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넓게 열린 창문 밖으로 호연이 고개를 내밀었다. 모처럼 갠 하늘 아래 온온한 바람이 넉넉하게 밀려들었다. 집에서 그다지 멀리 나온 것도 아닌데, 숨통이 트였다.
“오빠, 답답한 건 아는데 문 열어두지 말…….”
창문을 닫던 호연이 창틀에 쌓인 담뱃재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위에서 담배 피우나 봐.”
호연이 챙겨온 죽 뚜껑을 열던 재성의 행복한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입가를 맴돌던 노래도 마른 듯 사라졌다.
“……무슨 소리야. 병원에서 담배를 어떻게 피워.”
아연한 어투에 호연이 눈을 깜빡였다.
다시 창문을 열고 위를 올려다보던 눈이 담뱃재를 향했다.
“그러니까…….”
말끝을 흐렸다. 무심코 뱉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랬다. 위쪽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한들, 아래층 창틀에 쌓일 수가 없는 구조였다.
호연은 담뱃재를 입바람으로 불어보았다. 흩어지는 모양새가 담뱃재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긴가민가했다.
어디선가 옅은 담배 냄새가 나는 착각도 일었다.
“근데 담배 냄새도 나. 데스크에 말씀드려 볼까?”
창문을 닫은 호연이 재성의 옆으로 가 앉았다. 죽을 떠먹던 재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크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 계속 있는 내가 못 맡았다니까. 괜찮아. 맡으면 내가 말씀드릴게. 어어? 진짜 괜찮다니까?”
일어나려는 호연의 손목을 잡아끈 재성이 큰 눈을 부라렸다. 호연은 거칠게 당겨지자 반사적으로 손목을 더듬었다.
“미안.”
“괜찮아.”
벌써 불그스름하게 자국이 남는 손목을 내려다보는 호연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를 곁눈질한 재성이 숟가락을 탁, 내려놓고 환자복의 목 부근을 끌어내렸다.
“호연아, 이거.”
“어? 찾았어?”
조용히 손목을 돌려보던 호연의 낯빛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목걸이였다.
민형은 너무 소중해 감히 들고 다니지 않고 미국에 있는 집에 두었다, 그랬다. 친구를 통해 받겠다더니, 이렇게 왔다.
“진짜 있었구나.”
호연은 펜던트를 손가락에 대보았다.
초승달과 반대되는 모양인 그믐달 펜던트 뒤로 강민형, 석 자가 쓰여 있었다. 호연은 이름 음각을 만져보았다.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어.”
녹 하나 슬지 않아 온전한 상태의 목걸이가 자랑스러운 듯 재성이 목청을 높였다.
호연은 잠시라도 민형을 의심했던 게 죄스러워졌다. 은근히 티가 났을 텐데, 그를 오롯이 느꼈을 민형에게도 미안했다.
“이거 없었으면 호연이 네가 의심했겠다, 그치.”
목걸이가 날 살렸네.
여러 감정으로 뒤섞인 호연의 동공을 확인한 재성이 목을 울리며 웃었다. 미소가 씁쓸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얼굴에 다 써 있네요.”
재성이 손을 뻗어 호연의 코를 살짝 비틀었다. 그리고 놔주는 손끝에서,
담배 냄새.
순간, 말을 멈춘 호연이 재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스러웠던, 미안했던 감정이 썰물처럼 밀려 나갔다.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그냥 오빠가 어렸을 때랑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사람은 변하니까.”
히죽거린 재성이 다시 숟가락을 쥐었다. 그 거침없는 손을 확인한 호연이 몸을 일으켰다.
“음료수 좀 사 올게.”
“어어, 갔다 와.”
몸을 일으킨 호연이 병실을 나갈 때까지 재성은 시선을 유지했다. 그러곤 고개를 쭉, 뻗어 호연의 그림자까지 사라지는 걸 눈에 담고서야,
“저년 의심하네.”
