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59화 (59/98)

제59화

“……나 임신했어.”

심장이 쿵, 발밑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

놀라 되물은 호연이 몸을 세웠다. 급히 여진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티 안 날 거야. 그 정도는 안 돼서.”

희미하게 웃은 여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아직 납작한 배 위에 손을 올리고 입을 열었다.

듣지 말라고 귀를 막아주듯이, 그런 자신을 이해를 좀 하라는 듯이.

“나는 솔직히 지우고 싶은데.”

그러곤 나온 말이 더 충격적이라 호연은 입술을 막았다. 여진은 그마저도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부모님도, 오빠도 너무 강경해서 그러진 못할 것 같아.”

석훈이 고르고 고른 끝에 구한 여진의 혼처였다.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조부부터 판사, 검사, 현준에 이르러서는 국회의원까지 배출해낸 고고한 학 같은 집안이었다.

그러고 보니 못 본 새 여진의 얼굴 살이 많이 내려 있었다.

호연은 여진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밥은 잘 먹어?”

“아니, 입덧이 심해서.”

“뭐 잘 먹는 거라도.”

“복숭아? 제철 과일은 좀 먹거든.”

“보내줄게.”

“아니, 그럴 필요는 없구. 그냥……. 말할 데가 필요했나 봐, 나도. 테스트기 두 줄 보는데 호연이, 네 생각이 많이 나더라. 동생은 동생인가 봐.”

순간 손끝이 저릿했다. 호연은 보이지 않게 핸드백의 핸들을 고쳐 쥐었다.

축하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축하받을 사람의 얼굴도 아니었다.

마음이 이상했다.

“나 가볼게. 오빠 혼자 인사하러 돌아다니면 아버님이 안 좋게 보실 것 같아.”

호연은 멀어지는 여진의 마른 등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비눗방울처럼 속 깊은 곳으로 차올랐다.

그렇게 밉다가도 한없이 갑갑한 마음이 되는 건 정말 이상했다.

“저기.”

“네. 도와드릴까요?”

“한 잔 괜찮을까요?”

서버를 불러 세운 호연은 샴페인이 든 플루트 잔을 받아 들었다. 그를 한 번에 들이켜고 다시 잔을 돌려주었다. 잔을 받아드는 서버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샴페인 한 잔에 용기를 빚졌다. 호연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예의상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맞인사를 나누면서 한규의 앞에 섰다.

“회장님, 안녕하셨어요?”

한규를 둘러싸고 있던 북두 일가의 눈초리가 모두 홱, 호연에게로 몰렸다. 호연은 수십 개의 동공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소곳이 인사를 건네었다.

“……왔어?”

달갑지 않다는 눈빛 끝으로 한규가 쩝, 입소리를 내었다.

“세정이 안사람이야.”

그러고서 소개하는 문장이 짧았다.

한규를 부르는 호칭, 탐탁잖은 분위기, 성의 없는 소개로 호연을 파악한 이들이 애써 화기애애한 기류를 꾸며냈다.

“잘 왔어요. 세정이는?”

“미국 출장 갔어요.”

“아아, 뉴웨이브. 아버님, 드디어 북미에도 북두가 진출하네요. 축하드려요.”

“세정이가 노력 많이 했지, 뭘.”

어지러울 정도로 대화 주제가 시시각각 바뀌었다.

“뭐라도 좀 먹었어요?”

“아, 샴페인 마셨어요.”

그 어색함 속에 호연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의례적인 말들을 모두 받아냈다.

“아직 애 소식은 없어요?”

이런 질문에는,

“뭔 애야, 애는. 너는 참 실없는 소리를 많이 한다, 지은아.”

한규의 쓴소리가 이어졌다.

이럴 거면 왜 불렀는지.

불편한 침묵 속에 타이밍을 노리던 호연은 문득 한 남자를 오래도록 바라보게 되었다.

어디서 봤더라?

단정하게 넘긴 머리칼 아래로 이어지는 말쑥한 인상. 잘 꾸며 두었으나 흔한 상이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호연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내 제게 닿는 시선을 느낀 남자가 의아함을 표하는 대신 조용히 한규를 눈짓했다.

아.

“회장님, 생신 축하드려요. 건강하시고요.”

“그래. 고생했다. 돌아가 봐.”

