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유리컵 겉으로 주르륵, 물방울이 떨어졌다. 소예는 빨대를 신경질적으로 휘저었다. 눈썹이 격하게 휘어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직장인들은 원래 이렇게 야근을 많이 하고 바빠?”
순간 호연의 가슴이 뜨끔했다.
남자친구와 첫날밤을 보냈는데 그 이후로 제게 소홀한 것 같단다.
호연은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올리고 물었다.
“너랑 나랑 똑같은 대학원생인데 어떻게 알아……. 뭐, 예전에는 안 그랬어?”
“안 그랬지! 안 그랬으니까 내가 이러는 거 아냐.”
이번에는 첫 만남부터 얘기할 작정인가 보다. 망했다. 소예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쉰 호연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앉은 진오가 말렌카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대신 말을 끊어주었다.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회사 다니는데? 대기업이라 하고 막…… 큐밋 다니는 거 아냐?”
작년에 부도난 광고 대행사 큐밋을 운운하는 진오의 얼굴이 웃음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큐밋……? 웃기지 마! 야, 북두야, 북두. 북두 그룹 차장이라고. 그리고 무슨 겁도 없이 큐밋이야……. 미쳤냐?”
큐밋은 대헌예술대학교의 학생들이 많이 취업했던 회사였다. 교내에서는 거의 금기된 단어였기에 소예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주변도 안 살펴보고 큐밋 얘기를 꺼냈겠냐. 아무튼, 북두 그룹이라……. 바쁠 만한데?”
“그러니까 내가 묻는 거 아냐. 그렇게까지 바쁘냐고.”
“내 대답은 그렇게까지 바쁠 거다, 에 한 표.”
“답 정해져 있었던 거 모르냐?”
“모르는데? 이마에 써놓고 다시 물어봐.”
“이게 콱 씨.”
주먹을 들어 올렸던 소예가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쳤다. 짜증 나……. 중얼거리는 처참한 표정을 진오가 비웃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신입생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싸우고도 더 싸울 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호연은 질린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그냥 헤어져. 안 맞으면. 호연아, 아.”
진오가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내 호연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 그를 받아먹는 호연의 얼굴이 설핏 굳어 있다가 풀렸다. 그 얼굴을 세심히 살핀 진오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어디 아파?”
“아니, 아니…….”
사실 소예의 남자친구가 북두 그룹의 차장이라는 걸 듣자마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제가 북두 리테일 기세정 전무의 아내인 걸 모를 테지만, 키워드만으로 긴장하게 되었다.
“너희 둘이 사귀는 건 어때?”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있던 소예가 툭, 침을 뱉듯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저번부터 무슨 소리야. 그만 좀 해.”
“아니, 괜찮잖아. 백호연, 너는 대학교 들어와서 연애 한 번을 안 하고, 과팅 한 번을 안 나가고, 소개 한 번을 안 받고. 야, 내 주변에 너 소개해 달라는 사람 줄 섰어, 지금. 이 모쏠아.”
호연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다시 아메리카노를 쫍, 마셨다. 진오도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도 소예는 쉬지 않았다.
“모쏠아. 내 얘기를 들어봐.”
제가 실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면 소예는 얼마나 황당해할까.
“소개팅 한번 나가는 건 어때? 우리 오빠 지인 중에 조건 좋은 사람 많아. 그리고 사랑은 있잖아. 예술가의 감성을 충만하게…….”
“현소예, 닥쳐.”
소예의 말을 끊은 진오가 포크를 탁, 내려놓았다.
“우리 중에 백호연만큼 작가 길 걷는 애 누가 있냐? 너 전시회 언제라고?”
갑작스레 쏟아진 질문에 호연이 동공을 도르륵, 굴렸다.
“차 교수님께서 같이 하나 걸어주시는 거지, 내 전시회는 아니고…….”
“아무튼. 북두 그룹이랑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 하는 거 컨셉 한 번에 통과됐다고?”
“그렇긴 한데…….”
“아, 알겠어! 고진오, 웃기네. 백호연이 소개팅 나가면 죽어? 죽냐? 뭘 이렇게 감싸고돌아…….”
결국 항복을 선언한 소예가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남자친구에게서 답장이 없는 모양이었다.
“호연아.”
진오가 다시 한번 케이크를 잘라 내밀었다. 호연은 포크를 물며 그를 쳐다보았다.
목덜미부터 귓불, 볼까지 상기된 채였다.
* * *
기진한 하루였다. 학교도 다녀왔고, 차인영 교수의 전시회가 마련될 아트센터에도 그를 모시고 다녀왔다.
전시회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열심히 작품을 추렸다. 또 북두 그룹의 한수연 팀장을 만나 회의를 하고 간단하게 술을 마시니 열두 시를 넘긴, 이 시간.
겨우 집까지 돌아왔는데 무릎이 자꾸 꺾였다.
“더 못 걷겠다.”
내내 어깨를 무지근하게 누르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현관 앞에서 주저앉듯 미끄러졌다. 벽에 머리를 대자 눈이 감겼다.
이대로 자면 정말 좋겠다.
생각하는데, 센서 등이 꺼졌다. 깜빡깜빡, 눈을 감아도 빛의 잔상이 남아 있어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문득 속초의 밤이 떠올랐다. 아스라하던 밤하늘에 한 땀 한 땀 새겨진 수천 개의 별. 서울에 돌아와서는 별을 올려다본 일도 없구나.
헛된 상념들이 자꾸 비집고 올라왔다.
