드폰 화면을 밝혀 시간을 확인한 호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예가 또 연락이 안 된다.
“같이 가자더니…….”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근래 잦아진 일이라, 얼마 뒤 다시 연락이 올 걸 알아 익숙하면서도 답답했다.
호연은 홀이 개방되자, 하나둘 입장하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하나, 둘……. 로비가 텅 비고 나서야 시선을 돌렸다.
벽에 달린 모니터에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의 영상이 소리 없이 이어졌다.
사치스럽게 반짝이는 조명 아래 광택이 도는 그랜드 피아노를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힘주어 타건할 세정의 뒷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세정이 계속 피아노를 쳤다면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호연은 손을 그러쥐며 초대장을 구겼다.
세정을 사랑하므로, 그의 아픔이 된 전 애인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핑계만 대다 끝날 내 이기적이고 누추한 사랑과 핑계 없이 산산이 부서진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이 비교되는 것도,
나는 싫었다.
* * *
“백호연 씨가 산부인과를 찾는 게 아니라, 암 병동의 1인실을 찾았는데요.”
신원의 보고에도 세정은 멀거니 두 손만을 바라보았다.
“남성이고 환자 이름은 오재성, 스물아홉입니다. 백호연 씨와 어떤 관계성이 있는지는 알아보는 중이고요.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말인데 수고했습니다. 쉬어요.”
한규가 입원한 병원 앞에서 차가 멈추었다. 세정은 그쯤 신원의 보고를 끊어냈다. 신원은 조수석에서 내려 세정이 앉아 있는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세정이 차에서 긴 다리를 뻗어 나왔다. 내부가 넓게 설계된 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접고 있던 세정은 뻐근한 목 주변을 눌렀다.
신원은 그 행동을 가만히 훑어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한규가 쓰러진 이후로 잠이나 자는 건지. 새벽에 저를 물리고 다시 마주한 아침에도 여전히 흐트러짐조차 없었지만, 걱정스러웠다. 평소보다 더 자신을 몰아붙이는 학대적 행동에서 미약한 균열의 전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주 미세해서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그런 예감이 들었다.
백호연 씨 때문인가.
신원은 집무실에 있으면서 찾아온 호연에게 출장을 핑계로 부재를 통보하던 세정의 음성을 떠올렸다.
적어도 제 상사는 비겁하게 회피하는 성질을 가지진 않았었다.
전처 중 누구에게도 사람을 붙이는 짓을 하지 않았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사의 모습이 새롭다가도 이상했다.
오늘 같은 날은 특히 소희의 기일 때나 보여주는 느른함이라…….
가보세요, 하고 돌아서는 세정의 뒷모습을 보던 신원이 대뜸 불렀다.
“전무님.”
걷다 말고 돌아선 세정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
“식사 잘 챙기시고요.”
신원은 진심으로 세정이 걱정됐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주시고요.”
“…….”
“입술 위에 찢어진 상처에는 연고도 꼭 바르시고요.”
세정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살짝 턱을 들었다. 반쯤 접힌 눈이 오늘의 첫 웃음이었다.
“아내처럼 걱정하네.”
“제가 오피스 와이프 아닙니까, 전무님.”
“가요.”
세정이 징그럽다는 듯 이맛살을 구겼다가 됐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다시 허리를 숙였다 들어 올린 신원은 멀어지는 세정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오피스 와이프가 아니라, 오피스 대디라도 된 기분이었다.
* * *
평일이었으면 이른 퇴근이었겠으나 주말이니 과한 노동이다.
담배를 피우고 나자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피곤함에 절은 뇌가 출렁이는 것 같았다.
세정은 VIP 병실의 복도를 지나 한규의 병실에 들어섰다. 그러곤 잠시 숨을 크게 내뱉었다. 세수라도 하지 않으면 이 몽롱한 상태를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양치까지 했다.
“세정이 왔냐.”
그러나 침대에 길게 드러누워 새로운 애인에게 음식을 받아먹는 한규의 기름진 얼굴을 보자, 불쑥 토악질이 치밀었다. 입꼬리가 뒤틀렸다.
이러려고 병원에 입원한 거지.
여자는 놀라 동공을 굴리다가도 뻔뻔스럽게 세정을 무시했다. 또 한 번 한규에게로 밥을 먹여주었다.
“나가보세요.”
한 입 먹고 내려놓는 순간, 음식물 쓰레기가 되는 것.
좀 전까지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었을 게 악취로 느껴졌다.
세정은 식사를 정리하는 한규의 새 애인을 내보내고 간이 의자에 앉았다.
“휘영이를 때렸다면서.”
내내 병실에서 놀고먹더니 언제 또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친지들 보기 쪽팔려서, 원…….”
쪽팔릴 일이 이거 하나뿐일까.
“다 큰 놈들이 주먹질은 뭐야, 주먹질은.”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도 들었을 텐데, 그는 침묵했다.
