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내뱉는 모든 문장이 귀를 빠르게 통과했다. 터널에 들어온 것처럼 귀가 울렸다. 지금 꼴이 딱 가꾸러진 채 앙앙, 울어대는 애 같았다. 이게 제 밑바닥인가. 떼를 써본 적 없던 삶이 한이 된 것처럼 감정이 넘쳐흘렀다.
“어떻게 저한테 하나도 미안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적어도……. 저를 사람 취급했다면 미안해야 하잖아요.”
“…….”
“굳이 그러실 필요 없었잖아요. 그 여자분을 저한테 보여주실 필요 없었고. 가는 길에 데려가실 수도 있었잖아요. 그리고 일주일 동안 한 번이라도! 아니, 하루라도 일찍……. 먼저 오늘처럼 물어 주셨으면 제가 이랬겠어요?”
정말 서글픈 건 이따위의 일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사과하면 그걸로 됐다, 싶었던 미련한 마음.
“…….”
“제가 기세정 씨 좋아하지만요. 저를 바보같이 만들지 말아요. 지금도 너무…… 바보 같잖아요, 내가. 그래서 내가 말하기 싫다고 했잖아요. 왜!”
결국, 울음이 터졌다.
호연이 주먹으로 세정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고여 있던 눈물이 볼도 스치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호연의 주먹질이 한 번 더 이어졌다.
세정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은 채로 호연을 내려다보았다. 호연은 그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생각했다.
“씁―.”
남자가 못마땅한 듯이 숨을 크게 들이키던 순간.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게 개한테 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애초에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거지.
호연이 눈을 홉뜨며 세정을 노려보다시피 올려다보았다.
“저는 뭐예요? 기세정 씨한테 저는 말 잘 듣는 개예요?”
확실히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찌푸린 남자의 눈에 적힌 감정이 그랬다. 백호연, 너 지금 선 넘은 거야.
남자가 피곤한 듯이 목뒤를 주물렀다.
“무슨 말을.”
“좋아해 달라고 안 하잖아요! 그런데 제 마음에 대한 예의를 지켜달라는 게! 그게 어려워요?”
숨이 뜨거웠다.
세정에게 잡혀 있던 손마저 뿌리친 호연이 그를 떠밀었다. 또 조금도 떠밀리지 않은 세정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미약한 짜증, 찐득한 피로가 달라붙은 얼굴이었다.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기나 싶더니 허리를 숙여 호연의 입술로 고개를 내렸다. 사늘한 공기가 닿았다.
씨근대다 못해 잔떨림이 번져 있던 호연의 어깨가 천천히 굳었다.
세정은 호연의 입가로 남은 단내와 술 냄새를 맡았다. 기울어진 자세 그대로 눈만 들어 물었다.
“술 마셨어요?”
호연의 감정 진폭을 따라 요동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단조로워졌다.
“술주정이면…….”
세정이 근 일주일을 앓아온 감정을 단순하게 치부하자 호연이 발끈했다.
“술주정 아니에요.”
“술주정이라고 말할 기회를 주는 건데, 지금.”
선을 넘은 걸 잊어 주겠다고.
고개를 바로 한 세정이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손을 올려 호연의 젖은 뺨을 엄지로 톡톡, 쓸었다. 그 손길이 특별히 애정 어리거나 다정하지 않았다.
“나는 백호연 씨한테 사과할 게 없는데.”
가슴으로 싸한 냉기가 번졌다.
“백호연 씨 바보 아니잖아요. 백호연 씨 학업에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데. 바보면 안 되지.”
“…….”
“나는 백호연 씨 바보라고 생각 안 해요. 그런데 스스로가 바보 같으면, 나 때문이 아니라 본인 탓이죠.”
네가 나를 사랑해서 바보가 되길 자처한 것이니 내게 책임 전가를 하지 말라.
그런 뜻.
