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60화 (60/98)

제60화

희준과의 일정이었다.

“혹시 일 있어요?”

바에서 한잔하는 건 어떠냐는 경현의 제안을 물리치고 돌아온 호텔 방이었다. 반신욕이나 할까, 하는데 희준이 문을 두드렸다.

“술 안 취해 있는 사람이 기 전무뿐이네?”

출장의 마지막 날은 의례적으로 여유롭게 일정을 짜곤 했으니 남은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동행한 자리였다.

백화점을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이 주변 일대는 마비가 되었다. 백화점 외벽으로 화려한 불빛이 쏘아지는데, 이는 북두 백화점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의 모티브가 되었다.

“여기 기 전무는 많이 와 봤죠?”

입구 양쪽으로 선 카르시와 화이트는 북두 백화점에도 입점한 브랜드였다.

“네.”

“나는 정말 오랜만이거든. 에스컬레이터가 이렇게 바뀌었네?”

건축가 렘 콜하스가 제작했다는 에스컬레이터는 고객들에게 특별한 기분을 선사하기 좋았다. 보는 위치에 따라 색이 바뀌는 필름이 다채로웠다. 세정은 그쯤 고개를 돌렸다.

몇 년 전, 리모델링을 단행한 후 한층 세련된 디자인을 가져가 여전히 눈에 담을 게 많았다.

통일감은 있되, 브랜드마다 고유의 개성은 잃지 않은 VMD. 그를 둘러보는 세정의 눈빛이 한층 빛을 머금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북두 백화점 자체 어드벤트 캘린더를 생산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아내에게 선물할 가방을 고른다던 희준은 카엘 앞에 멈춰 있었다.

“뭐라고요?”

그러곤 듣지 못했다는 듯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세정은 그에게로 성큼 다가가 다시 한번 말했다.

“북두 백화점의 입점 브랜드들을 보여주는 어드벤트 캘린더를 생산하는 것도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 전무, 사람 참…….”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양, 희준이 귀를 쓸어 만졌다.

“얼마만의 쉬는 날인데 또 일 얘기를.”

질린다는 어투로 고개를 젓기까지 했다. 그러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타일렀다.

“기 전무. 쉬엄쉬엄해요. 마음처럼 될지는 모르겠지만, 또 내가 주제넘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일정 다 끝났는데, 응?”

[손님, 보여 드리겠습니다.]

끝이 어디 있나. 속 편한 말이라는 생각을 한다.

점원이 보여주는 가방을 열심히 살피는 희준의 여유로운 모습에 세정은 고개를 꺾었다.

제게 휴식이 필요한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그러나 쉬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어떻게 쉬나. 제게 던져진 삶은 전력 질주의 마라톤이었다. 쉬기 위해서는 제 발에 걸려 넘어져야 했다.

[그걸로 하죠.]

그렇다고 넘어질 수도 없지.

[네, 새 상품으로 꺼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세정은 입안이 썼다.

* * *

“정말 저녁 안 먹어요?”

“전 괜찮습니다. 많이 드세요.”

희준의 저녁 제안을 걷어낸 세정이 들어가시라, 눈짓했다.

[출발하죠.]

차가 부드러이 출발하자, 세정은 시트에 편히 기대었다. 언뜻 서울의 배경 같은 건물들 사이 이국적인 얼굴들이 느리게 지나갔다.

그놈의 성조기.

저조한 기분이었다. 쨍한 색감의 성조기마저도 속을 긁었다.

“와이프 선물은 안 사요?”

“뭐, 사 가 본 적이 없어서요.”

“좋아할 텐데. 우리 와이프는 내가 출장 갈 때마다 뭐 안 사 오나, 목이 빠져라 기다려요.”

한 귀로 듣고 흘렸던가. 흘리다 말았던가.

세정은 차창 밖으로 피오르 매장을 보았다. 4층으로 이루어져 우아한 외관이 돋보이는 부티크였다.

호연에게 받은 게 있으니 돌려줘야지.

[잠시만.]

