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67화 (67/98)

제67화

젖은 몸이 들러붙었다.

“아…….”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아래가 쩡, 하고 울리는 쾌감에 호연은 터지는 숨을 재갈처럼 물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겨울 정도로 겪은 여름날의 비였다. 그런데 수상하게 벅찼고 이상하게 들떴다. 호연은 소란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마 위로, 콧날 위로 부딪치고 깨져 빗방울이 된 빗줄기는 여름의 속성처럼 따뜻했다.

마음이 평온해진 순간, 문득 남자를 돌아보았다. 비죽, 웃음이 솟은 것은 계절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서 있어서.

세정은 여름에도 겨울을 떠올리게 하는 시린 남자였다. 잔인할 정도로 무정하고 아플 정도로 날카롭게 선을 그으니까.

그래서 공연히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가슴이 시큰해지고는 했는데…….

순간, 세정이 손을 올려 제 가슴을 짚었다. 그 눈매가, 입매가 차츰 무너졌다. 따라서 호연의 입꼬리도 주저앉았다.

동시에 생각했다. 저런 걸 무너진다고 할 수가 있을까. 그건 오롯이 제 감상이고 기실 찌푸리는 것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나도 저런 표정으로 남자를 봤던 것 같아서.

그게 언제였더라.

지나간 시간을 헤아리던 새 세정이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왔다. 호연은 조금 아득한 눈으로 세정을 올려다보았다.

예의 무기질적인 눈빛이 아래로 꽂혔다.

세정의 몸이 빗줄기의 어법에 따라 젖어 들었다. 하나씩, 동그랗거나 칼을 맞은 양 비스듬히 그어지는 점과 선들. 그러다 보니 남자도 어느 순간에는 쫄딱 젖은 꼴이었다.

벌려둔 간격으로 빗줄기가 쏟아졌다. 어느 틈에 이리 굵어지고, 거칠어졌나. 희뿌연 비안개가 피어올랐다. 빗줄기의 방향이 사선이었다.

그를 오롯이 다 맞고 선 세정 덕에 호연의 시선은 제법 선명했다. 그래서 더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얼굴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던 건 멀기 때문에 잘못 본 거라고, 남자의 눈빛이 처참해 보였던 건 비안개 때문이라고 그리 합리화를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요원해졌다.

“백호연.”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잔뜩 쉬어 있었다.

“…….”

이제 이 얼굴을 안다. 이 음조를 안다.

그러니까 듣지 않을래.

호연은 까치발을 들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손끝으로 남자의 목을 더듬어 끌어 내렸다.

훅, 끌려 내려와 마주친 세정의 눈빛이 연약했다.

“기세정 씨, 지금 당신 이상해요.”

호연이 눈을 찌푸렸다. 세정의 시선이 흔들렸다.

사랑은 말없이 온다. 사랑의 언어는 무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남자의 무언은 사랑이었다.

“이상하다고…….”

호연은 애써 시선을 떨구며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에 빠진 연약한 소년의 얼굴을 한 남자가 진심으로 멍청한 것 같다고.

이런 마음을 들키다니. 태어나 지금껏 사랑에 갈증을 느끼고 사랑의 증상을 골몰했던 제게 고스란히 보여주다니. 사랑에 뒤범벅되어 정신도 못 차리는 얼간이의 표정이라니. 이런 빈틈이라니.

세정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눈으로 공연히 입술을 벌렸다가 닫았다.

자각보다 일찍 들킨 마음을 어쩌려고 그래요, 기세정 씨.

세정의 말을 막듯 호연이 입을 맞추었다. 빗물에 젖은 입술이 뭉개지듯 차지게 빨렸다. 남자의 혀가 미끄러지듯 입 안쪽으로 들어왔다.

세정의 목 언저리에 두었던 팔이 떨어졌다. 급격히 수위를 올린 마음 깊은 곳에서 죄책감이 쏟아져 나왔다. 언젠가 넘칠 것 같아 대비하여 쌓았던 핑계들이 속수무책으로 깨부숴졌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언젠가 남자의 마음이 저와 같길 원했던 날들이 있던가.

모두 취소한다.

나는 남자가 나를 사랑하길 바라지 않아.

아니, 그러면서도 원했지. 오롯이 품고 싶었다.

나는 정말 당신이 갖고 싶었어.