침대 헤드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재성은 입에 들어 있던 숟가락을 쑥, 빼냈다. 입꼬리를 말아 내리고 베개 밑을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최근 문자 기록을 눈으로 훑어 내리며 한 번호를 눌렀다.
[씨발놈]
언젠가는 백 대표님이었나. 일이 길어지고 나서는 씨발놈이라고 이름을 변경했었다.
“이거 봐……. 길면 꼬리가 잡힌다니까.”
더러운 꼴 보기 싫어서 진작 끝내고 싶었는데. 의뢰인들 갑질은 끝도 없어. 역시 끝에는 다 씨발놈들이야.
중얼거리며 목걸이가 보이게 셀카를 찍어 보냈다. 물음표 한 개가 돌아온 답장을 보면서,
“물음표는 무슨 물음표야, 뒤지려고.”
재성도 마찬가지로 문장을 써넣었다.
[목걸이 고마운데 쟤, 나 의심해요.]
재성은 메시지를 쓱, 올려보았다.
[무슨 목걸이가 있다는데요?]
[무슨 목걸이?]
[초승달 펜던트가 있고 체인은 그냥 쇠줄 같아요. 싸구려 같은데 쇠줄은 삭았다고 거짓말할 수 있으니까 됐고. 펜던트 뒤에 강호연이라고 적혀 있네요. 내 거는 강민형이라고 적혀 있겠죠? 인터넷 쳐보니까 옛날 문방구에서 나온 거 같은데. 초승달, 그믐달 세트 같아요. 또 씨발 멍청하게 초승달로 구해 오지 말고. 그믐달 알겠죠.]
직접 검색을 해보았었다. 그 당시 유행이라도 했던 것 같은데, 어려서는 내내 뒷골목에서 처맞고 있었으니 재성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다만, 목걸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호연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낸 게 짬밥이 느껴진달까.
다시 확인하는데도 저 자신이 기특했다.
재성은 스크롤을 쭉, 내렸다. 답장이 와 있었다.
[?]
[왜?]
“왜긴 왜야, 씨발…….”
습관처럼 베개 밑을 더듬어 담뱃갑을 잡아보던 재성이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담배 때문에 들켰네.
코를 비틀었다가 놓았을 때 싸늘하게 가라앉던 호연의 눈매가 불신으로 가득했었다.
아니, 근데 담배는 병 걸려도 잘 못 끊는다던데, 나도 그렇다고 선수 쳐볼까.
“하씨…….”
한데, 제가 잘못했다는 생각보다는 석훈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씨발……. 무슨 폐가 좆같다고 해서.”
가슴팍을 어루만진 재성이 콜록콜록, 기침해 보았다. 왠지 아프기도 한 것도 같았다. 괜히 문밖을 내다보았다. 호연은 올 기미가 없었다.
재성은 다시 메시지를 써넣었다.
[몰라요. 눈빛이 이상해.]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꼬리를 잡힐 수도 있다고 누누이 이야기했으니, 굳이 제 잘못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겠지.
[눈빛이 어떤데.]
재성은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양 볼을 당겨 물었다. 입술을 뻐끔거리며 답장을 골몰했다.
[몰라요. 지금까지 안 들어오는 거 보면 그쪽한테 연락 안 갔어요?]
홀드 키를 누르고 테이블에 핸드폰 모서리를 딸각딸각, 가볍게 찧었다.
돌아오는 답장이 없다. 다시 핸드폰 화면을 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오니…….
진짜네.
“진짜 의심하네, 씨발…….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사실 눈빛으로만 읽어낸 감정이니 제가 잘못 해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의심하네.
재성은 핸드폰을 툭, 내던지고 고개를 두둑, 꺾었다.
* * *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니?
벤치에 앉은 호연이 핸드폰을 반대쪽 귀로 바꾸어 들었다.
