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51화 (51/98)

제51화

“기다릴래요?”

이윽고 떨어지는 시선에 호연은 제 처지를 실감했다.

그렇지, 이런 거였지.

이 남자는 사랑이 아니었지.

내게 필요한 게 있는 남자였지.

그런데도 달리 선택권이 없다. 알잖아. 제가 쥔 간절함이 더 크다는 걸.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남자를 놓을 수 없는 처지고 남자는 또 다른 수를 충분히 찾아낼 수 있지 않나. 그게 현격한 차이가 된다.

호연은 맞선에 나왔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갑의 입장이 되어본 바 없고, 앞으로도 같을 것이라는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오래 걸리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건데.”

말이 멈추고 시선이 잠깐 더 머무른다. 호연은 애써 입꼬리를 들었다. 돌아가라는 완곡한 표현임을 안다.

“……먼저 가볼게요.”

“아니, 기다려요.”

“아니요. 사실 몸이 안 좋아서요.”

예의상 붙잡는 말. 그 말에 고집으로 남는다면, 마땅히 기다릴 곳도 없는 이곳에서 두 사람이 나눌 이야기를 엿듣기나 하겠지.

꼭 불청객처럼.

예의가 있다가도 없다.

“…….”

“들어가 보세요.”

빤한 시선. 이내 거두어지는, 제겐 너무 잔인한 것들.

“그래요, 그럼.”

세정은 더 권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섬돌을 오르는 세정의 앞으로 문이 조금 더 열리고, 닫혔다. 호연은 그 냉담한 모습에 바닷물을 한껏 들이킨 듯 목이 뜨끔거렸다.

* * *

서버가 한 차례 다녀갔다. 식사는 됐고, 작설차 두 잔. 아민은 세정의 뒤로 보였던 얼굴이 아른거렸다.

뚜렷하게 기억나는 이목구비는 없는데, 그를 한데 모아둔 분위기가 자꾸 떠올랐다. 제게 닿았다가 힘없이 떨어지는 눈빛, 가녀린 몸선. 울고 있나, 싶은 먹먹한 기류. 그런 느낌만이 은근하게 곁을 감돌았다.

잘 어울리는 부부다.

은연중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감히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보이는 부부. 그만큼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아민은 제 앞에 앉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몹시 아름다운 얼굴 위로 너무 권태로워 짜증이 난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 있었다. 남자는 그를 감추지도, 감추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남자가 옆에 선 여자를 물리고 제 앞에 앉아 있지만, 이겼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눈빛이 다르니까.

제게도, 그 여자에게도 결례가 되는 만남인 건 분명할진대 남자의 짜증 서린 눈빛은 오롯이 저를 탓하는 것만 같았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억울했다.

북두 그룹 후계자의 네 번째 아내를 구하는 맞선이라고 했다. 이 년짜리가 아니라 평생 보장되는 자리라고. 그 말에 혹한 부친의 성화로 나오게 되었다.

아직 이혼하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아내를 데리고 올 정도로 긴밀한 부부 사이인 줄은 몰랐다. 그것도 맞선 자리에 데리고 올 줄은 더욱.

“유인 홀딩스가 중국에 소재를 두고 있던가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민이 두 눈을 깜빡였다. 대답은 순조롭게 나왔다.

“본사는 그런데, 저희는 유인 홀딩스 코리아입니다. 유인 그룹의 한국 계열사들을 관리하죠.”

“국적은 한국인가.”

아민은 눈살을 찌푸려 눈을 가늘게 떴다가 금세 표정을 지웠다.

“……중국입니다.”

말이 조금 어눌했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나고 자란 곳은 중국이지만, 한국어를 배운 지도 십여 년이었다.

아민은 보이지 않게 볼 안쪽 연한 살을 씹으며 동공을 굴렸다.

“귀화할 예정은, 있고?”

“네, 결혼하면 해야겠죠.”

“결혼하면.”

세정이 피식, 웃었다.

이제 하다못해 국제결혼을 시키시네.

