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별장의 담벼락 위로 설악산의 능선이 이어졌다. 초여름인데도 눈이 내린 듯 하얗게 보였다.
모든 게 그린 듯했다. 허리를 세운 꽃들이 물기를 머금고 햇빛을 탐하는 순간이나, 바람 한 번에 우수수, 다시금 비를 내리며 흔들리는 금목서들의 모습이 일순 극사실주의의 극치인 작품 같았다.
“넓기도 넓다.”
들고 다닌 국화차가 식고도 한참. 거대한 만큼 아름다운 별장을 둘러보던 호연이 덩굴장미가 꼬아진 퍼걸러에 앉았다.
젖은 목재가 어느새 다 말라 있었다. 호연은 옆자리에 찻잔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별장 안쪽을 바라보았다.
지난밤, 남자는 별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투정 부리듯 중얼거려도 남자는 듣지 못하는 말. 그런 것들이 지난밤에는 너저분하게 나오곤 했다.
세정이 별장으로 돌아갈 차편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호연은 거절했다. 안 된다고 거듭 말하는 기사에게서 별장의 주소만을 받아 핸드폰에 옮겨 썼다.
그러곤 바다로 내려와 모래사장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남자가 손수 골라준 옷이 엉망이 될 때까지.
비가 그친 뒤에는 소원대로 바다에 발도 담가보았다. 큰마음을 먹고 행한 일치고는 정말 시답잖아서 많이 웃기도 했다.
그리고 종종. 아니, 자주 남자가 있을 아리아를 올려다보기도 했다. 나란한 남녀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마음이 조금씩 붕괴하는 통증은 이런 것일까. 가슴에 손을 올리고 먹먹한 숨을 가누었다.
끝내는 모두 이해했다.
언젠가 정말 나를 끝내버릴 남자. 남자가 이 계약 결혼의 연장으로 어떤 것을 얻어갈지는 몰라도 지금은 너무나도 감사해야 하는 호의.
그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 사랑에 애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리 증명하려 해도, 남자는 믿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안다. 제 마음을 의심하고 흔들고 몇 번이고 시험하고 무너트리며 즐거워하겠지.
그러니까 언젠가 버려질 시한부 사랑에 애쓰고 싶지 않았다. 내 사랑은 상처가 나는 대로 두어도 괜찮았다. 기를 쓰고 남자에게 믿어달라, 더는 빌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이해했다.
“그래도.”
그래도……. 당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말을 한 날인데.
씁쓸하게 웃지만, 간밤의 차임벨 소리에는 기대했다. 남자가 돌아온 것일까 봐. 그러다가 남자라면 문을 열고 들어왔겠지, 생각에 바로 실망했다.
그리고 차임벨을 누른 사람은 배달 기사였다.
호텔 중식당과 한식당의 상호가 적힌 포장 용기로 저녁 한 번, 아침 한 번을 받았다.
저녁은 누룽지 위에 전가복을 얹은 요리였고, 아침은 백합죽 위로 방풍나물과 민어구이가 얹어진 요리였다. 이어지는 디저트까지 다 먹지는 못했다. 왜인지 더부룩한 감각에 시달렸다.
호연은 다리를 굴렸다.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이 눈이 멀 것 같은 한낮의 햇빛이 작열했다.
밤새 잠들지 못해서 보고 있던 밤하늘에 수놓인 별들이 참 예뻤는데. 서울로 돌아가면 볼 수 없겠지.
“가기 싫다.”
되뇌는데 돌계단으로 구두 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홀연히 그쪽을 바라보는 호연의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이윽고 햇무리가 걷히듯 차츰 선명해지는 시야 속에 바로 선 남자는,
“안녕하세요, 사모님.”
어디선가 보았던 남자였다.
호연이 따라 묵례하고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남자는 친절을 중무장한 얼굴로 웃었다.
“기억 안 나실 만합니다. 저는 기세정 전무님 비서실 소속 전동현 대리고, 편하게 전 비서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전동현 비서님.”
다시 고개를 숙이자, 맞은편에서도 인사가 돌아왔다.
잠시간의 정적. 음, 말을 끌던 호연이 다시 입술을 열어 물었다.
“기세정 씨는요?”
동현은 의문스러운 감정을 감추고 대답했다.
“아, 전무님은 일정이 있어서 먼저 서울로 돌아가셨습니다.”
“……방금이요?”
전혀 몰랐다는 어리둥절한 되물음에 동현은 최대한 제 상사를 두둔할 말을 꺼내었다.
“아니요. 가시기는 어젯밤에 가셨는데요. 사모님은 쉬셔야 하니 낮에 모시라고 전하셔서요.”
상냥한 동현의 변명에도 호연의 낯은 자못 그늘이 졌다.
아무리 이해를 했다고 해도, 괜찮다고 해도 수심이 깊어진다.
호연은 마른 땅을 짓이겼다.
어디까지 밀려나나.
새로운 아내감보다도 뒤.
급한 일보다도 뒤.
다음에는 또 어떤 것보다 뒷전이 될까.
어디까지 가라앉나.
이 마음은.
동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구두코를 내려다보았다. 신원의 분부로 속초까지 와서 사연 하나 모르건만, 저 서글픈 얼굴에 가슴이 쿡, 찔린 것 같았다.
“……갈까요.”
허벅지 위로 가만히 생각을 그러모으듯 손가락을 바르작거리던 호연이 고개를 들었다.
“네, 네. 사모님. 모시겠습니다.”