씻고 방에 가서 자야겠지.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데, 도어 록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일주일만인가. 호연도 부러 세정을 찾지 않았고, 세정도 호연을 찾지 않으므로 다른 생활 패턴 속에 일주일을 살았다.
“오셨어요.”
그러니까 말을 섞는 것도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호연이 먼저 담담히 인사를 건넸다. 문고리를 잡은 채로 물끄러미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았다.
호연은 어쩐지 가슴이 시큰거렸다. 가방을 들어 올리고 세정을 등졌다.
“병원은.”
그리고 걸음을 우뚝, 멈춰 서게 하는 말이 있다.
호연은 돌아선 그대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안 갔어요.”
갔다고 대답했으면 대화는 끝났을 것이다. 남자도 그러한 대답을 기대했을 테다. 그러면 당연한 듯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아니라면, 남자가 내킨다면 배를 맞출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가라니까.”
구두를 벗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남자가 가진 기척이 묵직하게 드리웠다.
호연은 그때쯤 몸을 돌렸다. 남자의 몸이, 얼굴이 가까웠다.
“왜 안 갔어요?”
“바빴어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바빴다는 말이 웃긴가.
“바빠도 가야죠, 병원은. 일주일 내내 바빴을 것도 아니고.”
호연의 볼을 톡, 건드린 세정의 검지가 떨어졌다. 그러곤 아무 의미 없었다는 듯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걸음을 옮겼다.
“일주일 내내 바빴어요.”
그 등을 향해 던진 말에 세정이 돌아보았다,
아……? 잠시 이해가 필요한 듯하다가 아……. 하고 두 눈에 감흥이 사라졌다.
그 눈길 한 번에 호연은 머리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내일 가요. 그러면 되겠네.”
세정은 이쯤에서 가볍게 대화의 종결을 알렸다.
“내일도 바쁜데요.”
눈을 가늘게 뜬 세정이 자세를 비스듬히 바꾸었다. 참아주던 불퉁한 대답을 그제야 받아쳤다.
“어쩌자고.”
의도가 무엇인지 낱낱이 바르는 눈길이 호연의 얼굴을 위아래로 비질했다. 호연은 목에 걸려있는 듯한 말을 톡, 뱉었다.
“저는 기세정 씨가 사과하실 줄 알았어요.”
“내가요.”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렸다.
호연은 피하지 않았다.
“어떤 걸?”
온몸의 모든 끝이 화끈거리며 따가웠다.
분명 그 밤, 남자를 다 이해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과는 받고 싶었다.
이건 사람 대 사람으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레스토랑에서 그 여자와 나를 마주치게 한 것. 거기서 그 여자를 선택하고 나를 돌려세운 것.
다 이해했지만,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저를 두고 갔다는 게 마음을 무너트렸다.
내게 사과해야지. 그리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볼 게 아니라, 사과를 해야지.
“……됐어요.”
그러나 누구에게 쉽게 고개를 숙여본 적 없는 사람이 과연 제 잘못을 알까.
전혀 모르겠다는 세정의 눈빛을 보자, 무의미한 감정 소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지겨웠다.
호연은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었다. 그 손 위로 겹친 손이 다시 문을 끌어 닫았다. 한 걸음 다가섰던 호연이 코앞까지 다가온 문에 화들짝 놀라, 세정을 바라보았다.
“얘기 안 끝났잖아요.”
이제 와서, 뭐.
“끝났어요.”
호연의 단호한 대답에 세정이 눈썹 사이를 좁혔다.
“뭐가 끝나.”
그러곤 신경질적으로 뇌까렸다. 호연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바투 붙은 남자의 커다란 상체나 뾰족하게 닿는 문틀이 저를 가둔 것 같았다.
“얘기하기 싫어요.”
세정은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 허무했다. 잘 기워두었던 마음이 다시 찢어진 것 같았다. 속살이 드러나는 것 같은 아픔에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래도 해요.”
그러나 세정은 사정을 봐주는 남자가 아니었다.
호연은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이해한다고, 나 정말 이해한다고, 모른 척해온 속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데 순간 날카로운 남자의 말이 날아와 푹, 찔렀다.
더는 참을 수가 없겠다.
“……그냥…… 그냥 좀…… 사과하시면 안 돼요? 제가 사과를 원한다고 하면 그냥 사과하시면 안 되냐고요.”
“백호연 씨.”
와다다 뱉어낸 말이 끊어지며 숨이 덜컥, 정지했다. 무기질적인 얼굴. 제가 이렇게 바락바락 소리를 내질렀는데도 남자는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내내 상상해온 거였다.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이 처참하게 우그러져 찢겨나갔다.
그걸 내가 아니까, 말을 하지 않았던 건데 당신은 왜…….
“기세정 씨는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제가 지쳐서 그만하자, 하길 바라세요? 백 일이라는 시간, 마지못해 내어주신 거예요? 기세정 씨가? 기세정 씨가요?”
“……”
“아니잖아요. 기세정 씨도 제게 원하는 게 있으니까 계약 연장에 동의하신 거잖아요. 정말 시간 낭비였다면 가차 없이 끊어내셨을 거잖아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제가 감사해야 하는 거 너무 잘 알아요. 근데! 이런 식으로, 정말 이런 식으로 사람을 바보로 만들 필요 없잖아요…….”
그것도 당신을 사랑할 수도 있겠다고 한 날에…… 당신의 아이를 가지겠다고 한 날에…….
호연은 다시 밭은 숨을 가누었다.
“기세정 씨는 나를 왜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