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나름의 이유를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세정은 문을 밀었다. 빛이 구두를 뒤덮고도 조금 더 넉넉히 퍼졌다.
“응, 저는 잘 지내요. 원장님은요? 뭐가 다 괜찮아요. 영주는요? 아직 그래요? 아……. 적응이 어렵나 봐요. 또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듣기 좋게 감기는 그 음성.
형체가 있다면 그 음성에 기대듯 세정은 벽에 머리를 대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백호연의 삶을 짐작한다.
“동혁이가 아윤이 괴롭히지는 않죠? 제가 조만간 치킨이랑 피자 사서 갈게요. 생일인 애들 있어요? 케이크랑 선물도 사면 좋을…… 아! 민주 생일이 다음 달인 거 왜 잊고 있었지. 정신이 너무 없나 봐요.”
백호연은 항상 그랬겠지. 친절하고 선하여 따뜻하다가도 뒤쪽에는 그늘이 있어 간담이 서늘해지는 찰나를 종종 안겨주는 사람이었겠지.
다정했겠지.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늘 우선이었겠지.
그러니까 그 까다로운 고모님도 백호연, 당신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그랬겠지.
그런데 왜 당신은 내 앞에서만 제 감정이 우선인 순간이 있고, 마구잡이로 거짓말을 하는 악한일까.
“저는 아픈 곳 없다니까요.”
나는 공평하게 모두에게 악한인데 왜 당신에게 상처를 줄 때면 내내 신경이 쓰이는지.
“괜찮은 척하시는 건 아니죠? 저는 원장님 걱정뿐이에요. 건강하세요.”
누가 누굴 걱정해.
세정의 입가로 푸스스, 웃음이 번졌다.
그러는 본인은 제 인생 저당 잡고 뒤흔드는 새끼랑 배나 맞추고 있는데, 누가 누굴 걱정해.
세정이 생각하기에 제 인생은 연민이나 안타까움을 느낄 구석이 전혀 없었다. 꿈을 부수었지만, 다른 것들도 많지 않나. 꿈을 안고 사는 사람은 드물지 않냐고.
그러므로 세상 사람 모두에게 물어도 제 인생은 그리 불쌍한 흔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백호연은 달랐다.
당신은 나를 자꾸 불쌍하게 만들어. 불운하고 불행한 눈을 보며 열패감을 느끼게 만들어.
그리고 그런 백호연을 생각하는 내가…… 용납이 안 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제 처지에서 남을 걱정하고 챙기고 신경 쓸 수가 있을까. 나는 또 왜 백호연을 생각하나.
술 취해 통제를 잃은 머릿속이 폭주하듯 호연을 그려놓았다. 오물거리며 대답을 내놓을 호연의 입술이 신경 줄을 바짝 당겼다.
“야!”
문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정은 한결 경쾌해진 호연의 음성을 되짚었다.
“나 입원했어.”
친구인가.
호연은 딱 그 나이대의 여자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도 웃나.
소리 없는 웃음만 짓는 줄 알았다. 그냥 제 앞에서는 그만큼 웃을 일이 없었다는 건데.
“아니, 금방 퇴원할 거 같으니까 오지 말고. 응? 진오……? 휴학한대? 아……. 나? 나랑은 뭐…… 아무 일 없었어.”
여기서 또 거짓말. 제게 하는 것과 공통점이 있을까.
알코올로 절인 생각들을 파헤치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정은 문을 완전히 밀어젖혔다.
쾅―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호연이 놀라 파뜩, 돌아보았다.
“어…….”
호연이 길게 음을 늘어뜨리며 세정을 훑었다. 긴장된 눈이었다.
제가 사람을 죽인 걸로 아니까 그렇겠지.
세정은 다시 넘어오는 알코올을 쓰게 삼켰다. 호연의 커다란 동공에 갇힌 채로 전화를 끊지 않아도 된다, 손을 흔들었다.
호연은 세정의 모습이 언뜻 휘청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말 비틀거리면서 한 걸음.
호연이 급히 전화를 끊었다. 침대를 무릎걸음으로 가로지르는 호연의 다리에는 이제 붕대나 지지대 따위가 없었다.
