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처음 뵙겠습니다.”
호연은 세정이 무표정으로 내미는 손을 바라보았다.
처음 봐……. 처음 봐요, 나를?
호연은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세정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왜? 입 모양으로 물었다.
이제는 이러한 표정이 꾸며낸 것인 줄, 그 뒤로 장난기가 어려 있음을 안다.
이런 게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여전한 죄악감이 가슴을 조였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인영은 호연을 붙든 손에 악력을 더했다.
뭐 하니, 지금?
날카로운 눈초리가 박혀 들었다.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호연은 그제야 세정의 손을 맞잡으며 얕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손을 떼어내려는데, 엄지와 검지 사이 연한 살을 문지르는 짓에 눈매를 좁혔다. 이에 남자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옅게 웃었다.
“정말 처음 보는 거 맞아요?”
핸드폰을 건네주며 하는 물음에 호연이 어설프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자꾸 왜 이래.
호연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인영을 힐끗거렸다.
“그래, 호연아. 너 북두 그룹에 아는 분 있는 거 아니었어? 그 왜……. 네가 대학원 가는 대신 파라스 호텔 20주년 기념 전시회에 작품 걸어달라고 부탁했었잖아.”
“교수니임…….”
호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영은 한쪽 얼굴을 감싸 쥐며 여태껏 정신이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아……. 그때 사정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이 친구 덕분이었어요.”
대학원을 진학하는 조건으로 딜.
이제야 알게 된 내막에 세정이 호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울상이 된 호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꼬리를 늘어뜨린 채였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빠끔거릴 때마다 가지런한 앞니가 드러났다.
귀엽네.
세정은 고개를 떨어트리며 피식, 웃었다.
“……저희 애가 북두 백화점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라죠? 정말 대단히 영광이에요.”
“북두 쪽에서 영광이죠. 어렵게 모셨는데.”
호연은 길게 닿아오는 세정의 시선이 저를 놀리는 것 같았다. 영혼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뻔한 대답이었으니까.
“작가님, 최한주 선생님 오셨습니다.”
다가온 직원이 인영에게 알려주었다. 순간, 인영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눈치를 살피는 표정이 되었다.
“어머머, 기세정 전무님…….”
“가보셔도 됩니다.”
세정은 새로운 손님으로 난감해하던 인영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늘 젠틀하셔. 감사해요. 좋은 관람 되시고요. 아, 호연아. 관람 도와드려.”
가볍게 명령한 인영이 어디, 어디? 하고 직원의 뒤를 따라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정적이었다. 호연은 입술을 비죽이며 발끝을 보았다. 세정은 뒷짐을 지고 허리를 숙이다 못해 고개를 기울였다.
“발은 왜 다쳤어요?”
호연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넘어졌나?”
여전히 모르는 척.
발에는 붕대가 없었다. 괜히 세정이 채워준 발찌를 한 번 더 확인한 호연이 헛숨을 흘렸다.
옆얼굴에 닿아 있던 눈빛에는 웃음기가 선연했다.
아직도 장난을 치자고.
“재미없어요.”
“어쩌지, 나는 재밌는데?”
그러고는 눈을 접어 웃었다. 가슴이 뜨끔했다.
퇴원 후 며칠 만에 만나는 남자였다. 그새 웃음이 헤퍼진 것 같았다.
“좋은 일 있으세요?”
“좋은 일?”
남자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 좋아 보여요.”
“나쁠 이유도 없죠. 좋은 날인데.”
“좋은 날이요?”
“백호연 씨 전시회 오는 날이잖아요.”
그러곤 눈앞으로 꽃다발을 내밀었다.
새빨갛게 난발한 장미였다. 새하얀 플로드지 위로 매인 작은 리본에도 눈길이 갔다.
“지난번에 못 받아서 나도 안 줄까 했는데, 그러자니 주고 싶어서.”
지난번, 언제? 하다가 금세 알아차렸다. 파라스 호텔 20주년 기념 전시회 당시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꽃다발. 남자에게 줄까, 고민하게 만들던 아마릴리스의 아름다움.
그런 걸 마음 쓰고 있었다고…….
호연은 다시 세정을 바라보았다.
세정은 그때처럼 꽃다발과 너무 잘 어울렸다.
왜 이런 생각이 들까, 가만히 생각하는데,
“안 받아요? 팔 아파.”
엄살을 부리며 꽃다발을 흔든다.
호연은 꽃다발을 받으면서 주변을 쓱, 살폈다. 흘끗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거야 남자가 이목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라 그런 거고. 방금 전까지 가늠되었던 소름 끼치는 시선이 없었다.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돼서 그런 걸까.
“백호연 씨 작품은 어디 있어요?”
“네?”
“백호연 씨 작품.”
상념을 일깨워준 세정이 한 번 더 반복해 주었다.
“자꾸 나 앞에 두고 다른 생각 하네.”
꼬집어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런 남자였다. 저를 앞에 두고는 한시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고, 감히 그런다면 짓궂게 괴롭히는 남자.
“……처음부터 설명 도와드릴까요?”
“그럴 시간은 없고. 백호연 씨 작품만.”
“……이쪽이에요.”
호연은 목덜미쯤으로 닿아오는 눈길을 느끼며 앞장섰다. 시야 끝으로 남자의 구둣발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느긋한 걸음인데도 불구하고 따라잡힐 것 같은 긴장감이 있었다.
“이건데…….”
마침 그림을 보던 연인이 자리를 옮겼다. 그 자리에 세정이 비스듬히 섰다.
인영의 작품을 하나씩 설명하는 도슨트는 호연의 것까지 안내하지는 않았다.
