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인찬은 옆자리에 둔 백 팩에서 서류를 한 아름 꺼내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힘주어 말했다.
“기소라 씨 절대 사고사 아닙니다.”
이윽고 보여주는 것은 기소라의 죽은 직후 사진이었다.
세정은 그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 동생이 이렇게 생겼었지.
눈을 감고 있지만, 뜬 것 같은 사진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단순 사고사로 사건이 종결됐기 때문에 부검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인찬이 가리키는 부근에 있는 건 팔의 주사 자국이었다.
“꾸준히 마약을 주사한 것으로 의심되는 자국인데요.”
“마약.”
길게 발음해본 세정이 자세를 비스듬히 바꾸었다. 전혀 생각해본 바 없는 일이었다.
“확실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고 직후 확인해본 차 안에도 마약이 소량 발견되었고요. 그 이후는 조사를 일절 못 했지만……. 사실 이때가 기한규 부회장님께 중요했던 시기가 아닙니까.”
쓰러져 병중인 명균과 세력 다툼을 시작하던 한규의 형제들. 가장 유력한 후계자이나 사생아를 집안에 들인 이후 크게 주춤했던 한규의 시간.
소라의 마약을 묻을 이유는 충분했다. 마약을 하고 사고사를 당했다는 것보다는 빗길에 미끄러진 사고사가 낫겠지.
“아버지가 마약을 숨기려는 정황은 알겠고. 근데 그런데도 여전히 사고사인데. 다른 이유는 뭡니까?”
“좋아해, 오빠……. 나 정말 좋아해……. 정말이야. 나, 너무……. 아버지가 무서워.”
“기소라 씨, 여성을 좋아합니다.”
“좋아해, 오빠……. 나 정말 가은이 좋아해……. 정말이야. 나, 너무……. 아버지가 무서워.”
귓가로 쏟아지는 소라의 음성에 세정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기소라 씨 사건이 종결되고 천가은이라는 여성분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안다. 달채의 메인 셰프, 천가은. 제게도 찾아왔었으니까.
“아버지가 화를 많이 낸다고 할아버님께 모든 걸 고백하러 간다고 했답니다. 절대 결혼하지 않을 테니 같이 해외로 가자고. 그런 사람이 마약을 하고 죽었을 리는 없다고 그랬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은의 말을 들은 세정이 한규를 의심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소라가 죽기 전 향했던 속초의 별장에는 명균만 있던 게 아니고 간병을 맡은 한규도 있었으니까.
“좋아해, 오빠……. 나 정말 가은이 좋아해……. 정말이야. 나, 너무……. 아버지가 무서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아…….”
소라는 가은을 좋아해 결혼할 수 없다고 한규에게 고백했으나 크게 혼났다고 했다. 세정에게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묻기에 그는 명균에게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그러므로 명균에게 갔을 터였다.
그러니 한규가 소라를 죽였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소라의 돌발행동을 막으려고.
소라가 만든 소용돌이에 자신까지 휩쓸리지 않으려고.
“신실한 기독교인인 故 기명균 회장은 사명을 종교와 관련된 것으로 바꾸려 했을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 죽기 전에 보유 재산을 모두 종교 시설에 기부한다고도 하셨었죠. 그런 집안에……. 기소라 씨가 용인됩니까?”
명균은 북두家의 대가 이어질수록 종교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지는 걸 못 견뎌 했다. 그러던 중에 종교에 의지하고 신실한 태도를 보였던 소라는 손주들 사이에서 명균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손녀의 배신 같은 사랑. 그를 들키면 단숨에 내쳐질 처지의 한규는 어떤 심경이었나.
그러나 한규가 그토록 탐욕스러운 사람인가, 에 대한 의문점이 남았다.
아주 어릴 적에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조강지처에게는 냉담하고 정 없이 굴었어도 세정의 손을 잡고 야구장을 한 번, 소라의 손을 잡고 발레 공연을 한 번, 그렇게 사랑했던 시절도 있었다.