“술 마셨어요?”
이 꼴을 보면 모르겠냐는 듯 세정이 실없이 웃었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웃음이 헤퍼지는 남자, 취한 거 맞네.
호연은 놀란 눈을 가라앉혔다.
세정은 물끄러미 저를 올려다보는 호연을 내려다보았다. 고개가 비스듬해지고 동그란 호연의 눈부터 시선이 한 칸씩 내려와 몸을 훑었다.
빳빳하게 세워진 호연의 목덜미는 잇자국이 사라져 깨끗했다.
시선이 난잡하면 이런 걸까. 세정이 눈길이 떨어지는 곳마다 탁탁, 불이 켜지듯 호연의 몸에 열이 올랐다. 학습된 반응이었다.
그 수줍은 반응을 살핀 세정은 손을 뻗어 귓불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살결을 문질렀다.
“아…….”
턱을 당겨 붙이는 호연의 신음이 야릇했다. 세정은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살살 스치는 것 같기도 꾸욱, 미약한 힘을 주어 누르는 것 같기도 한 손길이 이어졌다.
눈을 맞춘 채 여린 살점을 더듬는 행위가 묘했다. 호연은 발과 발을 꼬아내다 이내 비볐다.
“왜…….”
호연이 겨우 의문을 뭉쳐냈다.
“그러게.”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지만, 세정의 입꼬리가 차츰 아래로 처박혔다. 호연의 턱뼈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그 뼈를 부술 것처럼 누르는 손길로 이어졌다.
호연은 눈매에 힘을 주었다. 세정이 나름의 이유를 찾아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해주지 않겠지.
“기세정 씨는…….”
무릎을 세워 반쯤 일어난 호연이 세정의 허리에 손을 댔다.
그리고 세정의 가슴팍 아래,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들어야 하는 위치에서 입술을 빠끔거렸다.
폐부 가득 차오르는 술 냄새에 취할 것 같고, 그가 가진 특유의 체취가 밀려들어 어지러웠다.
그런데도 꼭 지금 터트리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무 나빠요.”
오지 않을 줄 알았다. 늘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러면…… 내가 또 기대하게 되잖아.
자꾸 기대를 걸어보게 되잖아.
당신이 올 거라고. 천성이 다정한 남자니까, 지금처럼 돌아볼 거라고. 믿어보게 되잖아.
“너무 나빠…….”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실그러트렸다. 긴장으로 호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정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반응을 기다리는 심정이 심장을 토할 것만 같았다.
이내 제가 토할 것처럼 긴장한 찰나를 지나, 남자의 표정은 웃음이 되었다.
“모르고 결혼한 거 아니잖아.”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깨물리듯 삼켜진 입술로 마취를 당하는 것 같은 알싸한 알코올이 돌았다. 그 독한 내음에 고개를 비틀어보지만, 더 넓어진 잇새로 가득 휘몰아칠 뿐이었다.
호연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세정의 요구에 순응해 입술을 벌렸다. 빠듯하게 턱을 들어 올리는 세정의 손길을 받아들이면서 그 목덜미로 팔을 둘렀다.
영혼이라도 뒤섞이는 듯 깊숙이 맞물리는 입맞춤이었다.
혀뿌리가 당기는 힘이 셌다. 뭉개지며 뒤틀리는 말캉한 살이 예민한 혀 천장을 쓱, 쓸었다.
“으흣……!”
쪽, 쪽, 짧게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호연의 신음이 틔워졌다. 불같이 더운 숨이 세정이 불어넣는 알코올에 붙었다. 넉넉한 환자복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호흡의 리듬이 크게 해쳐졌다.
“더워요…….”
들쭉날쭉한 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말이었다. 이에 세정이 고개를 돌려 에어컨을 확인했다. 호연을 떼어놓고 그를 향해 걸어가는 걸음이 거침없었다. 호연은 크게 절망했다.
“그게 아니라…….”
사그라드는 문장에 세정이 에어컨을 켜고 돌아왔다. 호연은 고개 숙여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정이 제 앞에 다리를 굽혀 앉는 것도 모르고.