“자꾸 이렇게 스트레스를 주시니까 전화를 안 받으려고 하죠. 그리고 이제 세정 씨도 집에 있구요.”
세정이 귀국하기 전에는 호연이 먼저 연락해도 받지 않던 사람이 석훈이었다. 이제 와 제 행동을 지적하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백 일이고 뭐고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어떻게 됐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백 일 뒤에 이혼하겠다는 건 유효해요.”
민형이 한국에 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 석훈에게 계약 연장을 이야기했다. 그만큼의 시간을 벌어놨으니 이제 나는 모르겠다고.
계약 결혼의 연장을 요구하면서 민형과 천사보육원을 볼모로 협박하는 석훈의 요구가 과하고 기이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같은 말 드리려고 연락한 건 아니에요.”
―호연아, 너 버릇없이……!
“제발, 그만 좀 하세요.”
호연은 핸드폰을 붙잡고 사정했다. 늘 불만과 어려움을 토로하는 전화에 이골이 났다.
“오늘 오빠 보러 왔거든요. 이제 오빠 제가 책임질게요.”
석훈은 계속 민형을 인질로 저를 협박해 올 것 같았다. 그래서 호연은 석훈이 계속 대주기로 했던 민형의 병원비를 포기했다. 조금 억울하게 되었지만, 민형은 제가 책임지는 게 맞으니까.
그러나 굳이 지금, 두 달 남짓이나 앞서서 이 말을 꺼냄으로 확인하고 싶은 건 단 하나였다.
―네가 뭘 어떻게 하려고? 별다른 수가 있어? 돈은? 아직 대학원도 졸업 안 했을 텐데, 무슨…….
이와 같은 석훈의 만류.
안 그래도 돈이 없다며 싫은 소리를 하는 석훈에게, 돈 나갈 구석을 줄여준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도록 회유한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병원비 알아야 하니까 수납 영수증 부탁드릴게요.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너 지금 민형이 한국에 들여놨다고 이제 아저씨 필요 없다는 거야?
확실히 이상했다.
쌍꺼풀이 있었던 눈이 이제는 없고, 부친의 폭력성을 극도로 증오했으면서 손을 휙휙, 내키는 대로 잡아끈다. 폐가 아프다면서 담배를 피우고 목걸이는 거짓말처럼 새것 같다.
하나하나 나누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게 합쳐 보니 미심쩍었다.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이만 끊을게요.”
호연은 전화를 끊었다. 뜨거워진 핸드폰을 허벅지 위에 올리고 크게 숨을 토해냈다.
사실 민형을 의심하는 일이 너무나도 역겹게 느껴졌다.
아니라면…… 호연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 등을 떠밀고 두려운 아버지와 대적하던 어린 민형의 얼굴이 꿈에도 잊히지 않았다.
그런 민형이 미국까지 갔다가 겨우 돌아왔는데, 큰 병을 앓고 있는데 요목조목 이유를 들어 의심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틀렸다?
민형을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하는 거지. 면목이 없는데.
그게 곧장 민형에게 묻지 못하고 석훈을 떠본 까닭이었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석훈이 그리 밑바닥은 아니라는 믿음을 가졌다. 교은이 반복해 말하던 문장이 떠올랐다. 석훈같이 오래 약속을 지키는 좋은 사람은 보기 어렵다고. 아주 드물다고.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그 집안에는 호연이 네가 꼭 갔으면 했다고.
살다 보며 감사했던, 그리하여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휘돌았다. 혼란스러웠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석훈은 이상하고, 민형은 의심스러웠다. 민형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모든 게 거짓이라면 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호연은 두 손을 맞잡고 믿어본 적 없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거짓말이라면 차라리 제가 죽을 때까지 들키지 않았으면 한다.
진실이라면 제 의심이 어느 날 갑자기 녹아내렸으면 한다.
그날, 민형이 죽지 않았길 바라는 마음.
그뿐이었다.
그러니 부디 신이시여, 들어주세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