한규도 기다렸다는 듯이 듣던 중 가장 시원스레 대답했다.

세정이 없으면 죽어도 곁을 내주지 않는 한규의 모습이 호연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뒷걸음질로 물러나다가 이내 돌아서서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와 엉망이었다.

연회장을 나와 화장실로 가는 걸음이 더뎠다. 기다란 복도와 또 다른 기다란 복도.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아.”

벽에 가깝게 붙어가던 호연은 둔탁하게 부딪치는 몸체를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리는데,

“또 보네요.”

그 남자였다.

속초에서 세정의 손에 이끌려 차에 타자, 악수를 청하던 남자.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해요.”

호연은 엉겁결에 인사를 건네었다. 피식, 웃은 남자가 그때처럼 손을 내밀었다. 호연은 그 커다란 손을 바라보면서 그를 쳐내던 세정의 굽은 손가락들을 떠올렸다. 동시에 제 치부를 말해주던 나직한 음성까지도.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꿈에서 깨우듯 흔들리는 손이 보였다. 호연은 고개를 바짝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세정만큼이나 키가 컸다. 모든 선이 굵어 특유의 짙은 분위기가 있는 남자는 의외로 순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나, 기세정 동생.”

그러곤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는데, 호연은 그게 더 의심스러웠다.

“……동생이요?”

세정의 동생이라면 죽은 소라를 제외하고는 죄 사생아들이었다. 결혼식장에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기휘영이에요. 손 아픈데, 악수하면 닳나?”

재촉에 맞잡은 손이 호연의 손을 감출 정도로 컸다. 묘한 압박감 속에 점차 악력이 세지는 게 느껴졌다.

호연은 인상을 찌푸리다 못해 손을 털었다. 한순간 손이 부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기세정은 안 왔어요?”

휘영이 손을 놔주며 물었다.

지워지지 않는 웃음이 서늘했다. 말라가던 손바닥이 다시 척척하게 젖는 것 같았다. 신경 줄이 당겨졌다. 호연은 쭈뼛거리는 모든 끝을 인지하며 도망갈 구석을 살폈다.

“기세정 씨가 형이라면서요.”

“뒤에서는 뭔 말을 못 해요. 기한규, 개새끼. 그런 말도 하는 거지.”

도통 미친놈이 아니네.

호연은 눈을 깜빡거리며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기세정은 안 왔냐고.”

“……왔어요. 왔는데…….”

“거짓말. 혼자 왔잖아요.”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데요?”

“그냥 내 느낌?”

그러곤 어깨를 으쓱하는데, 호연은 할 말을 잃었다. 휘영을 담고 있던 눈이 일순, 멍해졌다.

휘영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호연의 얼굴을 뜯어내듯이 훑어보았다.

처참한 얼굴로 시트를 적시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파리해 보이기는 하나 곧 죽을 것 같진 않았다.

뭐, 예쁘긴 하다만, 그뿐. 나이가 고스란히 읽혀 감히 천박한 상상이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런 여자애를 구해 내겠다고 빗속을 뚫고 나섰다고.

그러는 나는, 이 얼굴 하나 보자고 한규의 이름을 빌려 차를 보냈었지. 정작 한규는 초대한 적도 없는 자리에.

호연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휘영의 눈빛이 흥미로 가득했다.

그를 오롯이 받아내는 호연은 징그러운 불쾌감을 느낄 정도였다.

“뭐 하세요, 지금?”

“기세정, 좋아해요?”

물음에 다른 또 다른 물음이 돌아왔다. 입술쯤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단숨에 훅, 호연의 눈을 물었다.

“좋아하냐고.”

한 걸음 다가온 휘영의 몸이 크게 부푼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압도적일 수 있나. 호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술에 취한 아빠가 기우뚱, 기우뚱, 거인처럼 다가와 술병을 휘두르던 날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덜컥, 숨이 말렸다. 온몸이 얼음을 문지른 듯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호연은 뻣뻣하게 굳어지는 손을 붙잡고 뒷걸음질 쳤다. 그만큼 성큼, 다가온 휘영이 친히 허리를 굽혀주었다.

“왜 이렇게 겁을 먹지?”

눈썹 끝을 갉작인 휘영이 호흡을 들쭉날쭉하게 하는 호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채를 띤 형형한 눈빛에 호연이 작게 몸서리쳤다.