“내가 모를까, 그걸.”
톡―
호연은 불현듯 다가온 커다란 손이 제 환자복 단추에 닿아 있는 걸 보고 흠칫, 뒤로 물러났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으니까.
“하다가 더울까 봐.”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간 멈추었던 심장은 갈비뼈가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거칠게 뛰었다.
물러난 만큼 더 다가온 손이 단추를 풀어냈다. 세밀한 작업을 하지 못하는 세정의 손가락이 여러 번 헛돌 때, 호연은 그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 탓인지, 남자의 여유로운 손짓 탓인지 온몸의 끝이 삐쭉거렸다.
호연은 세정을 도와 단추를 툭툭, 끌렀다. 드러나는 속살이 남자의 눈에 담길 때마다 가슴 끝이 통통하게 뭉쳐졌다. 제 눈에도 고스란히 보였다.
세정은 아무것도 덮이지 않은 호연의 가슴을 보고선 실소를 터트렸다. 호연은 그 허탈한 웃음을 듣자, 목이 졸아붙었다.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안 되겠네.”
단추가 두어 개 남았을까. 세정은 느린 움직임을 못 이겨 환자복을 힘주어 뜯어냈다. 그러곤 반쯤 일어나 한 손은 침대를 짚고 몸을 기울였다.
“아흐…….”
호연의 목덜미가 깨물렸다. 다시 한번 제 흔적을 새기겠다는 정염이 느껴지는 탐욕스러운 입질이었다.
동시에 양감 있는 가슴이 세정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가는 속살이 아깝다는 양 곧장 고개 숙인 세정이 쓱, 핥아 올렸다.
“아…….”
나직한 신음에 세정이 눈을 들었다. 몽롱하게 풀린 눈이 어느 찰나에는 한없이 유했다. 호연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세정이 하는 꼴을 내려다보았다.
유륜을 간지럽히나 싶더니, 그 정점을 베어 문다. 혀로 유두 끝을 돌려보는 선득한 행위에 하복부가 격랑에 휩싸인 듯 부글부글, 끓었다.
호연의 몸이 서서히 뒤로 휘어졌다. 세정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더듬었다.
가슴 우듬지에서 언덕, 갈비뼈가 도드라진 얇은 살가죽, 하복부를 지나쳐 세정의 입술도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호연이 가느다란 쾌감에 몸을 떨 때였다.
몸이 완전히 뒤로 젖혀지고 남자의 머리칼이 손가락을 스쳐 기묘한 감각을 자아냈다. 골반이 붙들려 딸려가는 순간이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꼼짝할 수 없는 마성이 있다.
“아읏, 아! 아! 응…….”
단숨에 다리 사이가 허전해졌다. 속옷까지 모두 끌어 내린 세정이 호연의 아래에 고개를 처박았다. 바둥거리는 허벅지를 잡아 누르고 두툼한 살을 헤집어 혀를 길게 내었다. 소름이 끼치는 감각을 진득하게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지경을 넘어서서 끔찍하게 저릿했다.
혼자 있을 때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제가 이리 흐무러져 느끼는 것처럼 남자도 제 아래가 빨리면 이런 아득한 기분을 느끼게 될까.
“흐으으…….”
생각은 사치였나. 희열 속에서 가늘게 몸부림친 호연이 이불을 긁어모았다.
기실 평소 같지 않은 게으른 혀 질이었다. 맞물린 살을 가르고 작게 돋아난 음핵을 혀끝으로 누르는 행위가 느리고, 느린 만큼 적나라했다.
“아……. 아, 흑…….”
불쑥, 아래를 침입하는 혀가 느껴졌다. 질구를 파고든 혀가 단단한 남자의 성기와는 달랐다. 미끈하고 뜨거운 물고기를 풀어둔 것과 같은 아뜩함이 있었다.
“흐으응, 으! 앙, 아!”
이에 호연은 경련하듯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짚은 손이 고정되지 않고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 아래로 세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애액이 번진 입가를 혀로 닦는 느른한 행동 속에 묻어나는 권태로움이 경고 사이렌을 울렸다.
도망치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