남자는 장난인 듯 씩, 웃었다. 그러곤 볼을 꾹, 누르듯이 닦아내는데 그 손끝에서 경고의 느낌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무른 것을 짓이기듯이 힘이 들어간 손길. 호연이 입매를 비틀어 내렸다.
“좋아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묻는 것 같지 않았다. 말을 곱씹듯 혀 위에서 굴리던 세정이 헛웃음을 지었다.
“백호연 씨가 한 모든 말이 나 좀 좋아해 달라는 걸로 들리던데.”
“…….”
“내가 틀려요?”
“…….”
“유아민 씨를 마주치게 한 건 변명이 될까. 나도 몰랐어요. 고의 아니었다고.”
“……제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믿어야지. 나도 백호연 씨 마음 믿잖아요.”
거짓말. 믿지 않으면서.
언젠가 던져두었던 덫에 족족 걸렸다. 호연이 입을 다물었다.
“개…….”
호연의 말을 되짚던 세정이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여느 날에 개 같다고 생각했기에.
그렇지만 말할 생각은 없지.
“백호연 씨는 내 말을 잘 들은 적이 없다는 것만 알아둬요.”
“…….”
“그리고 여전히 술버릇이 나빠.”
마지막으로 톡, 세정의 호연의 턱을 손가락으로 쳐올렸다.
“적당히 마셔요.”
호연은 멀어지는 세정의 등을 보았다. 주먹을 느리게 풀어냈다. 남자의 가슴팍에 닿았던 손이 뒤늦게 욱신거렸다. 힘을 잃은 눈이 툭, 시선을 떨구었다.
탁, 세정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몰랐다. 고의가 없었다.
그 말이면 끝나는데.
호연은 서서히 주저앉았다.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 모든 게 끝인 줄 알았는데 막상 남자를 좋아하게 되니 먼지 한 톨까지 마음을 어지럽혔다.
산란한 마음 어딘가 쩍쩍, 갈라지는 아픔이 있었다.
이내 무릎을 세운 호연이 고개를 처박았다.
상황을 능숙하게 풀어내는 남자를 닮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남자 앞에 서면 애 같을까. 있는 줄도 몰랐던 어린 모습들이 자꾸 튀어나오잖아.
“아…….”
강하게 믿고 있던 소신이나 신념 따위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남자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다.
* * *
“장마 때문에 비행기 못 뜰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이네요.”
세정의 어깨 너머로 창밖을 내다본 북두 홈푸드 한경현 상무는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얼굴이었다. 세정은 경현을 따라 쥐고 있던 태블릿에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탁한 구름 위로 뜬 비행기 날개가 보였다. 파도와 비슷한 먹구름이 위협적이다가 어느 부분은 뻥, 뚫려 있어 오밀조밀한 지형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이제 막 궤도에 진입한 비행기 내부가 고요해졌다. 날고 있다고 믿기지 않는 안락함까지 밀려들었다. 세정은 그쯤 시선을 돌렸다.
이번 출장은 크게 미국 유통기업인 ‘뉴웨이브’의 M&A를 위한 최종 논의 자리였다. 세정이 삼 년 동안 사정을 봐온 일이었고, 이제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도장을 찍으면 베트남에 북두를 박았듯 북미에도 북두를 써낼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에 생산 시설을 확충하여 3년 내……. 5년 내……. 하는 소극적인 이익 증대를 전망하는 게 아니라, 뉴웨이브가 가진 생산 시설과 물류센터, 유통망을 그대로 가져가, 그야말로 폭발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다.
무려 2조 4천억짜리 M&A. 리테일 아래 수많은 계열사가 딸려 있어 자금 융통이 쉬울 때 끝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규가 재촉했던 일이기도 했다.
문득, 세정은 엔마트를 흡수해서 얻는 이득은 얼마였던지 되짚어 보았다.
2조 4천억에 비교하면 터무니없는 숫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일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절대적인 거였다. 제 손발을 자르려는 한규도 리테일에서 감히 분리할 수 없는 계열사가 세정의 왼팔이 되는 유통이니까.
