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침묵이 늘어졌다. 서로의 호흡만이 소릿결로 퍼트려지는 기이한 순간들. 세정은 손을 들어 느리게 살펴보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쫙, 펼쳐지지 않고 꽉, 쥐어지지 않는 손가락. 비가 오는 날에는 살을 저며 뼛조각을 분리하는 듯한 고통을 자아내는 모든 마디마디.
이 모든 시작은,
“여름에.”
소라가 죽은 다음 해, 여름이었다.
“베를린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갑자기 한국으로 불려 왔는데.”
세정이 한국으로 불려 들어왔던 여름날이었다. 한규의 명령에 따라 사용인들이 그랜드피아노를 정원에 꺼내놓은 채였다.
“나는 연주회라도 하나 싶었지. 이제 알죠? 연못을 감싼 붉은 장미. 그게 미친 듯이 피어 있는데.”
세정은 아득함에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는 막막함을 느꼈던 그때 그 순간처럼.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의 정원. 거북할 정도로 반사되는 빛과 매미 울음소리.
세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나오다 피아노 앞에 멈춰 섰었다. 잠시 귀가 멀어버린 것만 같이 서 있는데 한규는 뒷짐을 진 채로 명령했다.
피아노를 산산이 박살 내라고.
“아버지는 내가 피아노 치는 걸 안 좋아했어요. 언제든 끌고 올 작정이었는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조금 빨라졌을 뿐이겠지.”
한규는 어쩌면 소라보다 피아노에 더한 재능을 보였던, 더한 사랑을 느꼈던 세정에게 꿈을 부수라고 명령했다. 싫다고 뒷걸음질 치는 세정을 잡아 눌러 손에 망치를 쥐여주었다.
“망치를 던져주고 부수래. 싫다니까 두 손에 쥐여주네.”
―…….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열 손가락이 없는 듯 살아보라는데, 음률이 없는 세상에 산다고 생각하라는데.”
―…….
“난 손가락이 있고 모든 음을 알잖아요. 피아노 한 대 부순다고, 그게 끝장날까.”
세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웃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치부가 이리도 쉽게 흘러나온다. 여자에게 치부를 드러내면 더 강하게 목을 조를 것 같던 열패감이 잠잠하다.
의외로웠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었나.
여전히 호흡의 음파만 끼쳐오는 핸드폰 너머로 세정이 이름을 불렀다.
“백호연 씨.”
―……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
정적이 입술을 짓누른 듯하다. 내내 시선이 오고 가고 끝내 머물던 굽은 손가락의 형태와 자주 손가락을 감추던 제 모습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들.
―손가락…….
가느다랗게 들려온 대답에 세정은 또 한 번 헤프게 웃었다.
맞다.
“나는 내 손을 부쉈지.”
―…….
“꿈은 이래야 부서져요. 다시는 못 꾸게 나를 끝장내야.”
사랑해서 부수지 못했다는 말을 삼킨다. 내겐 너무 찬란한 피아노를 부술 바에야. 그 피아노를 부술 바에야……. 제 손을 망치로 내려치는 것을 택했다고.
“확인도 했지.”
후에 붕대를 친친 감고서 돌아온 세정은 가장 처음 피아노 방을 찾았다. 퉁퉁한 손가락으로 두어 개의 건반을 동시에 누르며 불협을 내는데도 연주를 그치지 않았다.
“나는 이제 피아노 못 쳐요.”
피아노 소리가 고통스럽게 울리던 새벽, 출근하던 사용인들은 세정이 우는 목소리를 내면 그와 같을 것이라고 했다.
“다시는.”
이후로 다시는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다.
이딴 손을 한 피아니스트는 세상에 없다고.
“왜 안 물어봐요.”
세정은 그제야 손을 떨어트렸다. 엇박자로 뛰던 심장이 차츰 원래의 박자를 찾았다.
―어떤 걸 물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머뭇대는 어투에 특유의 조심스러운 성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똑같이 해줄까, 물어야죠.”
“아빠가 손버릇이 안 좋았어요.”
“똑같이 해줄까요?”
“생사도 몰라요.”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여전히 눈이 부신 전등 아래 세정이 다시 눈을 감았다.
―똑같이 해드릴까요?
세정이 옆으로 돌아누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할게요.”
이럴 거면 왜 물으라고 했냐고, 입술을 비죽이는 호연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말이라도 고맙고.”
―…….
“나흘 뒤에 봐요.”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어놓는데, 여린 음성이 이어졌다.
―기세정 씨.
“네.”
―……좋은 꿈 꾸세요.
세정은 왜인지 눈이 뜨거웠다. 입매에 힘이 들어가고 나오는 음성마저도 목이 메었다.
“꿀게요, 좋은 꿈.”
백호연 씨…….
그리고 완성하지 못한 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어떤 단어를 쓰고 싶었는지.
세정은 밤새워 뒤척였다.
* * *
북두 그룹의 총괄 회장, 기한규의 진갑잔치 날이었다. 북두 그룹타운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저택이 비워지고 그 꼭대기, 하나의 저택만이 빛을 내었다.
연회장으로 삼는 실제 만화원은 본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계단, 그 끝에 있었다.
산 것처럼 박제된 꽃과 숨 막히는 더위가 공존하는 공간.
건축가가 명균의 눈빛을 생각하며 치밀하게 설계했다는 만화원은 건축 당시에도 명균이 지켜볼 때만 시공해 저택에서 가장 늦게 완공된 곳이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죽은 후에도 죽지 않는다니, 징그럽지.”
누군가 만화원에서 주고받던 말을 곱씹으며 호연이 허리를 세웠다.
