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기세정!”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오는 휘영의 걸음이 사나웠다. 성질이 바짝 오른 음성과 불붙은 시선이 세정에게 꽂혔다.
이름을 불린 세정보다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윤진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인사.”
세정은 타오르는 눈길을 느끼면서도 태연자약한 태도로 고개를 까딱, 했다.
고모님께 인사하라고.
“네가 맞선 자리에 유인 홀딩스 유아민 내보냈어?”
그러나 휘영의 귀에는, 눈에는 그딴 게 들릴 리도, 보일 리도 없었다.
“인사.”
다시 한번 세정은 휘영을 찍어 눌렀다. 앉아서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세정의 무거운 기류가 휘영의 사나운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시근덕거리며 가슴을 들썩이던 휘영의 시선이 윤진에게로 흘러내렸다.
“아냐.”
자존심이 상해 인사를 못 하겠다는 눈이다. 이로써 정립된 서열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남자들이란.
윤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일어났다.
“내가 갈게. 둘이 얘기해.”
선선한 웃음. 나이가 들지 않는 싱그러운 외견.
“늘 고마워요. 기세정 전무님.”
세정에게 힘을 실어주는 말을 끝으로, 휘영에게도 입 모양으로 수고해, 그랬다.
그게 여느 때와 같은데 휘영은 두 주먹을 쥐었다.
제가 언제 한국에 오고자 했나. 강제로 귀국한 후, 어딜 가든 그랬다. 너는 기세정 발끝도 못 따라간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웃어야만 했다.
나는 기세정 자리가 탐나지 않는다고. 나는 내 주제를 안다고. 나는 그저 기세정이 가는 자리에 허들이나 되고 싶다는데, 왜 자꾸…….
“왜 사람을 좆같이 만들어.”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힌 낮은 음성에 세정은 모르겠다는 양, 웃었다. 그리고 자리를 권했다.
“맞선 자리에 유인 홀딩스 유아민 네가 내보냈어?”
이미 답을 알고 왔다.
세정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느슨하게 앉았다.
“내가 내보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내 기분이 달라지지.”
“아, 내가 내보낸 게 아니면 좆같은 기분이 좀 사그라드나?”
“…….”
“어차피 좆같은 마음으로 나섰을 맞선, 제대로 화낼 구실 준 형한테 고마워해야지.”
“…….”
“버르장머리 없이 이딴 식으로 굴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휘영은 잠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맞선 자리에 최원길 의원의 딸, 최리연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제 앞에 상대로 앉은 건 유인 홀딩스의 유아민이었다.
그래, 솔직히 인정하면 제게는 과분했다. 한 번의 파혼으로 흠결이 있는 여자기는 해도 사생아인 자신에게는 최리연보다 도움이 될 여자고, 결혼이 성사된다면 넘치도록 좋은 뒷배를 가지게 되는 거였다.
그러나 화가 났다. 한규가 골라 내보냈다면 덜했겠지. 기세정과 맞선을 봤던 여자가 그의 양보로 제 앞에 나오다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냐고, 내가.
사방에서 치이는 상황을 못 견뎌 여기까지 왔다. 비록 또 꼼짝없이 입을 닥치고 분을 삭이지만, 이곳에 쳐들어오기까지 치밀어 오른 말들이 많았다.
“내가…….”
말문을 트려는 휘영의 발끝으로 사진이 여러 장 날아들었다.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휘영의 허리가 굽었다.
제 사진이었다.
이날이 언제더라. 휘영은 사진을 살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 언제더라. 기세정이 제게 사람을 붙였을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사진 속 여자의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백호연?
기한규의 진갑잔치 날.
이런 건 어떻게 찍은 거야. 만화원에 사람을 어떻게 들여보냈어.
세정의 철두철미한 성미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나눈 대화까지도 다 들었을까?
“내가 이 꼬라지를 봤는데도 사생아 새끼 좋으라고 국내 유수의 대기업 딸을 붙여줬네.”
“…….”
“형, 감사합니다, 해봐.”
씨발, 들었나 보네.
휘영이 고개를 돌려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건 단순히 제 성에 안 차는 여자를 내려보낸 게 아니었다. 세정은 본인이 한규에게 당했던 짓을 고스란히 제게 돌려주고 있는 거였다.
거기서 강한 오라가 느껴졌다.
휘영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북두 그룹의 주인은 자신이 될 것이라는 꼿꼿한 자긍심. 휘영을 손아귀 위에 올려 장기말로 쓰겠다는 오만한 태도.
휘영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기세정은 돈 안 될 리조트에 관심 없는 거야. 최원길 의원을 등지면 구겨질 한규의 자존심은 애초에 상관없는 거라고. 유인 그룹과 손을 잡으면 발을 디딜 수 있는 중국의 광대한 대지, 거기서 벌어들일 막대한 외화에나 관심 있는 거야.
“회장님은…….”
한규가 알게 된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였다. 제 계획을 모조리 박살 내는 짓이니까.
“백호연한테 허튼 소리 할 때는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순간, 휘영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한 번도 감정이 섞인 적 없던 세정의 어투에 울렁이는 분노가 있었다.
잠시 속초의 바다 앞으로 돌아간다.
이상하다고 느꼈었지. 약점이라고도 생각했고, 끝내 여자의 어린 얼굴을 보고는 긴가민가했다.
이게 세정의 약점이 맞나, 그랬는데.
……화를 낸다?
기세정이?
“……기한규랑 똑같은 새끼.”
휘영이 뇌까리자 세정의 얼굴에 설핏 금이 갔다. 그 얼굴을 확인한 휘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약점이었네.
그리고 또 한 번 기가 찬다.
