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짧은 사이 세정이 펼쳐놓는 기류가 나른했다. 눈부신 웃음이 예뻤다. 호연은 손을 올려 세정의 얼굴을 꼼꼼히 매만졌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나중에 그려줄 건가.”
“제가 세정 씨를 그려줬으면 좋겠어요?”
남자만큼 완벽한 피조물이 있을까. 그리는 사람이 오히려 영광이다.
“응.”
남자는 그것도 모르고 퍽 간절했다. 이마저도 의외로웠다. 부탁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 그 태도가 제법 오만하기도 했지만 확실하게 이건 부탁이었다.
“궁금해. 백호연 씨 눈에 비치는 나는 어떤 색일지.”
“…….”
푸른 불꽃 같다고 말하려는데, 세정의 입술이 호연의 입술을 누르듯 맞물었다.
“그려줘요.”
잠깐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백호연 씨는 그게 언어니까.”
세정은 제 뺨에 머무른 호연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그러곤 알려주듯 이곳저곳으로 손을 옮겨주었다.
호선을 그린 입꼬리부터 뺨에 팬 기다란 보조개, 어울리지 않게 내려놓은 눈꼬리까지 하나하나 어루만지게 두었다.
충분히 밝은 조명 아래서 호연은 맹인처럼 세정의 얼굴을 더듬었다. 손끝에 각인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열감이 뭉칠 수가 있는 걸까. 하복부가 지끈거렸다.
동시에 살짝 내리감은 남자의 한쪽 눈꺼풀이 장난기를 머금고 찡긋거렸다. 콧잔등에 옅은 주름이 잡힌 남자는 정말이지…….
입을 맞추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아서.
호연은 세정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눌렀다.
“자신 있나 봐.”
끝내 남자의 호승심을 자극한다.
불쑥, 다가온 세정의 몸집에 호연이 뒤로 밀렸다. 단단한 벽이 어깨로 느껴졌다.
머리는 세정이 감싸 안아 괜찮은데, 쿵, 작은 충돌과 함께 머리 위로 걸린 작품이 내려앉을 것 같은 공포가 도사렸다. 그러나 그 공포마저도 쾌감으로 뒤바꾸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혀를 빠는 질척한 감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등줄기가 저릿해졌다. 단단한 손이 납작한 배를 더듬고 잘록한 허리선을 문질렀다.
아, 호연에게서 잘 익은 숨이 터져 나오자, 세정은 아랫입술을 쪼듯이 빨았다. 그러곤 입술 끝, 턱, 목덜미까지 입맞춤이 이어지는데, 호연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턱을 젖혔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숨이 허망하게 흩어졌다.
가늘게 뜨인 눈으로 희미하게 계단이 보였다. 흐린 방울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호연은 가까스로 정신이 들어 세정의 어깨를 밀었다.
“밑에, 사람들, 다 와 있잖아요…….”
“상관없지.”
세정에게는 힘으로 느껴지지 않는 게 문제지만.
“사람들 올라오면요…….”
“필요하면 조폭이라도 쓸게요.”
“……뭐, 폭력으로 기억을 잃게 하겠단 소리예요?”
“못 할 것도 없단 말.”
미친 걸까?
호연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세정을 바라보는데, 그는 진심이라는 듯이 눈을 맞춰왔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빠끔거리는 호연의 입술을 여러 번 물어왔다.
“취향을 좀 바꿀까…….”
그러곤 태연하게 호연의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허벅지와 조금의 틈을 남기고 일자로 떨어진 원피스라, 세정이 팔을 집어넣기가 쉽지 않았다.
익숙한 예감에 호연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속옷이 살갗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그 노골적인 색욕과 문란한 장면이 지나가 머릿속이 다 화끈거렸다.
처음으로 남자의 취향에 감사를 표해야 하는 건지, 꾸물거리는 손가락에 난색을 표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될 무렵이었다.
“아버님!”
“회, 회장님!”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잡아드려요. 잡아드려!”
“기 전무! 세정아! 한규야. 한규야! 괜찮아? 어떡해, 어어?”
찢어지는 비명과 굵직한 고함이 순식간에 계단을 밟아 올라왔다.
호연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보이지 않는 1층에서 알 수 없는 굉음이 쏟아졌다. 세정의 어깨를 쥔 호연의 손으로 힘이 가득 들어갔다.
“세정아아!”
아래층에서 목 놓아 세정을 부르는 윤진의 음성이 급했다.
거기서 극한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호연의 가슴이 크게 들먹였다. 폐부가 쥐어짜진 것처럼 숨을 토하는 상태가 심상찮았다.
초점을 잡지 못한 검은자위가 이쪽저쪽을 급하게 둘러보았다. 그러곤 입술을 떨며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무슨 일 났나 봐요. 세정 씨, 빨리…….”