무질서하게 얽히는 혀를 당겼다. 혀뿌리부터 일어나는 진득한 쾌감을 억눌렀다. 남자의 손이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배회했다. 형편없이 망설이고 조심스러워하는 혀 질은 어떻고.

모두 처음 보는 것이다.

모두 처음 겪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픈 일이다.

나를 더럽다는 듯이 봤으면. 나를 아주 밑바닥 진창 인생이라고 생각했으면. 계속 그랬어야지. 나를 사랑하지 말았어야지.

호연은 세정을 끌어안는 대신 옷자락만을 겨우 쥐었다.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 빗속에 두고 죄스러운 마음만 안고 간다.

당신을 속이려는 비열한 결심과 죄스러운 마음만 가져가.

그래서 남자가 제 마음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비슷한 성질의 마음에 반응하지 않도록.

호연은 세정의 옷자락을 쥐었던 손마저도 떨구면서 고개를 틀었다.

“할까요?”

망설임도 없이 뱉었다.

남자가 제 젖은 몸을 보고 몸이 달았다고 느끼게. 사랑이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게.

“…….”

남자가 가진 사랑의 무게는 나를 무너트릴 수 있을 정도로, 딱 그만큼 무거웠다.

들렸고, 안겼다. 단 한 번도 바닥을 디디고 서지 않은 채 병실로 돌아왔다. 입술이 떼어지는 찰나마다 둘러싼 배경이 급변했다.

비가 쏟아지는 길바닥 위였다가, 먹구름이라도 된 듯 온몸으로 빗줄기를 떨구는 엘리베이터였다가, 흐트러지는 신음이 울리는 복도였다가, 끝내는 가장 가까운 응접실까지 가지도 못하고 병실 현관 벽에 등이 붙었다.

“하으으…….”

아릿한 통증이 저릿한 쾌감과 구분이 안 됐다. 치덕거리는 손길이 얇은 옷 위로 적나라하게 구석구석 닿을 때마다 피가 홱, 솟구쳤다가 다시 훅, 꺼지기를 반복했다.

“침대까지는 못 가겠는데.”

달뜬 숨이 끼쳤다. 무례한 통보였으나 호연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무르녹았다. 세정이 몸 어디를 어떻게 파고드는지 기억하는 다리가 자꾸만 벌어졌다.

그 사이를 파고든 남자의 허벅지가 아래로 스칠 때마다 고요하게 젖었다. 주저앉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줄 때마다 허전한 아래로 무언가를 쥐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기묘한 욕망이었다.

“저어……. 저…….”

갑자기 한기가 들었다. 그 따뜻한 비를 맞고, 여름날에 느끼는 한기라니. 말끝이 흔들렸다.

호연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너무 춥고 옷을 벗고 싶다고.

호연의 살갗에 품이 큰 환자복이 달라붙은 채였다. 거의 뜯어내는 것에 가까운 발작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그냥…….”

헛도는 호연의 손을 잡아 내린 세정이 환자복의 단추를 사정없이 뜯었다. 한순간 드러난 나신을 바라보던 세정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꺾어내려 연신 잔 입맞춤을 퍼부었다.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아…….”

미열을 동반한 열락이 온다. 여린 가슴 끄트머리에 습한 숨이 닿았다. 허리가 이리저리 휘어졌다. 그를 바싹 당겨 안은 세정은 애처럼 가슴을 빨았다. 살덩이밖에 없는 부드러운 부분을 가볍게 쥐었다가 꼿꼿하게 뭉친 부분을 깨물었다.

익숙한 쾌감이 호연의 등줄기를 후려쳤다. 아니……. 어느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강렬한 쾌감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여기서 이런 희열은 위험했다.

“잠시, 잠시만요…….”

호연은 자꾸 떨어지는 손을 고쳐 세정의 어깨를 밀었다.

그게 그쪽도 옷을 벗으라는 뜻으로 느껴졌을까.

세정이 제 셔츠도 단추를 모두 뜯어내 벗었다. 모든 게 성가신 것처럼 거친 행동이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어깨 근육이 남자가 가슴을 옮겨갈 때마다 사납게 일그러졌다.

“하읏……. 으…….”

턱이 자꾸 들렸다. 호연은 까치발로 바닥을 밀어가며 벽에 납작하게 붙었다. 그러다가 순간,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쓸려 내려갔을 땐,

“젖었는지 모르겠어.”