같이 전시했다고 하지만, 외딴곳에 있는 작품이었다.
꽃다발이 복잡한 마음처럼 바스락거렸다. 왜인지 부끄러웠다. 한적한 곳에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그런 게 아니고 남자가 그림을 보고 있다는 게.
어느 순간, 제게는 벼락같았던 찰나를 낱낱이 보이는 게 그림이었으니까. 그런 예술을 하고 있으니까.
남자가 정확한 해석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미 송두리째 들키는 기분이었다.
<속초>
작품의 제목 하나만으로.
세정이 설명하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30호 캔버스에 유화입니다. 제목처럼 속초에서의 강렬했던 기억을 토대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접목한 것인데, 강제로 선을 단순화하고 색채를 제한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생략한 문장들이 많았다.
어두운 별장 밖으로 보인 황홀한 정원의 풍경. 흔들리던 시야처럼 흐릿한 선들. 그 강렬했던 기억을 얘기하면 남자와의 관계를 털어놓는 꼴이었다.
“작가 카니엔의 <미로>에서 영향을 받았던 지난 작품 <무제>에서 레퍼런스를 가져온 것으로 카니엔은…….”
세정이 잠깐 손을 들어 올렸다.
“네.”
호연은 마른 숨을 삼켰다.
“저 속초에 나도 있었어요?”
아, 생각을 고친다.
“난 왜 자꾸 우리 섹스했던 게 생각나지?”
남자는 정확한 해석을 했다.
“내가 썩었나.”
* * *
관람객들이 모두 돌아간 이후에야 호연은 큰 숨을 내쉬었다.
정말 쉴 틈 없는 주간이었다. 저녁에는 세정의 본가로 가야 했다. 기사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전달받은 터였다.
호연은 옷을 갈아입고 세정에게서 받은 꽃다발과 핸드백을 챙겼다. 급한 걸음으로 아트센터를 빠져나온 때였다.
“…….”
걸음을 우뚝, 멈추게 하는 게 있다.
물레방아와 관람차를 조합해 키네틱 아트로 재해석한 작품 앞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무료한 듯 긴 다리를 뻗어 두고 까딱까딱, 시간을 죽이던 남자가 내내 이쪽을 보고 있었던지 몸을 일으켰다.
그 일련의 과정이 좀 묘했다.
만약 남자와 제가 평범하게 만났더라면 이런 장면이 익숙했을까.
자신은 아트센터에서 근무하고, 남자는 북두 그룹에서 근무하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자연스럽게 발이 움직였다. 뛰었다. 그러니 어느새 세정의 앞이었다.
“뭘 또 뛰어와.”
가볍게 웃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정리해주는 세정의 손길이 물색없이 좋았다.
“기다리고 계신 줄 몰랐어요.”
“안 늦었어요.”
주차장 쪽으로 향하는 걸음이 나란했다.
그게 또 묘하고…….
“주셨던 연주회 티켓 말이에요.”
호연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응.”
“같이…… 안 가세요?”
여름날의 바람이 불었다. 호연은 머리칼을 정리하는 척 세정을 힐긋, 올려다보았다. 곧장 눈만 내려 시선을 맞춰주는 사소한 행위에 열없이 가슴이 뛰었다.
세정은 습관처럼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피아노는 나한테 전 애인 보는 것 같아서.”
“……아.”
“옆에 아내 두고 볼만한 건 아니지.”
“…….”
“다음에 발레 공연은 어때요.”
너무나도 태연하게 다음을 기약한다.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 수 있나.
“네. 좋아요.”
순간순간, 애써 다잡았던 마음이 바스러지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마음을 알게 되었던 밤부터 지금까지.
본인도 모르는 마음이니 깨닫도록 두지 말자. 나만 모른 척하면 될 마음 아니냐고. 그래서 나 혼자 좋아하다 끝내면 되는 걸 일을 키우지 말자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세정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호연이 타자, 다시 닫아주고 앞을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차가 부드러이 도로 위를 나아갔다. 갈수록 사위가 어두워졌다.
호연은 그렇게 서서히 가라앉았다. 욕심냈던 평범한 부부의 나날들을 하나씩 툭툭, 손에서 놓았다.
호연은 볼 안쪽 살을 짓씹었다. 꽉 막힌 도로를 보고 있자니 숨도 막혔다. 톡톡, 핸들을 두드리는 소리에 빗줄기가 강박적으로 떠올랐다. 뒤이어 몸이 맞붙었던 순간까지도…….
여린 숨을 토해냈다.
“도망갈까요?”
확, 귀를 잡아채는 듯한 말이 있었다.
“……?”
호연은 얼굴 가득 의문을 드리운 채 고개를 돌렸다.
“속초도 좋고, 다른 곳도 좋고.”
세정은 무심한 어투로 이어 나갔다.
“서울만 아니었으면 좋겠네.”
세정은 교통 체증을 두고 하는 말이었겠지만, 호연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도망가자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다 모른 척하고, 그냥 우리 둘이 가자고.
“가요, 도망.”
그래서 진심이었고.
“어디로 갈까요?”
“……농담이에요.”
“…….”
“자리를 지켜야죠.”
그래서 거짓이었다.
호연은 직선으로 닿아오는 시선을 무시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지러운 조명들이 난만했다. 신호등의 색이 바뀌자, 세정의 시선이 떠나갔다. 호연은 차창에 그려진 세정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을 곱씹었다.
북두 그룹의 유력한 후계자인 기세정의 옆. 그리고 곧 떠나서 그토록 원했던 자유로운 삶 속으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마음이 정말 그때쯤 소진될 정도인가.
가만히 가늠해 보지만, 쉽지 않았다.
이 마음이 쉽지 않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