순간, 말을 멎게 하는 다정한 입맞춤이 있었다.
“…….”
“그만! 그마안!”
이따위 소리도 멀게 들렸다.
“…….”
짧은 입맞춤으로 밭았던 호흡이 찬찬히 차분해졌다. 부족한 만큼의 숨을 세정에게서 빌린 것 같았다.
세정은 호연의 머리칼을 부드러이 쓸어내렸다. 안심하라는 듯이 빙긋이 웃으며 조용히 귓가로 말을 흘려 넣었다.
“전부 쇼야.”
그러니까 백호연 씨한테 위협을 가할 만한 건 없다고.
* * *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네.
세정은 제 앞으로 바투 다가오는 무속인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무속인을 감히 붙잡지도 못하고 그만하라며 소리치는 이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모든 게 짜고 치는 쇼였다.
확실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진범일지 모르는 청재를 극단으로 몰아, 동태를 지켜보는 것. 궁지에 몰린 쥐새끼는 고양이까지도 물고 마니까.
그 이상 행위를 보려고 띄운 첫 번째 승부수였다.
제사상은 진작 엎어졌고 한규는 거동조차 힘든지 허억, 허억, 헐떡이고 있었다. 세정은 그쪽으로 호연을 보냈다. 주변이 아비규환이었다. 홀로 남은 그 속에서 세정은 무속인과 시선을 맞추었다.
음산하리만치 고요해진 공간으로 무속인의 얼굴이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이내 어느 나라의 괴상한 탈처럼 목을 꺾으며 기우뚱기우뚱, 다가왔다.
그러곤 잔뜩 웃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오빠……. 손가락, 어떡해? 손가락, 오빠아…….”
그 말을 들은 한규가 흐억, 하고 또 한 번 몸을 떨었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소라 특유의 어투가 생생했다. 이미 무속인에게 다 전달한 정보였으나……. 이 정도로 연기파일 줄은.
세정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쓱, 청재의 낯을 읽었다.
눈에 띄게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낯짝에 만연했다. 한규를 부축하면서도 정신은 이쪽에 다 팔려 있었다.
세정은 턱을 내리며 가늘게 웃었다. 살짝 눈썹을 들어 올리자, 약속처럼 무속인이 홱, 몸을 틀었다.
“나……. 억울해. 아빠 나 너무, 억울해…….”
이제는 엉엉 운다.
무속인의 눈이 청재에게 가닿았다. 침을 꼴딱, 삼키는 청재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클라이맥스는,
“오빠, 오빠, 오빠!”
한규가 실신함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 * *
호연은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출입을 거절당해 VIP 병실 복도에서 울음을 터트린 은선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몸을 얼른 일으킨 은선이 맥없이 휘청거렸다.
한규가 실신하자마자, 삽시간에 계단을 밟아 내려온 게 은선이었다. 엉망진창으로 주저앉아 있는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처참한 표정으로 회장님, 회장님……. 정신이 나간 듯 울부짖었었다.
그게 더없이 귀신 같았다. 차라리 귀신이었다면 나았을 수도 있지.
호연은 예상치 못한 대면에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어떻게 이 여자가 이곳에……? 아연한 눈으로 계속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호연은 흐느끼는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돌리는 은선의 앞으로 갔다.
눈물을 닦는 팔뚝에 짓물러 벌건 얼굴이 낯설었다.
그게 세정이 극도로 혐오하는 사생아들을 낳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혹시 원하는 게 아이인가?”
세정이 대뜸 물어온 질문이 이 여자에게서 빌어 나온 것이다. 은선이 사생아들을 볼모로 저택에서 버티던 순간들이 떠올라 나를 보며 화를 삭이던 순간도 있었던 거지.
“알고 계셨어요?”
“…….”
“제가 기세정 씨 아내인 거 알고 계셨냐구요.”
알고 있었다는 눈치로 은선이 눈을 내리깔았다.
호연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다 거짓말이었던 거네요?”
아트센터를 차릴 예정이라는 말부터 팬이라던 말까지 다 거짓말.
호연은 만날 때마다 은선의 비위를 맞췄던 것, 그딴 거에는 화가 안 났다.
남자에게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제 행위가 은선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게 인정하기가 싫고 입안이 썼다.
남자를 이용해 자기 잇속이나 챙기려는 마음. 그러면서도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
그런 게 은선의 얼굴에 고스란히 발려 있어 자괴감이 들었다.
“왜…….”
“나와.”
순간, 몸을 강하게 밀치는 손길이 있었다. 호연은 떠밀리듯 벽으로 부딪치면서 주저앉았다. 은선의 어깨를 감싸 뒤로 감춘 휘영이 사납게 눈을 치뜨고 있었다.
