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무려 삼 년을 공들인 사업을 마친 임원진들은 후련한 얼굴이었다. 끝으로 서류를 주고받은 임원진들이 하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뉴웨이브 측 임원진의 비서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던 석 실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돌아와 희준에게 허리를 숙였다.
“사장님, 뉴웨이브에서 만찬 예약했다고 하니까 저희 예약은 취소하겠습니다.”
“그래요? 아, 근데 큰일이네. 내가 술을 못해서…….”
세정은 목덜미로 닿는 시선을 느꼈다.
이번 미국 출장은 북두 리테일 오희준 사장과 동행이었다. 평사원 출신으로 오랜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희준은 좋은 말로 하면 평이한 사람이고 나쁜 말로 하면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성질이 연줄로 외줄 타기를 하는 북두 그룹 내에서 버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언젠가 자신을 밟고 지나갈 아들뻘의 세정도 견제하지 않았다. 제가 올라갈 자리는 여기서 끝임을 인정하는 욕심 없는 자의 태도였다.
“기 전무는 술을 좀 하죠?”
세정이 응시하던 문으로 신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세정은 그쯤 고개를 돌려 희준을 바라보았다.
“네, 잘 마십니다.”
“그래요. 내가 기억하고 있었지. 문제없네요. 역시 든든합니다.”
곧 다가온 신원이 인찬을 잘 배웅하고 왔다고 속삭였다.
“덕분에 일이 빨리 끝났어요. 기 전무 일 처리는 매번 정말 놀랍니다. 대단해요.”
쥐어짜는 칭찬은 아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에 세정이 감사합니다, 가볍게 웃었다. 희준과 일을 같이 할 때면 언젠가 한규가 했던 말이 이해되었다.
“이런 사람도 있어야지.”
세정은 종종 희준에게서 평온을 읽어 내리곤 했다.
그건 두 딸을 무사히 키워내고 정년 퇴임을 기다리는 자의 무료함이기도, 아랫사람의 실수를 끌어안는 너그러움이기도 했다.
모두가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달려들어 싸우는 북두 그룹 내에서 홀로 정물 같은 사람. 도통 북두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부류.
그리하여 별종이라고 불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
“식사하러 가시죠.”
어린 날에는 그런 걸 꿈꾸기도 했는데.
* * *
침대에 앉자 눈앞이 어찔어찔했다. 제가 희준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다 취소한다. 세정의 입매로 푸스스, 웃음이 샜다.
“주는 대로 마신 놈 잘못이지.”
맞다. 다 제 잘못이지.
세정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칼이 뒤로 넘어가고 매끈한 이마가 드러났다.
얼마쯤 마셨나, 하는 의미 없는 셈이 이어졌다.
뉴웨이브의 임원진들이 건배를 권하면 자신은 술을 전혀 못 한다고 기 전무와 잔을 맞추라며 희준이 손짓할 때마다 미쳤나, 싶긴 했는데.
만찬 내내 간간이 씹던 해산물이 익혀질 듯 속이 뜨거웠다. 거푸 내쉬는 한숨이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얼마쯤 목뒤를 주무르던 손이 맥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당장 아침에 있을 현지 법인 방문 일정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얼마나 잘 수 있나, 하고 시간을 셈했다. 도통 눈이 감기지 않았다.
차라리 더 마실까.
애매하게 취할 바에야 완전히 취하는 게 나았다.
세정이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조절했다.
테이블 위로 와인과 와인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를 응시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찰랑, 속에 찬 도수 높은 술이 울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위로 불을 붙인 듯 뜨거움이 몸을 크게 휘돌았다.
이내 느리게 의자에 앉은 세정이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병의 까만 몸 위로 세정의 벌어진 가운 사이가 흐리게 비쳤다.
세정은 그 뒤로 펼쳐진 야경을 보았다.
그리고 한 모금.
잠들지 않는 도시의 휘황찬란한 레몬색 불빛.
다시 한 모금.
가문의 문양 같기도, 백로 같기도, 월계수 잎 같기도 했던 폭발적인 분수 쇼.
또다시 한 모금.
어지럽게 뒤섞인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이렇게 살고 싶었다. 야욕 같은 거, 야망 같은 거 나는 모르겠고 술에 진탕 취하고 담배나 실컷 빨면서…….
술만 마시고 싶고, 담배만 피우고 싶고, 놀고만 싶으면 한량이라던데.
세정이 피식, 웃었다.
병상에 누운 명균은 제 말년 운이 한량이라며 껄껄거리면서도 북두 그룹 내 일에 깊이 관여했다.
기 씨 집안 팔자는 노예 팔자라던 조모, 이명례 여사의 말도 떠오른다. 그리하여 여자를 평생 외롭게 만드니, 기 씨 집안에 시집을 가는 여자의 팔자는 사납다고.
이명례 여사의 무덤 앞에서 사나운 팔자 이번 생에 다 버리고 다음 생에는 내 마누라 하지 말라던 명균의 담담한 말까지 이어진다.
다시 와인 병을 기울여 따른 세정이 와인 잔에 입술을 붙였다.
호연 쪽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백호연의 인생은 충분히 사나웠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나를 만났나. 그 사나운 인생의 끝이 혹시, 나인가.
불쌍한 여자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여자의 눈을 볼 때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길길이 날뛰는 저도 못난 놈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상하게 마음이 욱신거렸다. 불규칙한 박동이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일깨웠다.
와인 잔의 베이스를 문지르는 세정의 손이 느릿했다. 젖은 아랫입술을 빠는 입의 압력이 약했다.
동시에 후드득, 정신이 한 움큼 뜯겨나가 중간에 비는 시간이 생긴다. 너무나도 짧은 블랙아웃과 잠시 정신이 들어도 꼼짝할 수 없는 무의미한 시간이 맞붙었다.