“아, 찻잔만 씻어두고 올게요.”
깜빡 잊었다는 듯이 찻잔을 들어 올리는 얼굴은, 이제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 * *
기소라 사망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이라고 고백한 중년 남성은 본인의 나이보다 더 연로해 보이며 그만큼 더 피로한 얼굴이었다.
“박인찬 씨는 새벽에 한국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 수면이 부족한 상태라고.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는 시선에 인찬이 긴장하자, 신원은 세정에게로 첨언했다. 차에서 이미 보고받은 내용이었다. 그 문장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는 세정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쓱, 서류들로 떨어지는 세정의 시선에 인찬은 그제야 평소의 구부정한 자세로 돌아갔다. 가늘게 쉬고 있던 숨을 편히 내뱉었다.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네?”
건성으로 던져진 물음을 인찬이 되묻자, 신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번 묻지 말라는 건가. 아랫입술을 혀로 닦아낸 인찬이 대답했다.
“금방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부회장님이 주기적으로 감시하는 사람을 보내시거든요.”
기한규를 뜻하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북두 전자의 부회장을 맡아보았으나 총괄 회장이던 명균이 병중이라 총수와 다를 바 없던 시기였다.
시간이 얼마 없단 소리. 지금 시간을 낸 것도 기적이라는 소리.
자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신원과 달리 세정은 덤덤한 표정으로, 담담한 손길로 서류를 넘겨보았다.
소라의 사인이 사고로 결론지어지기 전후로 의문들을 휘갈겨 쓴, 그 당시 수첩 일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제가 전하는 말이 영 거짓은 아니라는 증거물이었다.
<이상하다. 이게 어떻게 사고사가 되나? 왜 조사하지 못하게 하는 거야. 그런 기본적인 걸. 입을 닥치라는데, 입을 닥치라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최소 자살.>
<취소. 자살이라고 한들, 핸드폰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가 별장이라면 그곳에서 죽어야지, 왜 차를 몰다가 갑자기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죽어?>
짜증이 섞인 필체.
이어지는 메모는 소라를 자살로 결론짓고 내사를 종결한 상부에 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또한 그 가운데 기한규 부회장이 있다는 말까지.
세정은 그 마지막 문장을 오랫동안 눈으로 담다가 인찬을 바라보았다.
기소라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들이 하나둘 옷을 벗었던 건 사고가 일어나고 일 년 사이였다. 모두가 해외로 이민. 각별했던 동료들과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이토록 시간이 걸렸다. 제가 한규와 대적할 만한 권력을 쥔 것을 증명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들을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인찬의 치를 떨게 만든 상부와는 애초에 만나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소라가 죽은 뒤, 한규를 회장으로 만드는 데 공인한 이들이며 또한 한규와 협력하여 이미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들에게 있어 세정은 반정을 일으키는 세력이었고 잘 묻은 사건을 헤집으려는 난봉꾼이었다.
그러므로 북두 전자로의 이동이 공고히 되는 지금에서야 미국으로 쫓겨나 있던 인찬을 마주한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미국 어디 계셨어요?”
쓱, 눈치를 살핀 인찬이 신원의 고갯짓에 입술을 열었다.
“아칸소주 벤턴빌에 있었습니다.”
“멀리도 보내셨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
했다마다. 사랑하던 연인마저 두고 가야 했던 시절이 문득, 설움이 되어 치받았다. 인찬은 두 주먹을 말아 쥐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모든 사건이 해결되면 한국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 인찬이 뚝뚝, 눈물을 흘렸다. 서글픔이 짙어진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근육이 완전히 무너진 것 같았다.
“저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경찰이 돼서 그 사건을 맡은 건 인생의 실수라고. 그런데도 운명이 이끄는 걸 어쩌냐고. 그렇다면 제 인생의 숙제는 이 사건을 풀어내는 거냐고. 대체 기소라가 누구길래, 제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거냐고 원망을 참 많이 했었다.
아칸소라는 시골로 아무것도 없이 쫓겨날 때는 내 다시 그 사건은 돌아보지 않으마, 부득부득 외면하고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몇 번을…… 수백 번을 혼자서. 수천 밤에 꿈에서조차 사건을 다시 맞춰보았다.
그리고 내내 지워지지 않던 기억 하나.
인찬은 누가 되었든 담당하는 사건의 당사자가 죽었다면 장례식장을 찾아 명복을 빌어주었다.
착하게 살다 피해자로 떠났든, 못되게 살다 가해자로 떠났든, 하물며 자살로, 사고사로 허무하게 떠났든.
그런 이유로 찾았던 기소라의 장례식장이었다. 그날이 발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았다. 한규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던 앳된 남자.
기세정이었다.
그 장면이 계속 괴롭혔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러려고 그랬구나, 싶다. 엉켜버릴 삶을 직감한 본능이 인생을 구원해줄 단 하나는 저 앳된 남자라고 사정없이 외쳤던 것 같다.
그곳에서 기소라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세정 하나뿐이었으니까.
너무나도 강렬한 장면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어려운 조사를 미국의 시골에서, 그것도 한규의 감시 속에서 하는 게 오랜 시간 회의가 들고 막막했으나 남자가 입지를 다져가는 뉴스를 보며 버텼다.
뒤이어 기휘영이 후계자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뉴스까지 났을 땐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자리가 위협받고 있다? 한규와 대척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이 나타날 타이밍이다. 그리 생각했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때 울던 남자가 지금까지 소신을 지켰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인찬에게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