약점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감히 공격해 보라는 자세를 취하니까.
그건 세상 어느 것도 그 약점을 찌를 수 없다는 오연함이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나는 네 어머니부터 박살을 내볼까.”
잘못 건드렸다가는 산산이 부수겠다는 엄포다.
* * *
“기휘영 씨, 본가 드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진갑잔치에서 나올 말이나 알자고 세정은 영한의 신분을 위장해줬다.
“또 아프세요? 아, 회장님 진갑잔치 다녀오신 다음이었는데……. 무슨 이상한 얘기라도 들으셨나. 식은땀을 흘리시고 며칠 앓다가 일어나셨어요. 제가 봤을 때 지금도 정상 컨디션은 아닌 것 같긴 했어요.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넌지시 던진 물음에 화들짝 놀라 호연의 상태를 보고하던 사용인이 있고.
“그…… 전무님이 기소라 씨를 죽였다고 하는 것 같던데요……. 그 말을 듣고 백호연 씨가 쓰러졌고요.”
며칠간 협상을 고민했는지, 사진을 내밀고 눈치를 보던 반질반질한 영한의 검은자위가 있다.
“회장님이 차까지 보냈다는데, 질부가 안 갈 수 있겠어? 응, 나도 회장님이 차 보낼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 그렇다고 뭐……. 질부를 의심할까?”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고 찾아온 윤진에게도 앞뒤 상황을 전해 들었다. 영한이 맡은 것은 휘영의 뒤일 뿐, 호연이 아니었으니까. 이 기회에 호연에게도 다시 사람을 붙였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덫에 스스로 발을 넣어준 휘영 덕에 한규를 엿 먹이고 유인 그룹을 취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정말 운이 좋았을까.
“전무님.”
“네.”
흩어지는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세정의 눈썹 사이로 선이 그어졌다.
“고진오 씨, 처리했습니다.”
“네.”
백호연이 원하던 대로 눈에 안 띄게.
“이건 전무님 앞으로 온 초대장들인데요. 확인해 보시고 참석 의사 밝혀주시면 일정 조율하겠습니다.”
테이블 위로 초대장들이 놓였다.
막연히 흐르던 세정의 시선이 푸른 색감 위에 머문다. 눈에 익은 색감과 금장 글씨.
세정이 봉투를 손끝으로 당겼다. 순간 신원이 흡, 눈에 띄게 어깨를 굳혔다.
[고희원 피아노 리사이틀-서울
예술의 전당 음악당 콘서트홀]
아, 비서실에 신규 입사한 애가 사고를 쳤다.
“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한 번 더 확인을 해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세정의 앞에서 피아노라는 말은 암묵적 금기였다.
세정이 피아노를 쳤다는 특이한 이력 탓에 때때로 세정의 투자를 기대하는 소속사에서 초대장을 보내오곤 했다. 그러나 모두 비서실에서 걸러지곤 했는데. 아, 정말이지 변명 못 할 패착이었다.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신원이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힐끗, 시선을 올린 신원이 세정의 동태를 파악했다. 손끝으로 초대장의 네 선을 훑는 단순한 행동과 지루한 표정이 있었다.
불쾌한 기색도 없고, 짜증이 난 기색도 없으며 심지어는 그냥…… 기색이라고 부를 것 자체가 없다.
어딘가 모르게 멍한 느낌.
상념에 빠진 세정의 눈이 흐렸다.
“전무님?”
“네.”
대답은 하고 있되, 집중은 전혀 하고 있지 않은 눈치가 역력했다.
출장 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출장 다녀오신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많이 걱정됩니다.”
쉴 새 없이 들이치는 일정들 탓에 ‘그’ 기세정이라도 피곤한가?
신원은 세정의 낯선 균열을 문지르며 살살 웃었다.
제 상사는 해야 할 몫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때때로 인간의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도 자각을 하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이기도 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상사의 페이스를 조절해주는 일. 그게 제가 할 일이었다.
“벌써 열두 시가 넘었습니다.”
그 말에 시계를 확인한 세정이 아, 낮게 응답했다.
“쉬지도 못했겠네요. 퇴근해 보세요.”
“아닙니다. 초대장은 주시면…….”
세정이 초대장을 제게로 살짝 당겼다.
“여기는 가볼까 해서.”
“아…… 네.”
신원은 오늘따라 세정이 퍽 낯설었다.
* * *
세정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한 손에 쥐어진 초대장과 발찌가 무거울 리도 없는데,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퇴근하려는 신원을 잡아다 몇 잔 마셨다. 신원은 반쯤 죽어났고, 세정은 그나마 멀쩡히 설 수 있어 호연이 있는 병원까지 왔다.
세정은 어두운 복도를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어디들 그리 아픈 분들이 많은지. 이런 곳을 마다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힌 오은선의 심정은 지금 어떤지.
“……기한규랑 똑같은 새끼.”
결과적으로는 그런가.
제가 한규와 똑같이 살지 않으려고 자행한 일들이 결국은 그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결혼으로 붙잡아 둔 아내를 이용하는 행위.
더할 수도 있겠네.
금방 사그라들긴 했어도, 기한규는 제대로 사랑을 했으니까.
그에 반해 자신은 사랑은 없을 거라 못 박고, 부끄럼도 없이 노골적으로 그들을 이용하곤 했으니까.
누가 더 낫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짓거리를 가만히 헤아리는 게 문득, 어이가 없었다. 흡연 욕구가 치밀었다. 당장 해소하고 싶은 강렬한 섬광이 머릿속을 스쳤다.
세정은 마른 얼굴을 문지르며 병실로 들어갔다. 또다시 짧은 복도, 그 끝에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오는 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여기까지 왜 왔더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