세정은 그를 떠올리면 마음이 희한했다.
“……그렇다고 딸을 죽이겠습니까?”
이미 의심하면서 세정은 물었다.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인찬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한규 부회장은 딸인 기소라 씨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으나 마침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건을 덮었다.”
세정이 상념에 잠겼던 눈을 들었다.
“그러니까 기한규 부회장은 사건 은폐만 했고, 진짜 범인은 따로 있는 겁니다. 기소라가 씨가 사망함으로 이득을 취하는 또 다른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
“기한규 부회장도 지금 환장할 노릇 아니겠습니까.”
후계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까 봐, 딸이 죽은 정황을 묻어야 했으니 이것도 기가 막히는 상황 아니겠냐고.
세정은 고개를 들어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허름한 사무실을 밝히는 십자 전등이 보였다.
“소라가 꿈에 나온 뒤로 마음이 안 좋아. 애가 계속 우는데 깨고 나서도 잊히지 않는 게 영 께름칙해. 그래서 용한 도사를 한번 만나볼까 하는데.”
십자가가 쾅, 내려앉는 것 같았다.
* * *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가 지금 나와 함께 먹고 있다.”
세정은 회장실 앞에 섰다. 맥락도 없이 서툴게 말하던 소라의 말을 지금에서야 떠올렸다.
회장실 안에는 청재가 있었다. 회장실을 나오자마자 세정을 마주친 청재는 다소 놀란 듯했던 표정을 천천히 웃음으로 바꿨다.
“잘 지내셨어요, 형님? 오랜만입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가벼이 곁을 스치던 세정이 다시 청재의 앞으로 다가왔다. 찬찬히 시선을 꽂아 넣은 채,
“호칭 올려.”
특유의 울림이 있는 음성으로 명령했다. 청재의 입꼬리가 정자로 다물렸다. 파르르, 떨리는 청재의 얼굴 근육을 확인한 세정이 눈썹을 까딱였다. 다시 말해 봐.
“……잘, 지내셨습니까, 전무님.”
높은 세정의 어깨가 비서진들의 얼굴을 가려준다는 점이 다행일까. 청재는 수치로 붉어지는 얼굴을 숙인 채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세정은 인사를 무시하곤 다시 스쳐 지나갔다. 휘적휘적, 넓은 보폭으로 문을 열었다.
“출근이 늦어.”
한규는 서류를 들여다보며 탐탁지 않은 듯 말했다.
“아시잖아요. 파주 다녀왔습니다.”
사뭇 까칠한 음성에 한규가 눈을 들었다.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소파에 턱, 앉는 것이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렇겠지. 강제로 맞선 자리에 밀어 넣었으니. 그 속을 모르는 건 아니다.
서류를 놓은 한규가 되물었다.
“파주?”
“R&D센터 다녀왔습니다.”
처음부터 인찬을 만나기 위해 찾은 파주였으나, 한규가 사람을 붙여 감시하니 동선을 한 번 꼬았다.
“왜?”
“센터장이 부르니까요. 네덜란드지사에서 근무 중이던 기휘영을 빼 왔는데 인력 충원이 없으니 얼마나 현지 소통이 어렵겠습니까.”
이유도 충분하고.
“그래서?”
“한번 둘러보고 와야 할 것 같긴 합니다.”
핵심인 이야기를 계속 빼놓고 있었다. 화를 내라는 것 같아 한규는 허,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를?”
“네덜란드죠.”
“누구를?”
“조동영 센터장 보냅니다.”
“휘영이는 어때?”
“일하는 것마다 하나하나 손봐주고 길 닦아줘야 하는 어린애 아니잖아요.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죠.”
“너 보기에 괜찮던?”
“제가 안 괜찮아도 어쩝니까.”
