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들어오세요.”
“네, 사모님.”
예의 반듯한 미소를 지닌 신원이었다. 담백한 눈길이 호연의 다친 발에 머물렀다가 안타깝다는 듯 눈썹이 처졌다.
안 아픈데…….
“저 이제 가보려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자세를 고쳐 인사하려는 호연에게 신원은 가슴 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편하게 계세요.”
아내도 이 년이면 갈아치우는 남자가 북두 그룹의 임원이 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심복으로 부린 사람이라고 했다.
제게는 어떤 날 부럽기도, 어떤 날 신기하기도 했던 사람.
“세정 씨도 같이 가시나요?”
가시나요, 가셨나요. 고민하다 말을 골라냈다.
“아니요. 하루 쉬십니다.”
“서 비서님은 안 쉬세요?”
“음……. 이번 달은 쉬어야 하는 날이 따로 있어서요.”
꺼리는 대답도 찰나에 잘 꾸며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호연의 시선은 조르륵 흘러내려 신원의 왼쪽 약지에 멎었다. 오랜 시간 반지가 끼워져 있었는지 그 부분만 잘록했다.
“혹시 여자 친구 있으세요?”
호연의 시선이 닿은 손을 눈을 내려 확인한 신원이 고개를 까딱, 했다.
그 질문을 하는데 왜 제 손을 보고 있지, 어리숙한 모습으로 다시 눈을 들었다.
“아뇨, 없습니다.”
그러곤 다 지난 일이라는 듯이, 가볍게 말해도 상관없는 오래전 이야기라는 듯이 발씬 웃었다.
“소개해 주시게요?”
이번에는 호연 쪽에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저 친구가 없어서요.”
“아…….”
입을 벌리며 탄식한 신원이 침을 꼴깍 삼키고 뒤를 살폈다.
“전무님이랑 똑같으시네요.”
비밀이라는 듯이 속닥이는 말에 호연도 해사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쾌차하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한 신원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호연은 그 자취를 눈으로 더듬다가 수연을 떠올렸다.
신원은 수연의 전남편이었다. 짐작한 지는 꽤 되었고 얼마 전, 수연과 만나 술자리를 가지며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직 결혼반지를 빼지 않은 수연과 결혼반지가 맺혀 있던 자국만 남은 신원은 무언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지만…… 상대를 떠올릴 때의 애틋한 표정들이 닮아 있었다.
여자 친구가 있냐는 물음도 수연이 한 번만 물어달라고 넌지시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신원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다면 전달하는 마음이 한층 무거웠겠지만, 없다고 하니 한결 가벼웠다.
“…….”
울 것 같던 수연의 얼굴을 기억한다. 여러 번 손을 바르작거리던 수연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누군가의 미래를 닮아 있었다.
그러니까, 나…….
지난 결심과 달리 이 사랑은 이혼 후에도 얼마쯤 지속이 될 것 같았다. 그때는 수연처럼 여러 번 서글픈 얼굴이 되겠지. 지금의 저도 썩 다른 꼴은 아니었으나…….
호연은 손끝으로 발찌를 만져보았다.
한동안 돈이 되는 걸 계산했던 날들이 있다. 이혼 후에도 지속되어야 하는 민형의 치료가 막막하게 느껴져서 그랬다. 그때는 모든 게 돈으로만 보였었는데…….
“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어느 날, 궁색한 처지를 못 이긴 엄마가 친할머니의 유품이라던 금붙이를 팔겠다고 나섰던 날이 있다.
물론 늘 재수가 없던 엄마는 금값을 매겨 보긴커녕 소매치기에 죄 빼앗기고 말았지만, 어찌 됐든 팔겠다고 결심한 그 마음을…… 나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렇듯 소실된 기억 중에서 떠오르는 건 늘 징그럽게도 지난한 날들뿐이다. 살던 집의 위치나 생일이나, 그게 아니라면 엄마의 이름이라도 기억하고 있으면 좋으련만.
생일은 엄마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영영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자조할 때였다.
“뭐 재밌는 게 있나.”
호연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세정을 보았다. 처량하게 말려 올라갔던 입꼬리가 주저앉았다.
검정 티셔츠를 바지에 넣어 입은 무채색 차림의 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딜 가든 눈에 띌 모습이었다.
호연은 그 모습을 조금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았다.
“뭐 없는데?”
허리를 살짝 굽혀 창밖을 내다보던 세정은 비스듬히 두었던 고개를 바로 해 호연을 바라보았다.
그 빤한 시선을 못 이겨 서둘러 다른 곳을 바라본 호연은 주먹을 쥐어가며 마음을 환기했다. 순식간에 배어 나오는 땀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을 암시하는 것과 같았다.
“발찌…….”
물끄러미 내려보내던 시선을 걷어내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던 세정이 다시 이쪽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아무리 못 쳐줘도 억을 호가할 선물에 대한 감사가 제가 생각하기에도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아.”
단조로운 대답이었다. 세정은 물 컵에 물을 따라 들고 와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곤 이불을 들춰 발찌가 걸린 발목을 응시했다.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와중에도 시선은 한결같았다.
호연은 그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발가락이 나뉘어 있는 것부터 그 하나하나가 개별로 움직이는 것까지 들키고 싶지 않은 밑도 끝도 없는 기분이 되었다.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리네요.”
감상평은 거기서 끝이었다.
“매장 가서 푸는 거 아니면 못 푼다는데.”
“네? 진짜요?”
“응. 평생.”
그 놀란 반응에 세정이 웃었다. 이내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나 물 컵을 치우고 돌아왔다. 그러곤 문득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카드가 새카맸다.
“뭐……예요?”
“카드.”
몰라서 묻는 거로 보이나.