차를 세운 세정이 피오르 매장으로 들어섰다.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안내받은 룸에는 셀러가 대기해 있었다. 곧 초콜릿과 샴페인이 내어졌다.

[어떤 걸 보고 싶으세요?]

셀러의 물음에 잠시간 고민하던 세정은,

[브레이슬릿.]

손목 같던 호연의 발목을 떠올렸다.

안쪽으로 사라졌던 셀러는 붉은색 벨벳 박스를 가져와 조심히 내려놓았다.

[한 번에 다 열어주세요.]

세정은 하나씩 입을 여는 박스를 눈으로 쓸어보았다.

계속해 호연의 발목을 떠올렸다.

속초에서의 밤, 괜히 한번 쥐어보았던 발목. 손목으로 걸어 다니나, 싶었던 생각. 얇고 약한 것 같아서. 아니, 분명히 얇고 약해서.

[이 브레이슬릿은 저희 피오르의 베스트셀러 모델로 공구에서 착안 된 디자인이 돋보이는 제품입니다. 총 0.6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이쪽과 이쪽에 33개 박혀 있어…….]

너무 흔하고.

세정의 대답이 없으므로 다음 제품의 설명으로 이어졌다.

[이 브레이슬릿은 스네이크 헤드를 형상화한 모델인데…….]

은근히 겁이 많은 백호연은 손조차 대지 않겠다.

세정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설명이 짧아졌다.

[이 브레이슬릿은 일명 테니스 브레이슬릿으로 불리는 다이아몬드 라인 팔찌로 심플한 디자인이라 어느 복장에도 잘 어울립니다. 총 8.2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별처럼 빼곡하게 44개 세팅되어 있고…….]

다이아몬드로만 이루어진 팔찌였다.

세정은 호연의 발목에 팔찌를 걸어보았다.

뼈대가 얇은 발목에 묶인 팔찌는 족쇄 같으려나, 증표 같으려나.

[매장에 와야지만 풀 수 있는 특수 잠금 처리도 인기 요인 중에 하나인데요.]

족쇄에 한 표.

세정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셀러의 설명이 멎었다.

[이거로 합시다.]

뒤로 한참 더 이어진 제품에 관한 설명은 됐다는 듯 손을 까딱였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초콜릿을 입으로 까 넣자, 호연을 닮은 단맛이 몰려들었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 * *

호연은 내내 몸이 안 좋았다. 물에 젖은 솜같이 무겁고, 누군가 때리는 것같이 아리고, 몸살 기운이 있어 하루에 몇 번씩 으슬으슬한 추위에 떨었다. 한규의 진갑잔치 이후로 계속 그랬다.

붓을 드는 손이 몇 번이고 힘없이 다시 떨어졌다. 작품의 주가 되는 물감만 치덕치덕, 괴롭혔다. 도무지 집중되질 않아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니까.”

뒤편에서 그림을 그리던 진오가 일어나 호연에게로 다가왔다.

“안 가봐도 돼.”

호연은 고개를 젓다 말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언제부터 둘만 남아 있었지?

“약은 먹은 거야?”

호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약국에서 사 먹었어.”

“약국이 아니라 병원을 가야지.”

“괜찮다고…….”

잠을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으면서도 아니고.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다시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호연…….”

진오의 손바닥이 어깨 위로 겹치자, 호연이 과민하게 몸을 털었다. 이에 당황한 진오가 허공에 손을 멈춘 채로 동공을 굴렸다.

흐트러진 셔츠 안쪽 연하게 남아 있는 울혈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를 핥듯이 본다. 더 안쪽으로 난 흔적들까지. 더듬더듬.

“미안…….”

미안해, 로 완성되지 못한 말끝이 풀어졌다. 호연은 급하게 셔츠를 추슬러 올리며 앞섶을 꽉 잡았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세정이 몸에 흔적을 남긴 후로는 더 타인의 손을 피했다. 혹시라도 이런 경우가 벌어질까 봐. 그래도 오늘은 목 주변의 울혈이 다 사라져 오랜만에 입은 셔츠였는데…….

안심하고 방심한 날에 꼭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곤 한다.

