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50화 (50/98)

제50화

“백호연 씨.”

깨우지 않으려는 듯 그러나 말을 하고 가야 내키는 양, 괴괴한 정적 속에 남자의 반듯한 음성이 깔렸다.

“나 저녁 먹으러 가야 해요.”

어쩐지 그 음성이 귀에 감기는 게 좋았다. 호연은 깨지 않은 척 눈을 감은 채로 귀를 기울였다.

“예약된 거라, 같이 갈 거면 가도 되는데.”

이번 문장이 크게 들린 듯한 건 착각일까.

“자는 척하지 말고 대답.”

착각이 아니구나. 깬 걸 진작 알고 있었구나…….

괜히 더 자는 척을 해보려던 게 머쓱했다.

“대답.”

불쑥 가까워진 소리에 호연이 성마르게 눈을 떴다.

눈앞이 캄캄했다.

호연은 콧잔등이 스칠 정도로 밀접한 세정의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호연의 위로 상체를 굽히고 있던 세정이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몸 힘들면 여기로 보내줄게요.”

세정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아무래도 좋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물론 저를 불편해하는 백호연이니 함께 저녁을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저도 갈래요.”

세정의 얼굴 위로 미약한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저 옷이…….”

이불을 쥐고 몸을 세운 호연이 주변을 둘러보자 세정이 협탁을 눈짓했다. 조명 아래 놓인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별장에 건조기가 없어서 입고 온 옷은 안 말랐어요.”

“누구 옷이에요?”

옷가지 옆에는 단정한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가 세트로 놓여 있었다. 이건 한눈에 봐서 알겠고.

“그냥 있는 옷.”

그냥 있는 옷은 또 뭐야.

호연은 옷가지를 잡아 올렸다. 가지런히 접혀있던 옷가지가 펼쳐졌다.

네크라인부터 사선으로 떨어지다 마무리는 곡선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흰 원피스는, 브랜드의 금장 로고가 버클에 작게 달려 포인트가 되었다.

심플한 디자인과 포인트가 되는 하나.

남자와 공식적인 자리에 초대받을 때마다 내어졌던 옷들의 특징이었다.

이처럼 남자의 취향을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호연은 괜히 한 번 물어보았다.

“기세정 씨 취향이에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네, 내 취향이에요.”

씩, 웃는 얼굴에 호연은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단속했다. 그러곤 제 앞에 앉은 세정을 보고서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근데……. 왜 앉으세요?”

세정이 호연을 죽, 비질하듯 보았다.

“이미 다 봤잖아요.”

“그래도 이건 다르죠.”

세정이 고개를 갸웃하곤 대답했다.

“보고 판단할게요. 다른지.”

호연은 그게 기도 안 찼다.

“……기세정 씨, 변태예요?”

“변태인 거 같아요?”

“너무요.”

진심이 가득한 말에 세정은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전날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로 마주 앉아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는데.

깨고 싶지 않은 꿈 같았다.

호연은 세정의 눈꼬리와 입꼬리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눈이 찡그리듯 조금 더 감기는구나. 속눈썹이 꽤 긴 편이네.

“알겠는데, 목걸이는 혼자 괜찮겠어요?”

괜히 지레 찔려 눈을 내렸던 호연이 세정의 말에 아니요, 아니요, 부정했다.

“뒤돌아요. 목걸이만 해주고 나갈 테니까. 간단하게 씻고 나오고.”

남자가 기절하듯 잠든 제 몸을 닦아주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관계의 끝을 확인하지 못하고 잠드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간단히’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세정의 어투에 호연이 볼을 붉혔다.

“네.”

호연은 협탁으로 손을 뻗어 목걸이를 챙겼다. 그를 세정의 손으로 넘겨주고서 얼른 몸을 돌려 앉았다.

“아읏…….”

이불에 아래가 쓸려 아릿한 고통이 일었다.

호연은 순간적으로 나온 신음에 뒤늦게 입술을 막았다.

“아파요?”