중얼거리며 확인하듯 아래를 확, 베어 무는 뜨거움에 까무러쳤다. 들었던 까치발을 내렸을 땐 아래로 남자의 콧날이 짓눌렸다.

숨을 압박하고, 저 또한 숨이 틀어막혔다. 공기의 흐름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호연은 벽을 긁어대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뾰족한 혀가 아랑곳하지 않고 안쪽을 찔러댔다.

생경한 쾌감에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알잖……. 흐윽……. 알, 잖아…….”

“모르겠는데.”

“이 못된……! 하윽, 아! 응!”

자연히 벌어지는 허벅지를 붙든 남자가 츱, 츱, 천박한 소리를 부러 크게 터트리며 핥아댔다. 귀가 멀 것만 같았다.

호연은 세정의 어깨를 가볍게 내리쳤다. 세정이 숨을 흩트리며 웃을 때마다 못 견딜 것 같은 암담함이 몰아쳤다.

“제발…….”

강하게 도리질 쳤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진득한 전율에 휩싸인 호연은 무엇을 사정하는지도 모르는 채 빌었다. 정작 무릎을 꿇은 건 세정인데도 불구하고 엉엉, 울면서 빌었다.

“히이……익! 아! 아, 아!”

볼 안쪽 여린 살을 사정없이 씹다가 세정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이미 호연의 머릿속은 곤죽이었다. 엉망진창으로 흐무러진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로 신음했다.

“아……. 흐……! 앙! 아, 아!”

호연이 몸을 벽에 부딪쳐가며 흔들었다. 오히려 세정의 입술에, 콧날에 아래를 비비는 꼴이 되었으나 단지, 피하고 있다는 기분으로 안도했다.

“세, 흣……, 아아……. 정…….”

세정이 아래를 길게 핥았다. 흘러나온 애액이 아깝다는 듯 빨았다. 혓몸의 모든 것이 세세하게 느껴졌다. 아래의 갈라짐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세정이 음핵을 입술 끝으로 물고 당겼다.

입술과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 있던 음핵이 흡인되는 꼴을 마지막으로 호연의 아랫배가 확 조여들었다.

모여 있던 감각이 발산하듯 터져나갔다. 앞뒤로 휘젓듯이 움직이던 허리가 빳빳하게 굳었다. 곧 툭툭, 근육이 풀리고 허무하게 머리칼을 놓친 손이 남자의 젖은 콧날을 스쳤다.

진한 탈력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자꾸 눈이 감겼다. 충분히 기진한 몸이 여기까지라고 한계선을 그었다.

분명 그랬는데,

“응!”

아래로 깊이 처박히는 두꺼운 성기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남자는 그저 바지를 끌어 내리고 일어섰을 뿐이었다. 척척하게 젖은 아래로 흉흉하게 솟은 성기가 자연스럽게 처박혔을 뿐. 그저…… 남자의 키가 커 성기의 끝까지 꽂혔을 뿐.

이번에는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몸이 튀어 오르는데, 도망친 곳이 고작 세정의 품이라는 게 지독하게 두려웠다.

호연은 본능적으로 세정의 발등을 타고 올랐다. 안쪽의 끝, 그쪽을 두드리는 성기가 하복부를 찢고 나올 것만 같았다. 발버둥이라면 발버둥이었다.

“나 진짜……. 흐으. 망가질, 읏! 으흐……. 것, 같아서어……. 응…….”

세정이 공들여 움직이지 않아도 연신 미끄러지는 호연의 발이나 조여드는 안쪽의 사정으로 성기가 부풀어 그녀를 자극했다. 호연은 손을 뻗어 세정의 양 뺨을 붙들고 울먹거렸다.

“나, 나, 나흐으으……. 아, 아…….”

바르르, 턱을 떠는 꼴을 보던 세정이 성기를 꽉 물고 경련하는 내벽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이를 악물었다. 목이 타는 갈증이 돌았다. 간절하게 애원하는 호연의 입술을 맞물며 탐했다.

“씹…….”

그래도 해갈되지 않는 갈증에 세정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처박고 싶다. 처박고 싶다. 처박고 싶다.

가볍게 허리를 짓쳤을 때였다.

“……흐으. 아! 응!”

호연이 부들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왈칵, 호연의 예민한 살점을 짓누른 살덩이에도 애액이 뚝뚝, 떨어졌다.

세정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자위해요, 지금?”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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