원래 맞선이 아니라, 유정우 대표와의 오찬을 잡아볼 예정이었다.

세정은 작설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은은한 내음이 입안을 감돌았다.

유인 홀딩스라…….

유인 그룹에서 가장 약세인 계열사는 리테일이었다.

그러나 오 년 전, 광주와 부산에 각각 대규모 복합 쇼핑몰을 유치하겠다고 욕심을 부려 사업권을 따내더니 지금까지 실적 부진 탓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로부터 바싹 다가온 착공 예정일. 유인 그룹이 덩치를 불리는 것을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재계.

그런 유인 그룹에 힘을 실어줄 북두. 중국 진출 실패를 뼈저리게 수치스러워하며 재도전의 기회를 꿈꾸는 부친.

모든 것이 바로 읽히는 맞선이었다.

아민은 호연보다 출신이 당당하며 업고 있는 뒷배까지도 기세가 좋았다.

그러니 한규가 점찍어 내미는 여자만 아니었다면 세정 또한 가만히 받아들였을 조건의 여자였다.

세정은 저를 관찰하듯 하나하나 뜯어보는 아민과 눈을 맞추었다.

“내 정보는 다 알겠네요? 나는 하나도 모르는데.”

“궁금하신 거 있으세요?”

세정은 눈썹 끝을 쓸어 만졌다. 이미 우위를 점한 관계에서 권태로움은 더욱 짙어졌다. 자세를 비스듬히 바꾸었다.

“나이.”

“스물여덟이에요.”

“직업은?”

“유인 기획 기획팀 과장입니다.”

“유아민 씨와 결혼하게 되면 난 네 번째 결혼인데, 괜찮겠어요?”

“……네.”

“내 평판이 안 좋은 걸로 아는데.”

습관처럼 왼손 약지의 결혼반지를 돌리는 세정의 손으로 아민의 시선이 닿았다.

“평판은 신경 쓰지 않아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잖아요.”

그리 반듯하게 대답하는 여자의 얼굴 위로 문득,

“아무리 북두 그룹이라도 이혼이 두 번이야. 내 평판이 그렇게나 엿 같다던데. 들었어요, 내 평판?”

“…….”

“뭐라던가요. 궁금하네.”

“…….”

“편하게 말해봐요.”

“변태에…… 폭력범에…… 미친놈.”

호연의 경직된 얼굴이 떠오른다.

세정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호연이 말했던 평판 중에 맞는 말도 있구나, 한다.

변태. 변태라고 했지.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호연은 정말 화장이 어울리지 않았다. 받쳐 입은 원피스까지도 전부. 하나같이 어른 흉내를 낸 것과 같은 어설픈 모습이었다.

지금도 어린 얼굴이지만 그때, 그 젖살이 내리지 않은 앳된 얼굴로 승산이 있을 것 같은 패를 고스란히 드러내던 서툰 협상의 순간들이 지나갔다.

예나 지금이나 아차, 싶은 순간에 골 때리는 건 마찬가지.

이런 지루한 상황과는 확실히,

“저, 기세정 씨…….”

다르지.

조심스러운 어투에 세정은 상념을 걷어냈다.

“네.”

제 대답의 잘못을 살피게 만들던 웃음이 천천히 지워졌다. 아민이 허탈한 듯 속 입술을 물었다.

나를 두고 다른 생각을 했구나.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남자의 뒤에 서 있던 여자. 사실 그녀를 낮잡아 봤다. 이미 받아보았던 전처들의 프로필이 그랬다. 개중에 가장 형편없던 여자. 자존심이 상했다.

“저는…… 이 결혼 하고 싶어요.”

오랜 약혼자의 바람으로 한 번의 파혼이 있었다. 바람을 참아주라던 아민의 부친, 정우는 기어코 결혼을 깬 그녀를 어디든 팔아 치우고 싶어 했다. 이후로 몇 번의 형편없는 맞선이 이어졌고 이 역시 아민의 미온적 태도에 번번이 어그러졌다.