잘 수 있겠다.
침대로 걸음을 옮긴 세정이 몸을 눕혔다. 정상으로 돌아간 박동이 차분하게 뼈 안쪽을 울렸다. 천장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등허리가 침대 아래로 빨려드는 듯 어지러웠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때 진동음이 끊어질 듯 가느다랗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침대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낸 세정이 화면을 긋고 귀에 붙였다.
“네.”
돌아오지 않는 대답. 잠깐 핸드폰을 떼어낸 세정이 화면을 확인했다. 흔들려 두 개로 보이던 글자가 하나로 모였다.
백호연.
석 자에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금 불규칙한 박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슴팍을 짚은 세정이 불편한 몸을 뒤척였다. 하아, 도수 높은 한숨이 끼쳤다.
―저, 백호연입니다.
침착한 말씨.
그러고 보니까, 화를 내는 모습은 출장을 오기 전에 봤던 게 유일한데.
세정은 눈이 부셔 팔뚝으로 눈 위를 덮으며 대답했다.
“알아요, 백호연 씨.”
침묵이 길었다.
“왜?”
어두운 눈으로 늘 고분고분하고 체념적이던 호연의 얼굴이 그려졌다.
예쁜 얼굴. 미치게 꼴리는 그런 얼굴. 그 얼굴을 생각하는데 문득, 속과 그를 둘러싼 근육들이 갑갑했다.
―회장님께서 만찬 초대를 하셔서요.
한규는 은선과 사생아들에게 그랬듯 호연에게도 회장님 이외의 호칭을 허락한 적 없었다.
“이유는요?”
이유 없이 초대할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탐탁지 않은 며느리 대신 세정만 초대하곤 했던 날들이 많으니.
―생신 기념이라고 하셨어요.
아, 아버지 생일이 이쯤이었나. 패륜아 새끼가 따로 없네.
웃음이 헤퍼진 세정이 길게 웃음을 터트렸다. 당혹스러워하는 호연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한규는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을 오라 가라 부르고 살피는 일을 즐겼다. 명균이 병상에 누워서도 자행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환갑잔치를 그리 성대하게 치르더니 진갑잔치까지 사람을 긁어모으나.
세정은 일의 전후를 생각했다.
부친과 제 사이가 좋지 않다고 지라시가 도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불참하면 좋지 않은 말이 나올 테니 호연이라도 참석시키려는 모양인데…….
애초에 그 지라시는 한규의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참석하지 않아야만, 그 계획이 완성되는 거였다.
그런데 호연에게 참석하라고 했다? 왜? 제가 안 보낼 걸 알고?
아니, 아닐 것이다.
다른 누구.
다른 누구?
누가 백호연을 초대했을까.
확실한 건 호연을 보내면 한규의 계획은 박살이 나는 건데.
“안 가도 돼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
“안 가도 된다고.”
―정말 그래도 될까요?
“남편 없는 시댁에 왜 가.”
명료한 대답에 주저하던 음성이 툭, 끊겼다. 세정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핸드폰을 살짝 떼 통화 연결 상태를 확인했다. 끊기지 않았는데.
“가지 마요.”
―…….
“가지 마.”
―…….
“대답.”
―……안 갈게요.
대답하는 음성이 듣기 좋은 음이라는 생각을 한다.
“말 잘 듣네.”
세정이 낮게 웃었다.
―술 드셨어요?
“응, 좀 마셨어요.”
―취하셨어요?
“취한 거 같아요?”
―네, 좀?
다시 웃었다.
“아닌데. 많이 취했는데.”
―호텔이에요?
세정은 고개를 돌려 빈방을 둘러보았다. 제가 손을 댄 것 외에는 빈틈이 없는 풍경이었다.
“네, 호텔이네요.”
―혼자시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걸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해야 할지.
“혼자예요.”
―……저…… 지난번에는 죄송했어요.
“지난번 일.”
술을 먹어 흐려진 기억의 파도가 거셌다. 세정은 눈을 깜빡이며 겨우 그날로 돌아갔다.
속초에서의 밤을 사과하라며 백호연이 쏘아붙였던 일. 자신은 술주정이라고 쉽게 무시했던 일.
“하지 마요, 사과.”
―그래도.
“백호연 씨가 하면 나도 해야 하잖아.”
아, 또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 세정은 갑갑한 목을 쓸어내렸다.
―네, 그러시다면…….
뭐라고.
나긋나긋하게 귓가로 감긴 음성과 달리 세정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감각에 다시 한번 핸드폰을 떼어 바라보았다.
아무튼 존나 골 때려.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래요. 그러면 이제 자요. 나도 좀 피곤해서.”
―저, 기세정 씨.
어딘지 모르게 다급한 음성이었다.
“네.”
―지난번에요.
“또 지난번.”
이번에는 언제일까. 세정이 미간을 모았다.
―백화점에 갔던 날, 제가 말하면 말씀해 준다고 하셨잖아요.
기억을 느리게 더듬는다.
아, 당신을 때린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던 날에.
―어떤 걸 말씀해 주신다는 거예요?
여자의 동그란 눈매가 보이는 듯했다. 눈을 내렸다가 머리칼을 귀 뒤로 꽂고 다시 눈을 올려 저를 보는 그림이 그려진다.
어렸던 날 너의 치부를 말해주면 나도 나의 어렸던 날 치부를 말해줄게.
그랬던 약속.
세정이 크게 숨을 뱉었다.
술기운으로 몸이 짓눌린 듯 무지근하고 더웠다. 심장을 둘러싼 뼈는 어딘가 모르게 뻐근하고 숨이 막혔다. 말을 할 때나 한층 시원한 공기를 머금어 호흡이 편했다.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다 그 탓이었다.
다만 망설여지는 건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