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61화 (61/98)

제61화

이른 귀국과 동시에 만난 유인 홀딩스 유정우 대표는 세정의 제안을 거절했다.

세정은 조선시대에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조선시대 사람처럼 군다던 유 대표의 평판이 떠올랐다. 귀화를 위해 과거 시험을 봤을 거라던가.

정말 그 말 그대로 깐깐하고 꼬장꼬장할 줄이야.

기사와 신원을 돌려보내고 이제 집까지 반쯤 왔나. 거뭇한 하늘 아래 신호등 색이 붉게 바뀌었다. 도로 위 교통 체증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하게 지루한 장면이었다.

세정은 뻐근한 어깨를 움직이며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유 대표가 거절할 것이라는 계산은 이미 있었다. 결혼이 아니면 이 약속을 믿을 수 없다던 그가 단번에 동의한 차선도 있었다.

그런데 차선은 차선이었다. 엔마트를 취함과 동시에 호연을 버리고 아민을 네 번째 아내로 들이는 게 최선인데, 빙빙 돌아가는 귀찮은 짓을 택한 게 스스로 의문이었다.

소라의 돌연사 외에는 의문을 가져본 일이 없는데, 요즘은 좀 새삼스러웠다.

굽은 손가락들을 매만졌다. 원인으로 추정되는 게 없으니 의문은 머릿속을 부유할 뿐이었다.

세정은 신호등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내려 손가락을 보았다.

결혼 이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샤워할 때도 빼지 않았던 결혼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백호연은 끼지 않는 것. 부득불 반지의 유무를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집안 행사를 제외하고는 여자가 반지를 끼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발찌를 주면 차고 다닐까.

치부를 들려준 밤 이후로 울리지 않던 전화와 제 쪽에서도 굳이 하지 않았던 날들.

나는 당신 생각이 나서 선물 하나 샀다고.

세정은 발찌가 들어 있을 글로브 박스를 바라보았다.

“전무님의 개인 자금으로 진행했던 엔마트 RCPS(*상환전환우선주)의 만기일이 도래했습니다. 말씀 주신 대로 보통주 전환 대신 상환을 요청하였는데요. 엔마트 측이 굉장히 난감해하는 것 같습니다.”

계약 결혼의 연장으로 석훈은 당연히 상환 요청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현금성 자산이 바닥을 치고 여유 자금도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출점 점포를 정리하려는 행보를 보면 현금 흐름 또한 부정적이다. 과연 엔마트가 RCPS를 상환할 수 있을까.

없겠지.

엔마트라는 기업 하나를 이토록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세정은 손목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양부의 회사가 몰락을 앞둔 순간, 그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졌던 백호연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시간, 생활 반경이 뻔한 백호연이 있을 만한 곳은 두 곳.

집으로는 직진. 백호연의 학교로는 우회전.

신호등이 바뀌었다.

* * *

세정은 호연에게로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어디예요.]

메시지를 두 개 보냈다.

[출장 끝.]

돌아오는 답장이 없는 건 꽤 빈번한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화면을 손가락으로 그어보는 세정의 행위가 권태로웠다.

언젠가 호연이 그랬다. 면허가 있으나 운전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운전은 무서운 행위라 생각한다고.

세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운전은 무서운 거지.

“오래된 일인데…… 브레이크가 이상했었습니다. 밀린다고 해야 하나, 먹먹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뭐……. 사고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 같지는 않아요. 일단 급브레이크를 밟은 흔적이 타이어에 없잖아요. 사고 발생 위치에도 스키드 마크는 없지 않았습니까?”

없었지. 비가 왔었다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깨끗했다.

세정은 차창을 내렸다. 담배를 물고 그 끝에 불을 붙이는 행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손에 쥔 가스라이터를 몇 번 손으로 굴리며 한 모금을 쭉, 빨았다.

소라의 차에는 결함이 있었으나 사고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송 여사는 그녀가 집에서 떠날 때 멀쩡했다고 진술했다.