“나 아무 짓도 안 했잖아요?”

“가까이…… 가까이 오지 마세요.”

“누가 보면 내가 무슨 짓 한 줄 알겠어?”

“오지 마시라고요!”

“아, 시끄러…….”

인상을 찌푸린 휘영이 계속 걸어왔다. 귀를 만지작거리는 손이 그게 언제라도 뺨을 후려칠 것 같아 무서웠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호연은 애써 눈을 바로 떴다.

“기세정이 기소라 죽인 건 알고 있어요?”

호흡이 정지했다. 강한 불안으로 하얗게 번지는 머릿속에 꽂히는 말들은 두 다리가 꺾이는 순간에도 선명했다.

“기소라는 사고사가 아니라, 기세정이 죽인 건데.”

귓가로 박히는 소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지직, 눈앞이 띄엄띄엄 토막이 난 것처럼 끊어졌다.

“혹시 모르잖아. 수틀리면 기세정이 그쪽도 죽이려고 들지.”

머리가 너무 아파.

그게 마지막 고통이었다.

* * *

여러 날의 기억이 뒤섞인 참담한 꿈을 꾸었다. 꿈인 걸 알면서도, 무엇 하나 막지도 못하는 꿈.

장롱에 숨겼던 돈을 들키고 두들겨 맞던 엄마의 마른 등줄기. 짐을 싸고 도망가다 넘어져 울음을 터트리던 엄마의 뒷모습. 저 대신 맞아 라면을 가위로 잘라 마시던 민형의 엉망인 얼굴.

결국 비참한 기억의 끝, 얼른 가라며 악을 쓰고 제 등을 떠밀던 민형의 앙상한 체구만이 영혼에 새겨진 듯 오래도록 남았다.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살이 짓무를 듯 눈매를 닦아내도 그 기억보다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찢어진 듯 쓰라렸다. 엉엉, 토해내는 울음이 목을 아프게 울렸다.

말라붙은 눈을 억지로 떴는데도 꿈과 현실을 나눌 수가 없었다.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이 다시 감겼다.

“아이고……. 불쌍한 사모님. 뭐가 이렇게 서러워서 우나.”

부평댁이 혀를 찼다.

“부모가 알면 속이 문드러지지, 문드러져.”

정말 그럴까요.

호연은 묻지 못한 말을 깨물었다.

아픈 자식이 있는 부평댁은 호연의 젖은 머리칼을 연신 넘겨주었다. 식은땀이 흐른 이마를 차가운 물수건으로 정성껏 닦아냈다. 긴 한숨이 닿아 이마가 뜨끈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런 다정한 손길을 못 견뎌, 호연이 몸을 일으켰다. 가시지 않은 두통이 정신을 뒤흔들었다.

“아이고, 정신이 드셨네.”

어둠에 적응을 시작한 눈이 면면을 훑어보았다. 제 방이었다.

“저 어떻게 왔어요?”

“휘영 도련님이 발견하셨대요. 만화원 복도에 쓰러져 계셨다고. 몸도 안 좋은데 왜 가셨어요. 그러다 큰일 나지.”

“몸 안 좋은 줄 몰랐어요.”

“미련도 하셔라.”

부평댁이 눈을 흘겼다. 호연은 느른하게 웃어 보이며 손등을 바라보았다. 링거가 꽂혀 있었다.

“전무님께는 말씀 안 드렸는데, 지금 드릴까요?”

“아, 아니요. 잘하셨어요.”

한규의 진갑잔치에 가지 말라던 세정이었다. 원래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식사를 좀 하셔야 약을 드시는데. 전복이랑 전복 내장이랑 곱게 갈아서 죽을 쒔거든요?”

“……입맛이 없어요.”

“입맛이 없어도 드셔야지. 입맛이 있어야 먹나. 먹다 보면 입맛이 도는 거지. 좀 가져올게요. 있어 봐요.”

부평댁은 말릴 틈도 없이 불을 켜고 나가버렸다.

호연은 홀로 남아 손가락을 얽었다.

사실일까.

“기세정이 기소라 죽인 건 알고 있어요?”

아닐 거라고,

“기소라는 사고사가 아니라, 기세정이 죽인 건데.”

믿고 싶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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