그 행동이 무의미하게도 세정이 곧장 물어왔다. 호연은 입술에서 손을 떼어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그래요.”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서울 가면 병원 가요.”

살살하겠다는 말은 없구나.

“네.”

보이지 않지만, 웃어 보였다.

잠깐의 다정에 너무 많은 걸 욕심내는 것 같아서.

세정은 이불이 채 다 덮이지 못한 호연의 긴장한 등줄기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새 새로 난 울혈과 꽤 된 것들. 세정은 목걸이를 채우는 대신 그를 쓱, 문질러보았다.

“뭐, 하세요?”

흠칫 놀란 호연이 허리에 힘을 주자 뼈대가 섰다. 움푹 파인 길을 손끝으로 만져보던 세정이 물었다.

“내가 이러면 아파요?”

“뭔데요?”

뒤를 돌아보았던 호연이 다시 벽을 바라보았다.

“물고 빤 거.”

아, 물고 빤 거…….

당혹스러움에 볼을 부풀렸던 호연이 천천히 대답했다.

“아프진 않아요…….”

고개까지도 살래살래 저었다.

기실 쓰라린 아래보다 훨씬 덜한 통증이었다.

그제야 세정은 호연의 목에 목걸이를 채워주었다. 그러곤 그 단순한 체인을 따라 손가락으로 곡선을 그었다. 차가운 금속 아래로 온기가 느껴지는 살결이 움찔거렸다. 무심코 물었다.

“목걸이 있지 않았나?”

“어떤 목걸이요?”

“보육원에서 하고 있던 거.”

그날을 떠올렸다. 다락방에서 몸을 겹쳤던 날, 목걸이를 건들며 무엇이냐고 묻던 남자의 심상한 어투를 생각했다.

“아…….”

호연이 말끝을 흐렸다.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는 손에 자못 불안증이 묻어났다.

“친오빠랑 했다던 거.”

왜 갑자기 묻지. 그때는 얼떨결에 민형의 이야기를 꺼냈는데, 혹시 무언가를 알고 묻는 건 아닐까.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세정은 호연의 어깨를 살짝 감싸 쥐었다가 놓았다. 위로나 격려를 하는 것처럼.

호연은 세정이 문을 닫고 나간 뒤에 제 어깨에 손을 얹어보았다.

온몸에 몇 번이나 손이 스쳤는데,

이 손길이 가장 오래 남았다.

* * *

목이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호연은 여름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긴 터틀넥을 받쳐 입었다. 목에 있는 수많은 자국을 가리기 위해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목을 쓸어내리는 손에 답답함이 묻어났다.

언제 생긴 변태 같은 취향인지 세정은 멀찌감치 선 호연이 내내 제가 남긴 흔적과 저를 의식하는 행동이 싫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아리아, 정원을 대접합니다. 실례지만, 예약자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다가오는 세정과 호연을 확인한 직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기한규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을 겁니다.”

“네. …… 기한규 님 성함으로 두 분 예약되어 있으시네요. 뒤에 계신 분은 일행이신가요?”

예약자 명단을 확인한 직원이 예의를 갖춰 호연을 손짓했다.

“네.”

“아, 그러면 같은 코스로 한 분 추가해 드리면 될까요?”

추가?

세정의 얼굴로 진한 의아함이 드리웠다.

“누가 와 있습니까?”

전혀 들은 바 없다는 듯한 세정의 되물음에 오히려 직원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네, 일행분께서 기한규 님 성함으로 먼저 와 계십니다.”

휘영일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서울로 돌아간다고 했으니까.

짧게 생각한 세정이 물었다.

“룸, 어딥니까?”

“안내 먼저 도와드릴까요?”

안내 요청을 받은 서버가 다가와 앞장섰다. 호연은 세정의 옆으로 다가가 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단번에 물음을 일축한 세정이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었다. 호연은 괜한 무안함에 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기다란 복도를 너른 창을 보면서 걸었다. 자연히 걸음이 느려졌다.