“그러니까 카드를 왜 주세요?”
“주고 싶으니까.”
“발찌도 주셨잖아요.”
“갖다 팔진 마요.”
영양가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호연은 가슴이 뜨끔했다. 동시에 제대로 된 답을 듣기는 그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필요한 거 사라고 주는 거예요.”
“……필요한 건…….”
“이미 백호연 씨가 사고 있겠지만, 그냥 개인적으로 쓰라고. 이건 나한테 내역 안 오도록 설정해 놨어요.”
결혼식 다음 날, 새벽 비행기로 떠난 남자는 카드를 남기고 갔다. 그걸 얘기하는 것이다. 내역이 남을까, 걱정하느라 카드를 쓰지 못했나 싶은 눈으로.
다시 한번 받으라고 손을 까딱이기에 호연은 카드를 받았다. 카드 주제에 묵직했다. 지난번에 받은 것처럼 쓰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내역 따위를 걱정해서 카드를 쓰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이 결혼이 오로지 나를 파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무렵, 남자가 제게 준 카드는 화대 그 이상, 그 이하라고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는 생각을 제법 고쳐먹었고 카드를 받았다는 사실도 잊고 지냈다. 또 이제는 작품을 팔고, 일을 해서 적지만 돈을 벌고 있지 않나.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에게는 넘치는 돈으로 일단락하고 싶은 결혼이겠지.
호연은 몸을 돌려 초대장이 있는 협탁 위로 카드를 올려두었다.
이어지는 침묵이 길었다.
전과는 다른 이유로 불편했다. 남자와 함께 있는 순간은 늘 긴장이 도사렸다.
그게 단순히 갑과 을의 형태에서 빚어 나오는 것이든, 간밤의 열락이 남아 성적 긴장감이 어린 것이든, 못 견디게 불편한 것만은 진실이었다.
“저 좀 나갔다 올게요.”
결국 기다란 침묵을 못 견딘 건 호연이었다.
세정은 침묵을 못 이겨 계속 말을 붙이는 속성과는 평생 거리가 멀었고, 호연은 사람들 눈치를 보는 게 익숙한 대학원생이었다.
“…….”
“……?”
그런데 호연의 말에 세정이 일어났다.
호연은 세정이 카드를 내밀었을 때보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발.”
세정은 짧게 말했고 호연은 자각이 느렸다. 아프지도 않아 잊고 있었다.
호연이 붕대조차 없는 발을 보고 있으니 한편에 있던 휠체어가 눈앞에 나타났다.
“……안 아픈데요.”
“무리할 필요는 없죠.”
무리도 아니라고.
정작 무리했던 기억은 간밤의 섹스였다고.
다만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당신이 불편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기우뚱거리며 바닥을 딛자, 세정이 호연의 팔뚝 넓은 부분을 잡아주었다. 그러나 그게 하필 어딘가에 부딪힌 곳이라, 호연은 뿌리치듯 떨쳐내고 세정을 바라보았다.
“……아까 부딪힌 자리라 아파요.”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주머니에 찔러 넣는 손이 묘하게 불량했다.
그러곤 제가 묻기라도 했냐는 듯이 눈썹을 들어 올린다.
호연은 조심히 휠체어에 앉아 가만히 앞을 주시했다. 그런데 좀처럼 움직이질 않아, 고개를 꺾어 다시 세정을 올려다보았다.
“어딜 가는지는 말해줘야지.”
“아…….”
호연은 그제야 행선지를 고민했다. 그냥 막막하게 병실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잠시 숨을 돌릴 곳, 남자의 체취가 빼곡하지 않은 곳, 그래서 제 심박이 덤덤할 수 있는 곳.
그러다 보니 적당한 행선지가 골라졌다.
“바깥 공기를 좀 마시고 싶어요.”
세정은 대답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휠체어를 밀었다. 밖에 비가 온다는 타박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는 귀찮은 어조 없이.
* * *
뺨으로 비 섞인 바람이 스쳤다. 병원 뒷길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을 보며 그 앞에 섰다. 하늘에는 별 하나 없고, 비안개가 낀 세상은 볼만한 게 없었다.
다만 숨은 좀 트였다.
호연은 세정이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세정은 연신 새근덕거리는 호연을 비스듬히 바라보다가 심사가 꼬였다.
여자는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하겠지. 동생을 죽인 살인범일지도 모르는 자신을 앞에 두면 그렇겠지.
그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호연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잡고 있던 휠체어에서 무게라 부를 게 사라졌다.
얼마간 걸어간 호연은 손을 내밀어 빗줄기를 가늠했다. 그러다가 손바닥으로 톡, 떨어진 빗방울을 가져와 살폈다.
바람이 분다. 눅눅한 바람결에 뻣뻣한 환자복과 가벼운 머리칼이 흔들렸다.
언젠가 호연을 보고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던가.
그때는 쉽게 눈을 뗐었나.
모르겠다.
한층 더 음울한 색감으로 칠해진 여자는 그 속에서 아름다웠다.
하느작거리는 몸짓이, 빗방울을 들여다보느라 좁아진 어깨가, 끝내는 까치발을 들어 저 먼 곳을 내다보는 어린 모습이,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인정한다.
이건 경외심이었다.
생애 그토록 사랑했던 비싼 피아노마저도 내가 멋대로 타건하면 그만이라고 사소하게 짓밟았던 마음이 더는 그렇게 안 됐다.
그리고 백호연이,
“저 비 좀 맞아도 될까요?”
속도 없이 사근사근히 물어올 때면 대책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불가항력처럼,
잘 단속했던 마음이 어딘가로 끊임없이 새고 있었다.
세정은 손을 올려 가슴을 눌렀다.
막으면 그치는 듯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