그리고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지점이 지금이었다.

이번 맞선까지 망치고 돌아오면 너는 이제 끝이라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오십 줄을 넘긴 늙은이한테도 보내겠단 뜻이지.

그래서 간절했다.

이제야 간절했다.

“네. 알고 있어요.”

아민이 용기 내 꺼낸 말을 세정은 쉽게 받아쳤다. 아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세정은 작설차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아민의 눈빛을 읽어 내렸다.

애초에 그 마음을 알기에 죽을 맞추고 앉아 있는 거였다. 유인 그룹을 지배하는 유인 홀딩스와 척져서 좋은 건 없으니까.

호연을 먼저 보낸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백호연은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겠지만, 유아민은 기다리라고 하면 등을 질 테니까.

이만하면 유인 홀딩스의 체면은 지켜주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세정의 행동이 간결했다. 그러곤 테이블을 톡톡, 가볍게 두드린다. 빗줄기처럼, 피아노처럼.

아민의 눈에는 깊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민한 머리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이 관계를 재고 또 재는 유능한 사업가.

그 남자가 도출할 결괏값이 과연 제 손을 잡는 것일까?

이내 이어지는 대답은,

“유인 홀딩스 유정우 대표님을 좀 뵙고 싶은데.”

아니었다.

* * *

“담배 피울 만한 곳 있습니까?”

“네, 흡연실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리아는 흡연실마저 바다를 품고 있었다. 세정은 그 네 면을 둘러보며 담배를 꺼내었다.

호연이 기다리는 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목을 짓누르는 무지근한 감각.

적당한 예의와 인사치레. 실속 없는 대화 사이 뼈가 실린 찰나의 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기업 간의 사정에 혼맥으로 아교를 바르는 방식.

이런 짓을 또 할 줄은 몰랐는데, 다시 하니 못 할 짓이다.

세정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가스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신원도 금연에 실패했다고 했다. 그 말에 이 작은 담배 하나 놓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코웃음 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제가 다시 담배를 쥐고 있는 꼴이 우습다.

비가 그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한 모금, 잠잠해진 바다를 바라보고 한 모금. 그렇게 두 번에 나누어 담배를 피우는 세정의 눈가가 짙어졌다.

천장도 없이, 바닥도 없이 뚫린 채로 사는 기분이 어떤가.

가만히 묻는다.

정박한 곳 없이, 정착한 곳 없이 스스로 우뚝 선 삶이 어떠냐고.

선택한 삶이나 선택한 적 없는 삶.

누구는 재미로 피아노 한번 두드렸다, 사생아인 휘영에게 회사를 빼앗기기 싫어 돌아왔다고 떠들었고.

누구는 본인보다 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던 소라를 질투하다 살해한 미치광이라고 떠들었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재미로 피아노를 타건한 적 없고,

휘영에게 회사를 빼앗길까 돌아온 것도 아니며,

소라를 질투해 죽인 범인도 제가 아니다.

반쯤 죽은 손은 희망이 없고, 이미 죽은 소라는 말이 없으니 입을 다물고 살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밝히고 싶었지.

바다 위로 흩뿌려진 물비늘이 사치스러운 조명 아래 피아노를 타건하던 소라의 드레스처럼 반짝인다.

세정은 깊은숨을 들이쉬듯 담배를 훅, 빨아들였다.

폐부로 부옇게 차오르는 매캐한 연기. 내뱉으면 해무처럼 퍼지는 것.

잠시간 굽었던 심지가 바로 선다.

세정이 담배를 문 채로 핸드폰을 들었다.

발광하는 핸드폰 위로 ‘서신원’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네.”

―전무님, 저 신원입니다. 혹시 지금 어디십니까?

“속초.”

짧게 발음한 세정이 담배를 지져 껐다.

―기소라 씨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과 연락이 됐는데요.

정말 언젠가는 밝히고 싶었지.

“아버지가 무서워…….”

소라를 죽인 범인이 한규일 수도 있단 사실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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