호연은 체념 어린 한숨을 삼켰다.

“너 남자 친구 있었어?”

“그런 거 아냐. 나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볼게.”

몸을 일으키려는 호연의 어깨를 진오가 눌렀다.

“……뭐가 그런 게 아냐, 앉아 봐. 호연아. 그거 뭐야, 남자 친구 있었어?”

날 선 어투와 뾰족한 눈매에 호연이 눌린 어깨를 보았다. 점점 더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모든 게 불안했다. 호연은 떨리는 입술로 최대한 담담히 내뱉었다.

“놔줘. 불편해.”

그에 반해 진오는 바싹 열이 오른 얼굴로 억눌린 발음을 냈다.

“얘기 좀 해.”

“좀 놔!”

호연이 진오의 팔뚝을 밀치듯 떨쳐냈다. 떠밀린 진오는 상처받은 눈으로 기이하게 표정을 무너트렸다.

그게 무서웠다.

“호연아.”

가방에 빠르게 짐을 쑤셔 넣고 일어나는 호연의 뒤로 진오가 허겁지겁 따라붙었다.

“호연아!”

소예가 진오와 사귀어 보는 건 어떠냐고 말을 한 뒤부터 진오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자주 붉어지는 목덜미나 방황하는 시선. 과한 보호와 동기 누구에게 물어도 두 사람, 이미 사귀는 거 아니었냐는 되물음. 마지막으로 소예의 인정.

“진짜 몰랐어? 나는 진오가 너 좋아하는 거 진작 알고 있었어.”

자각 후에 선명해진 건지, 진오가 조금 더 대담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때부터 호연이 차츰 진오를 피하게 되었고, 진오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근데 너 그거 알고 있었어? 너 좋다고 했던 남자애 있었거든? 진오가 걔를 죽어라 팼대.”

그 말을 듣고 난 뒤, 때때로 진오의 눈빛이 탁하고 흐리게 보일 때가 있었다.

그게 지금이었다.

쾅!

화실의 문을 거칠게 닫은 호연의 뒤로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캄캄한 복도를 내달리는 호연이 한 번, 두 번 뒤를 돌아보았다. 호연아, 호연아, 반복해서 부르는 진오의 음성이 불쑥불쑥 가까워졌다.

“얘기 좀 해, 호연아.”

“왜 따라오는데!”

“얘기 좀 해.”

“무슨 얘기를 해!”

악 지르듯 내뱉은 호연의 음성이 덜덜 떨렸다.

진오가 따라붙은 순간부터 공포였다. 또 한 번 어린 날의 기억이 머리를 자욱하게 뒤덮으려는데,

순간, 기세정 생각이 났다.

나 좀 도와줘요.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곧 흩어져 버린다.

두 다리가 진창에서 푹푹 건져 올려지는 듯 무거웠다. 지면에 발이 닿을 때마다 비틀대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이윽고 계단을 두세 칸씩 크게 밟아 내려갔다. 발목이 살짝 비틀리며 통증이 있었다. 호연은 왈칵, 울음이 솟구치는 뜨거운 눈을 하고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한달음에 건물을 빠져나와 넓은 캠퍼스를 가로지르는데 그때까지도 진오는 계속해서 호연을 따라오고 있었다.

삐끗했던 발목이 지끈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목에서 비린 쇠 맛이 끓었다. 점점 다리가 느려지고 있었다.

호연은 질질 끌리는 다리를 애써 끌어당기는 식으로 내리막을 걸어 내렸다. 벌어졌던 거리가 순식간에 훅훅, 줄어들고 있었다.

이러다가 잡히겠다.

잡히겠다.

호연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진오가 헉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따라오고 있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옆구리를 붙잡은 기괴한 걸음걸이에 머리가 희뿌예졌다. 아찔하고 섬찟한 감각이 온몸을 후려쳤다.

“가야 돼, 가야 돼…….”

중얼거려도 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호연아, 좀!”

원망하듯 부르는 진오의 음성이 아주 가깝게 느껴졌을 때,

눈부신 빛이 눈앞에 깔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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