왜인지 만화원에만 오면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새하얀 톤으로 정돈된 만화원은 양쪽으로 계단이 있고 그 위, 일 층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에 한규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한규의 진갑을 축하하는 손님들과 그 시중을 드는 서버들로 북적였다.
원래라면 세정과 호연이 지키고 섰어야 할 자리인데, 세정이 없는 지금은 다가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다가가 생신 축하를 건네야 할 텐데. 유독 풍성한 생화 장식을 바라보던 호연은 살짝 팔뚝을 붙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에요?”
북두 문화재단 이틈 미술관의 관장이자 세정의 고모인 윤진이었다.
“안녕하셨어요, 시고모님.”
“나야, 잘 지냈지. 지난번에 와줘서 고마워요.”
이틈 미술관은 봄이면 북두 그룹의 미술품 수장고를 열어 북두 소장전을 열었는데, 이번 봄에는 호연도 참석한 것을 말하는 거였다.
호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초대가 아니었으면 쉽게 티켓도 구하지 못했을 북두 소장전이었다. 감명 깊었던 작품들이 호연의 눈앞으로 다시 스쳐 갔다.
“너무 좋았어요. 웨스턴 작품 실제로 처음 봤는데…… 정말 매력적이에요.”
“그랬어요? 더 놀랄 만한 작품 많다고 내가 자부할게요. 내년 봄에도 또 와요, 알겠죠?”
무심코 지정된 내년 봄. 그 막연한 시간에 호연은 대답 대신 흐리게 웃었다.
“근데 기 전무는 어디 있어?”
두리번거리던 윤진은 세정이 없다는 걸 확인한 눈치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지금 미국 출장 갔어요.”
“어? 그러면 세정이가 안 보냈을 텐데.”
윤진은 세정의 성미를 알았다. 제가 가지 않는 자리에 호연을 떠밀지 않을 애였다.
“회장님께서 차를 보내 주셔서요.”
저도 안 오고 싶었는데요, 라는 말을 지우고 딱 필요한 말만.
“아, 그래요?”
윤진은 씁, 숨을 당기며 한규가 위치한 곳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럴까?
증권사 지라시에서 심심찮게 세정과 한규의 불화를 조명하니, 장작을 보탤 바에야 호연이라도 불렀나?
“그러면 가 봐요.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네. 인사드려야지.”
싱긋, 웃은 윤진이 호연의 등을 톡톡, 쳐주었다.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는 호연을 쉽게 등지고 다른 사람과 악수하며 안부를 물었다.
호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규 앞에 서는 일은 겁이 많이 났다. 저를 마뜩잖아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어려웠다.
핸드백의 핸들에서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아직 이 층과 계단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고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가야지.
“호연아!”
“어, 네? 어? 언니.”
반갑게 앞을 막아서는 얼굴을 본 호연이 눈을 크게 떴다.
여진이었다.
떨떠름한 호연의 표정과 달리, 여진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웬일이야?”
“웬일이긴. 나도 초대받아서 왔지. 오빠, 호연이에요.”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던 현준이 뒤를 돌았다. 호연을 보곤 입을 살짝 벌리며 아, 아는 체했다.
“요즘 집에 놀러 안 오던데.”
여진이 결혼하고 몇 번, 초대받아 들르긴 했다. 표면적으로는 관계가 회복되었으나 여전히 여진은 석훈의 말마따나 저자세를 취했고, 호연은 그게 조금은 어색하고, 조금은 불편해서 오래 있지도 않았었다.
“이래저래 바빠서요. 아저씨는?”
“아빠? 아……. 오빠, 나 호연이랑 얘기 좀 해도 될까요.”
“응, 그래.”
현준이 다시 허리를 굽신거리며 사라졌다. 어린 나이로 국회의원이 된 현준은 선거를 앞두고 분주한 모양새였다.
여진은 현준이 멀어지기를 까치발을 들어 바라보다가 호연에게 바투 붙었다. 그러곤 속삭이듯 대답했다.
“아빠 초대 못 받았대.”
“……왜?”
현준과 같은 초선 의원에게도 초대장이 내어진 자리였다. 하물며 하나의 기업체를 운영하고 사돈인 석훈을 왜 초대하지 않았지?
전부 제가 모자란 탓인가.
“모르지, 나도. 근데 혹시 너 아빠 연락 안 받아?”
할 말이 없었다. 호연이 입을 다물자, 여진이 어깨를 툭, 쳤다.
“왜 안 받아. 아빠는 다 딸 걱정해서 연락하시는 건데.”
“응.”
호연도 어차피 시시콜콜한 사정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받아. 알겠지?”
채근하는 투에 호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뭐 하고 지내?”
은근히 떠보는 물음이었다. 호연이 집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고 조금은 도태되어 있길 바라는 불측한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호연은 그 마음을 잘 알았다.
“대학원 다니지.”
그래도 부러 제 잘된 일을 자랑하거나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니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엔마트 본사에 입사 예정이던 여진은 소식이 없었다.
“본사 들어간 거야?”
그 말에 여진의 동공이 잠시 방황했다. 낯빛이 어두워지나 싶더니 나오는 음성도 낮고 작았다.
“아……. 그거는 아빠가 조금 기다려 보라고 해서.”
기다려 보라고 해?
“왜 기다려?”
“회사 사정이…… 그런 게 있어.”
대충 얼버무린 여진은 그런 걸 얘기할 때가 아니라는 듯 호연에게 손가락을 까딱했다.
“잠시만 귀 좀 대줘.”
그러고 보니 이런 자리에 늘 높은 힐을 신고 갔던 여진인데, 굽이 거의 없는 플랫 구두를 신고 있었다.
호연은 그게 좀 낯설어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려주었다. 그 귀에 여진이 속삭였다.
“나…….”
호연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