세정은 회백색으로 퍼지는 연기 속에 떠오른 지청재의 눈을 바라보았다. 능글맞은 눈이 잡아당긴 듯 무표정했다.

어린 날의 혼약. 당연히 무시되었던 서로의 의사. SQ 텔레콤 내 경영권 세습 순위에서 밀려났던 지청재. 소라의 파혼 통보.

이만한 동기도 없을 것이다.

세정이 다시 담배를 가득 빨았다. 빠르게 닳아 재가 된 부분을 휴대용 재떨이에 톡톡, 털었다.

시야 끝으로 걸린 학교 건물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세정은 그 층을 손가락으로 헤아렸다.

“팔 층.”

불이 꺼질 기미가 없는 저곳에 호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정은 거의 다 태운 담배를 짓눌러 껐다. 또 하나의 담배를 꺼내 물던 때였다.

“호연아!”

세정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너지듯 달려 내려오는 백호연. 그것만 확인했다.

동시에 헤드라이트를 켰다.

* * *

눈을 찌르는 빛에 호연은 두 다리가 꺾여 주저앉았다. 앞쪽으로 그림자 같은 게 성큼성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앉아 빤히 올려다보는 어둠은…….

내 생애 구원(久遠) 같은 구원(救援)이었다.

* * *

다리를 굽힌 세정은 허물어지는 여체를 받쳤다. 가슴팍에 고개를 처박은 호연이 가늘게 숨을 쉬었다. 뜨거운 숨결이 살갗에 뭉개졌다.

순간 머릿속이 핑, 하고 돌았다.

세정은 호연의 몸을 떼어내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정신을 놓아 내리감은 호연의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몽글몽글 맺혀 있었다. 짓씹은 입술의 핏자국이며 얼룩진 뺨까지.

엉망이었다.

얌전히 내리막길을 내려와 저를 보고 놀라는 얼굴을 상상했지. 허겁지겁 내려와 기절하는 꼴은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이 상황은 뭘까, 씨발.”

조용히 뇌까린 세정이 고개를 까딱, 뒤편을 바라보았다.

“뭐, 뭐……. 뭐, 뭐예……. 요!”

땀으로 범벅되어 있던 진오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 번졌다.

호연을 다시 너른 가슴에 안고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린 세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호연과 마찬가지로 만신창이인 상태. 호흡이 모자란 물음.

세정은 좀처럼 무언가를 잊지 않는 성정답게 곧바로 고진오를 기억해냈다.

지금과 같은 장소에서 만났던 기억. 그를 돌아보고 얼른 가라고 저를 채근하던 호연의 초조한 얼굴. 그를 겨냥하며 연애를 해도 좋다고 말했던 자신.

남자 친구냐고 묻고 그렇다고 하면 혼전 계약서의 조항대로 놔주는 게 맞는데.

“저…… 저어……. 호, 연이…….”

세정은 번들거리는 진오의 눈을 직시했다. 차츰 초점을 잃어가는 진오의 시선이 세정의 얼굴을 어지럽게 누볐다.

“호, 호연이…….”

“백호연, 뭐?”

진오는 저 남자는 뭐지, 혼란스럽던 찰나에 떠올랐다. 저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강한 굴복감을 느끼게 하는 눈이었다.

푸른 불꽃을 머금은 듯한 눈. 지독하게 시려 얼어붙다가도 목이 바짝 졸아붙는 듯한 뜨거움이 공존하는 눈.

여린 묘목 같은 호연이 절대 당해낼 수가 없을 듯했다. 저까지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것인데…….

“뭐 어쩌라는 거야.”

네가 소유권을 주장하면 어쩔 거냐는 듯한 낮은 음성이었다. 진오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

어떻게 할까.

순간, 딱 맞게 재단된 셔츠를 쥐는 호연의 손길에 세정은 허리를 세웠다. 목을 꺾어 길게 숨을 뱉었다.

* * *

호연이 깨어난 건 한 시간 전쯤이었다. 시간이 가늠되지 않아 창밖을 슬쩍 내려다보는데, 고요하고 새카만 세상이었다.