바다가 가까운 레스토랑은 복도에도 창을 내어 개방감을 가졌다. 창밖으로는 거친 파도가 보였다. 그치지 않고 내리꽂히는 빗줄기가 빼곡하게 세상을 긋고 있어 속이 시원했다.

정원을 대접한다고 그랬나.

호연은 룸으로 향하는 넓은 홀, 그 가운데 있던 작은 정원을 떠올렸다.

갑자기 정원을 들여다보며 남자와 배를 맞추었던 순간이 감상을 침범했다.

미쳤나 봐.

목덜미가 진해지는 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터틀넥을 입고 있으니, 표가 나진 않겠지.

그래도 다시 한번 터틀넥을 끌어 올린 호연이 목을 꼼꼼히 내려다보았다.

“열어 드리겠습니다.”

호연보다 앞서 있던 세정이 고개를 까딱였다.

똑똑, 앞선 손님에게 일행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노크 끝에 문이 열렸다.

“…….”

“…….”

그리고 그 안쪽을 보는 세정의 얼굴로 미약한 균열이 일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과 깨끗이 비워낸 흔적이 있는 찻잔. 무료했던 눈빛에 순간 가득 차오르는 흥미. 그런 눈을 한 여자.

오고 가는 말이 없었다. 다만 학습 받은 듯한 말간 웃음이 여자에게는 듬뿍 번져 있었다.

세정의 빤한 시선이 여자에게로 한참 고정되었다. 여자의 몸이 조금 뻣뻣해진 것도 그쯤이었다.

여자는 숨을 참았다. 압박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긴 다리부터 얼굴을 크게 토막 내 살펴볼 때는 흐뭇했다가 끌려가듯 새카만 동공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 갇힌 듯한 폐쇄감이 들었다.

차츰 입꼬리가 내려가는 여자에게 세정은 입술을 갈라 물었다.

“소개가 우선일 텐데.”

나른한 어투에 여자의 몸이 조금 더 경직되었다. 뒤따르던 호연은 얼굴로 부채질하던 손을 멈추었다.

“왜 안 들어가세요?”

빼꼼, 고개를 내어 안쪽을 들여다본 호연의 동공이 잠시 갈피를 잃었다.

웨이브 진 머리칼을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눈꽃같이 옅은 화장을 한 얼굴이 눈에 띄게 예뻤다. 여자는 누가 봐도 정숙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저린 듯 살짝 찡그려졌던 얼굴이 금세 평온해졌다.

“실례했습니다. 갑작스러워서요. 저는 유아민입니다. 이 맞선, 아버지인 유인 홀딩스 유정우 대표님 소개로 나왔습니다.”

맞선.

두 글자에 호연의 시선이 아민에게서 세정으로 옮겨갔다.

순간, 왼쪽 귀 위로 찌릿한 통증이 퍼졌다. 이내 현기증이 일었다. 작게나마 비틀거린 호연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왼쪽 귀가 먹먹하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맞선이라니.

차츰 머릿속이 암전되는 것처럼 통증이 번졌다. 호연은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뜨면서 세정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무감한 표정과 덤덤한 눈빛이었다. 저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한 줌 내려 봐주지도 않는 무심함이 가슴에 박혔다.

일부러 깨웠나. 같이 가자고 할 걸 아니까. 일부러 그렇게 속삭이듯 말했나. 이런 꼴을 보게 하려고.

호연은 세정에게서 와 있던 메시지들을 생각했다.

[어디예요?]

몇 시간 뒤 이어진 메시지에는 또,

[난 속초인데, 저녁 약속 있나?]

계획된 일이었구나.

그래, 이상했잖아. 저를 깨트릴 눈빛으로, 산산이 무너트릴 말투로, 저를 부술 듯이 강하게 압박해놓고. 끝에는 사랑인 것처럼 극적으로 몸을 섞고. 기절하듯 잠든 제 몸을 다정하게 닦아주고. 당연한 듯 목걸이를 채워주고. ……그러곤 이런 꼴.

진한 배신감이 호연의 눈 끝에 묻어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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