사실 그날 휘영의 능력이라곤 본 바 없었다. 서류를 한가득 안고 나오는 모습 정도는 봤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비서가 세정의 앞으로 보이차를 내려놓고 돌아나갔다. 그를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세정이 일어날 채비를 하고 물었다.
“이제 가도 됩니까?”
“왜 이렇게 삐딱해?”
결국 참지 못한 한규가 발칵 성을 내었다. 세정은 그게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한규가 쩝, 입맛을 다셨다.
“신경 써서 고른 자리다. 그저 나 좋자고 고른 자리 아니야. 지금 네 안사람보다 훨씬 뒷배가 좋으니 도움이 될 거다. 애도 순해. 주제넘지 않고, 단정하고.”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한규는 결혼 이후로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 첫째 며느리, 호연을 떠올렸다.
맹랑한 여자애. 동시에 죽은 소라 생각이 나는 묘한 아이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북두 가의 첫째 며느리를 하기에는 그릇이 안 되어 보였다. 어리고, 유약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면에 세운 아이라니.
그 자리는 세정을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북두 가의 남자는 가정에 충실할 수가 없는 몸이므로 늘 외롭고 속이 바짝바짝 타는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여자여야만 했다.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 있어야 했다.
세정이 열외로 해주었던 많은 가족 모임들은 호연의 흉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몇 번 모습을 비출 때마다 끊임없는 뒷말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못 버티겠지. 그러니 이미 나가떨어진 것 같은 몰골이지.
생전 누굴 위해 본 적 없다만, 제가 세정에게 다른 여자를 붙이는 까닭은 종내 호연을 위하는 것도 있음이라.
합리화를 끝낸 한규가 마뜩잖은 눈빛을 하고서 물었다.
“나는 세정이, 네가 내 뜻을 모른다고 생각지는 않아.”
어릴 때부터 머리가 비상한 놈이었다. 피아노를 치겠다고 고집을 피워 잠시 풀어주었을 때도 다시 불러들일 기회를 노리게 만들던 천재적인 아이였다.
그러므로 제가 본인의 손발을 자르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다. 또 얌전히 당하고 있을 놈도 아닌데, 숨을 죽인 게 이상하긴 했다.
“네가 나를 많이 닮았어.”
그러니까 내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대로 와야지. 막무가내로 굴어서는 안 되지.
속마음을 삼킨 한규가 너그럽게 살살 달랬다.
“이미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단호한 어투에 한규가 이마를 문질렀다.
“다시 연락해두마. 내 쪽으로 연락이 안 왔다는 건 유 대표한테 전달 안 됐다는 뜻이니.”
“다시 만나도 똑같습니다. 아직 아니에요.”
“왜 아직 아니야? 뭐가 아니야?”
버럭, 소리를 지른 한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정은 그제야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여유로운 태도로 보이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한규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이혼도 안 했잖아요.”
“하면 되지! 하면 되는 거 아냐? 세정이, 너도 뭐……. 그 애를 사랑한다, 그딴 헛소리 할 거야, 지금?”
책상을 쾅, 내려친 한규의 이마로 굵은 선들이 그어졌다. 그에 반해 세정은 여전히 침착했다.
“사랑을 운운하는 게 헛소리인 걸 아는 분이셨네요.”
소희에게 은선을 사랑한다고, 그래서 헤어질 수가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당신이면서 이제 와서 사랑을 운운하는 게 헛소리라고 해.
한규는 일순 몸에 닿는 한기에 입을 다물었다.
“제 가족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아버지.”
한규의 외도로 은선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곱씹었다. 집을 비우면 새 애인을 들일까 봐, 입원을 마다하고 집에서 버틴다는 처절한 말까지 되짚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가족 지키시고.”
지킬 만한 게 남아 있나 모르겠지만.
세정이 허락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
한규가 그랬듯 언젠가의 그 예고 없음처럼,
“도사는 만나 보셨어요?”
일그러지는 한규의 표정으로 희열이 고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