호연은 몸을 일으켜 공간을 살펴보았다. 병원 특유의 쓸쓸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돌아 이곳이 병실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바스락거리고 넉넉한 환자복을 들어 내려다본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시선은 천천히 내려가 불편한 손등에 닿았다. 며칠 새 두 번째 링거를 맞고 있었다. 절망스러운 몸 상태였다.

더 내려간 시선이 이불로 덮인 다리에 닿았다. 묘하게 둔하고, 은근히 무지근했다. 이불을 걷어내자 발부터 발목을 통으로 감싼 붕대와 지지대가 보였다.

과했다. 통증도 없는데.

모든 일이 요원했다. 혼절하기 직전 그토록 강렬했던 빛이 꿈결인가, 싶을 정도로 어슴푸레했다.

호연은 자신을 품에 안았던 사람이 세정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어제는 세정의 귀국 날짜도 아니었다. 뉴스로 확인한 날짜는, 진작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일 예정이었다.

그래서 더 꿈 같았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자는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까.

그런데도 기대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싸하게 풍겨오던 옅은 담배 냄새와 익숙한 품의 고른 박동. 귓가로 감기던 낮은 음성.

VIP 병실.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나.

그리고 더 확실한 건 남자는 돌아갔으리라는 결론이었다.

바쁜 사람이니까.

남자가 오늘 일을 물으면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까, 호연은 고민하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혹 아프지 않을까?

“…….”

아프지 않았다.

통증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발목이 답답하다는 배부른 생각을 하며 어렵게 몸을 일으킨 때였다.

“앉아요.”

병실로 들어오는 세정의 시선이 호연에게로 짤막하게 머물렀다.

“왜……?”

호연은 놀란 표정으로 세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네.”

테이블에 핸드폰을 내려놓은 세정이 휘적휘적 걸어왔다. 그러곤 호연의 이마를 톡톡, 쳐서 앉으라고 고갯짓했다.

호연은 졸지에 다시 침대에 걸터앉게 됐지만, 눈의 모양은 여전히 동그랬다. 그를 본 세정이 말하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안 가셨어요?”

“가기를 바랐던 사람처럼 말하네.”

“그런 의미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러게, 내가 왜 안 갔을까.”

그저 빙그르르, 말을 돌린 세정이 호연을 내려다보았다. 장난인 것 같은데, 장난 같지 않았다. 정말 저도 모르겠다는 듯한 어투였다.

이에 다시 입을 열려던 호연이 입술을 맞물었다.

“나 말 안 했어요.”

뜬금없는 말에 호연이 눈을 깜빡였다.

“백호연 씨 뒤에 있던 씹새끼한테 내가 남편이라고 말 안 했다고.”

험악한 단어에 움찔했다. 이어진 문장에 집중했다.

“……아?”

“백호연 씨, 동기잖아. 아니에요?”

“맞는데요…….”

어떤 반응을 해줘야 하는지 헷갈렸다. 남편이라고 말해주지 않아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거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원하던 대답이 아닌가, 호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 새끼…….”

“이름, 고진오예요.”

세정의 잇새로 욕이 비집고 나오는 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또한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세정이 진오의 이름을 몰라 그런다는 생각이 들어 알려주었다. 이에 세정의 눈빛에 살짝 금이 갔다.

“그 새끼가 백호연 씨 눈에 안 띄는 건 어떨 것 같아요?”

거리를 두라는 건가.

호연은 진오를 떠올렸다. 좋은 친구라는 생각을 했었다. 불유쾌한 눈빛으로 다가와 호감을 표시하던 남자애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 끝이 이런 꼴…….

“같이 다니는 무리라 아예 안 마주치기는 어려울 거예요. 지도 교수님도 같거든요.”

“안 불편하겠어요?”

“……불편은 하겠죠.”

“눈에 안 띄는 게 더 좋다는 거죠?”

말이 그렇게 되나?

“그렇긴 하죠……?”

“배 안 고파요?”

고개를 끄덕인 세정의 또 다른 물음이 이상하게 다정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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