이에 놀란 은선의 눈이 이리저리 튀었다. 벽에 처박힌 호연에게, 저를 숨긴 휘영에게. 그러다가 다시 울상을 지었다.
“휘영아아…….”
“엄마, 입 다물어.”
늘어지는 제 이름을 짜증 난다는 듯 멈춰 세운 휘영은 목을 두둑두둑, 꺾었다.
“친동생 죽인 새끼랑 계속 붙어먹으니까 어때요.”
통증이 이는 팔뚝을 쓸어내린 호연이 공허한 눈을 들었다.
“비위도 좋지. 하나 더 말해줄까? 기소라가 왜 죽었는지? 왜 그 빗길에 차를 몰았는지.”
휘영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순식간에 소라가 세정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날로 돌아갔다.
“기소라가 기세정을 좋아한 거야. 사랑한 거라고. 근데 기세정이 안 받아주니까 죽은 건데, 그런 새끼가 그쪽 좋아할 거라고……. 악! 씨이발…….”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앞이 암전된 것 같았다. 커다란 세정의 그림자가 호연의 시야를 압도했다. 세정의 긴 다리 사이로 널브러진 몸이 하나 보였다. 다리를 동동거리며 거친 욕설을 해대는 게 들렸다.
자각이 느려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는 호연의 손을 잡아 일으킨 세정은 그녀를 병실 안으로 쉽게 밀어 넣었다.
“들어가 있어요.”
그러곤 다시 문을 닫았다.
그것만으로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호연은 망연한 채로 상황을 더듬어 살피다가 이내 포기하듯 다리를 접고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새된 비명이 넘어왔다. 그냥 꿈결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주먹과 연한 살이 닿아 뼈가 울리는 소리가 여러 차례 났다.
엄마와 민형이 맞는 모습을 장롱 속에 숨어 지켜보던 날과 같은 무력함이 들었다. 머릿속에 안개를 풀어놓은 것 같았다.
호연은 눈에 초점이 풀린 채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자세가 옆으로 쓰러질 듯 비스듬했다.
다시 문이 열리고 은선이 뛰쳐 들어왔다. 그리고 한규를 둘러싼 친지들을 향해 악을 썼다. 세정, 휘영, 싸움……. 이따위 단어를 알아들은 이들이 뛰쳐나왔다.
열린 문틈으로 호연에게도 얼핏 보였다.
피가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는 세정의 모습이,
끔찍했다.
* * *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
맞아 쓰러진 휘영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선이 세정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휘영을 일으키던 사람들이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사람 새끼 아닌 지 오래됐지.”
세정은 은선의 손을 가볍게 꺾으며 순순히 인정했다. 이에 은선이 악,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굴렀다.
“이제 다들 그만하고…….”
관자놀이를 짚은 윤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왔다. 눈물로 범벅된 은선의 얼굴이 처참했다.
“내가 아무리 상간녀여도 휘영이는 네 동생이야!”
“씨발, 동생은 무슨 동생.”
은선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막무가내로 늘어놓았다.
“내가 언제까지 상간녀일 것 같아. 내가 네 엄마보다 더 오래 회장님 곁을 지켰는데, 내가 언제까지……!”
나와서는 안 될 말.
윤진이 탁한 숨을 뱉고 급하게 세정의 기색을 훑었다.
확, 흐트러진 눈매에 고단함이 끼었다. 차츰 분노로 일그러지는 눈이 지나치게 싸늘했다.
“세정아.”
붙잡는 윤진의 손을 뿌리친 세정이 단번에 은선의 멱살을 쥐었다. 순식간에 바닥에서 다리가 뜨게 된 은선이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어디서 우리 엄마 얘기를 해.”
“죽, 어. 죽, 어! 죽, 으, 라, 고!”
그러고도 침을 뱉었다. 이어지는 악독한 음성에 세정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순간, 목이 조인 듯 은선이 힘없이 흔들렸다. 그를 본 윤진이 기겁하고 다가와 세정의 손목을 끌어 내리며 사정했다.
“아냐, 세정아. 이건 아냐. 세정아!”
그러지 않아도,
“…….”
그게 또 소희가 목을 매달았을 때의 모습인 것 같아서.
눈이 뜨거웠다. 끓어오르는 숨을 가눈 세정이 다시 손을 풀어주었다.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진 은선이 캑캑거리며 제 목을 더듬었다.
발치에 보이는 세정의 구두가 언제라도 목을 짓밟고 두 동강 낼 수 있을 것 같아, 은선은 발로 바닥을 밀었다.
세정은 그 벌레 같은 꼴을 가만히 보았다.
“뭐가 억울해서? 뭐가 그렇게 억울하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세정은 제대로 대답할 정신조차 없는 은선을 내려다보다 차라리 눈을 감았다.
사는 게 지옥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