“유인 홀딩스도. 휘영이한테 가당키나 한 뒷배냐? 지금은 너한테 힘이 되어줄 것 같지. 나중에 기휘영이랑 손잡고 널 칠 거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그런 쓰레기 같은 엔마트 버리고, 유인 홀딩스 유아민이랑 결혼하라고 자리를 주선했더니, 죄다 사생아 새끼 좋을 짓만!”
한규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버럭, 성을 내었다.
“거기다가 네 새어머니도 위협하고……. 대체 너는 뭐 하는 새끼야? 네 자리가 그렇게 보잘것없어? 휘영이는 사생아 새끼니까 경쟁자도 아니다, 이거야? 누구 하나 입 잘못 놀리는 바람에 패륜아 새끼 돼서 자리 위협당해 봐야 정신 차려?”
매몰찬 힐난이 화살처럼 빗발쳤다. 모조리 명중당한 세정의 몸이 구부정해졌다. 한규가 날카롭게 혀를 끌끌, 찼다.
출렁이는 뇌 속으로 전류가 돌아 고막이 쿡쿡, 찔리는 것 같았다. 신경 줄이 바짝 당겨졌다.
“……패륜아 새끼라뇨.”
이내 세정은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가슴으로 이어진 심지에 불을 붙여둔 기분이었다.
타들어 가고, 타들어 갔다.
“아버지 동거인한테 위협 좀 가했다고 패륜아 새끼 되나.”
“……너…….”
“아버지도 아내라고 인정 안 했는데, 누가 내 엄마야. 내 엄마는 죽은 양소희 하나뿐인데.”
선득하게 날 선 시선이 입술을 베어간 듯 한규는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어물거렸다.
“아버지가 이러니까, 오은선이고 기휘영이고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거 아니에요. 상간녀에 사생아 새끼가.”
“…….”
“그냥 죽일 걸 그랬나?”
세정은 풀린 눈으로 뇌까렸다.
“아버지. 나……. 아버지가 나한테 하는 협박이 하나도 안 무서워요. 나는 북두 그룹 백 번, 천 번 망해도 좆도 관심 없거든.”
“…….”
“패륜 한번 제대로 할까요?”
조부고, 증조부고 무덤에서 일어나 달려들 짓 한번 해봐?
“미친놈…….”
한규가 질렸다는 듯이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입을 다물었다.
세정은 그 고집스러운 옆얼굴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한규가 나이가 들더니 심약해졌어. 마음이 제일 늦게 늙는 게 아니라. 갈수록 어려진다, 어려져. 소라를 생각하면 속이 얼마나 문드러져 저러겠어? 좀 이해해. 잠도 편안히 못 잔다잖아.”
깊은 잠에 빠진 한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윤진이 안쓰럽다는 듯 말했었다.
“지랄도…….”
세정은 중얼거리며 끝이 마른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심약한 사람은 북두 그룹 총수 자리를 욕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뻔뻔스럽게 소라가 꿈에 나온다며 무속인을 불러 씻김굿을 하자는 소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뭐라고 했어?”
한규가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세정은 반쯤 감긴 눈을 들어 그 안에 한규를 담았다.
“지랄하신다고.”
“기세정!”
“아버지.”
고성을 꺾어 누르는 음성이 차가웠다. 한규의 귓가가 싸늘해졌다.
“소라, 아버지가 죽였어요?”
불현듯 튀어나온 물음에 한규가 몸을 굳혔다. 시시각각 일그러지는 한규의 얼굴 근육을 기민하게 훑어 살피는 세정의 눈길이 집요했다.
“아버지죠.”
“……나는…….”
“아버지잖아.”
한규는 절절 끓는 세정의 눈 속에서 소라의 발인 날을 보았다.
“아버지가 소라 두 번 죽였잖아요.”
사인을 밝히지 않으므로 소라는 한 번 더 버림받아 죽었잖아.
“그래놓고 어디 씨발……. 억울하다고 꿈에 나오는 애를 천도하려고 그래.”
“…….”
“존나 염치도 없지.”
아, 이 애는 그날을 한 번도 잊은 적 없구나.
* * *
병실을 나오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세정은 급하게 넥타이를 끄집어 내렸다. 한참 모자란 숨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심해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
휘청이며 한 걸음씩 걸어가다 고개를 젖혀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날 섰던 대화들이 다시 귓가로 쏟아지고 천장이 뒤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귀가 따갑고 시야가 울렁거렸다.
“좆같기는…….”
세정은 자조처럼 내뱉고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을 연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를 연민하면,
내가 무릎 꿇렸던 사람들은 뭐가 돼.
기꺼이 원망하고 미워하며 저주할 대상이 되고 싶었다.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번에는 지켜주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양소희, 기소라, 피아노.
……백호연.
결국 내가 놓아줄 것.
귀 위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세정이 크게 비틀거렸다.
“세정 씨!”
쏟아지는 커다란 몸에 짓눌리는 작은 몸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