그러니까 공을 들이지. 왼팔, 오른팔 지켜 보겠다고 용을 쓰잖아, 내가.
세정은 뜨끈해진 이마를 문질렀다.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불현듯 회의가 들 때가 있었다. 귀국하는 대로 유인 그룹의 유정우 대표를 만나야 하는 쉴 틈 없는 일정이 목을 조를 때나,
“제가 기세정 씨 좋아하지만요. 저를 바보같이 만들지 말아요. 지금도 너무…… 바보 같잖아요, 내가. 그래서 내가 말하기 싫다고 했잖아요. 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충분히 예의를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무례를 지적당하여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을 느낄 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 중요한 M&A를 앞두고 백호연 생각을 한다는 게.
세정은 자각 후에 얼굴 한쪽을 실그러트렸다.
퉁퉁, 붓기 시작하여 발긋한 호연의 눈가와 파르르, 떨리던 입술 따위가 계속 눈앞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주고받네.
속초에서의 밤과 서울에서의 밤.
점점 헷갈렸다. 백호연의 얼굴 위로 소희와 소라의 얼굴이 겹쳐 보일 때면 제 가슴에 원망이 끓는지, 애달픔이 번지는지. 오롯이 백호연의 눈을 마주할 때면 열패감이 솟는지, 성욕이 치미는지.
백호연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지.
비집고 올라온 의문을 지워냈다. 이미 결론 낸 문제를 들쑤시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한 번 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력감이 닥쳤다. 세정은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옆으로는 오지랖이 넓은 경현의 수다가 한창이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계속 봐요, 성 이사? 얼레, 주식인가?”
엉덩이를 살짝 들어 주영의 핸드폰을 확인한 경현이 너스레를 떨었다. 화들짝, 놀란 주영이 핸드폰을 감추며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미장하나? 어디에? 요즘 주가 장난 아니라서 난 열어 보지도 않아.”
손사래를 친 경현이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는 양 홱, 몸을 젖히고, 뒤편에 앉은 신원을 가볍게 불렀다.
“서 비서!”
“네?”
“요즘은 만나는 사람 없고?”
“예, 뭐……. 일이 바쁘니까요.”
“일 핑계는. 이혼 왜 했다고 그랬지?”
“성격…….”
“성격 차이는 시시하지. 한 팀장은 아직 결혼반지 끼고 다니던데? 서 비서는 없네. 애가 있었으면 이혼 안 했을 건데, 그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경현은 다시 몸을 돌려 세정을 힐끗 보았다. 세정은 그 시선을 무시하며 눈꺼풀을 내렸다.
호연을 지워내기 위해 수연과 신원을 눈앞에 그렸다.
정말 아이가 있었으면 달랐을까.
세정은 배가 불렀었던 수연을 떠올렸다.
수연은 결혼과 동시에 임신했었다. 딸이라고 하여 유모차와 딸기가 그려진 노란 원피스, 하얀 샌들을 골라주었다. 상품이 보이도록 포장된 원피스와 샌들을 보고 묘한 느낌이 들었던 날을 기억한다.
그러나 수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을 했다. 또 얼마 후에는 이혼했다고 그랬다. 말씀드리는 게 맞는 거 같다던 신원의 얼굴이 상해 있던 기억까지도 났다.
이유를 묻지 않았으나 이제 와 궁금했다.
세정이 처음으로 K 그룹의 K 호텔을 앞지른 성적표를 받아든 날, 그를 모시는 직원들마저도 진탕 취해버린 그날에 저를 붙잡고 울면서 이렇게 아픈 게 끝이 날까요……. 휘청이던 신원이 이제는 제법 반듯하게 서 있는 것 같아서.
“저…… 전무님.”
“조용히 갑시다.”
이혼 사유 말고.
어떻게 끝을 냈는지 궁금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