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피임……. 이요.”
맥없이 가라앉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남자는 떠보는 눈이 아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어투에 습관적인 거짓말이 사그라들었다.
호연은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피임약이 사라졌던 날을 되짚었다.
백화점에 가서 여러 번 옷이 갈아입혀졌던 그날이었다.
어디선가 떨어트렸겠지. 일정이 많았던 날이니 그랬을 거야. 설령 남자의 앞에서 떨어트렸다고 한들, 피임약인 줄 알까. 소분해서 담아 두었으니 영양제로 알지 않을까. 피임약인 걸 알게 되었으면 진작 묻지 않았을까.
그리고서 지금, 가장 최악의 상황을 맞닥트리게 되는 것이다.
“나랑 상의했어야죠, 피임은.”
“…….”
“이러니까 내가 백호연 씨를 못 믿잖아.”
“…….”
“아이가 가지기 싫어요?”
호연은 대답 대신 숨을 삼켰다.
어떤 날에는 피임약을 들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변명을 고민했다.
혼전 계약서를 쓸 때 요구했던 것처럼 아직 학업을 끝마치지 못했으니 지금 아이를 가지고 싶진 않다고. 시간이 지난 후에 가지고 싶다고.
그런데 그 말을 한 이후에는 이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나?
그 생각이 정리한 변명을 지웠다.
철저하게 을인 관계에서 감히 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나. 살살해 달라는 뜻 하나도 반영되질 못했는데…….
한편으로는 서러웠다.
결국, 또 거짓 고백을 한 여자가 됐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사랑한다면서 뒤에서는 피임하는 이상한 여자.
늘 이런 식……. 늘…….
돌연 웃음이 났다.
늘 두 손에 쥔 것은 모래와 같고 두 눈에 담은 건 눈을 뜨면 악몽이며 가득 안겼던 희망은 곧 절망이다.
사랑이라고 다르겠나.
사랑이라고 다르지 않아.
웃겼다. 매번 하는 선택이 망하는 것도. 그걸 알면서도 더 나은 선택지는 없을까, 숱한 고민의 밤을 지새우는 제 모습이.
“……웃어요?”
그냥 웃긴 줄로만 알았는데.
“우네.”
어이없다는 듯한 남자의 어투를 피부로 느꼈다. 호연은 손등으로 뺨을 닦아냈다. 그러곤 젖은 손등을 가운에 슥슥, 문지르는데,
“씁―.”
남자가 못마땅한 듯 길게 숨을 들이켰다. 호연은 손등을 닦아내던 그대로 멈추었다. 남자가 일어나 티슈를 끌어왔다.
그러곤 가만가만, 눈가를 닦아주는 손길이 있었다. 뺨과 턱으로 번진 눈물까지도 세심하게.
이런 게…… 자꾸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하잖아.
그는 천성이 다정이고,
나는 천성이 결핍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발악했다.
나 진짜라고.
이제 거짓이 아닌 마음이라고.
좀 믿어달라고.
“또 울면 어떡해요.”
다시 젖어 든 티슈에 세정이 난감해했다.
사랑을 고백하면서 우는 여자가 몇이나 될까.
사랑을 고백하면서 이토록 처참한 마음을 가지는 여자가 몇이나 될까.
호연은 다 제가 초래한 잘못임을 알면서도 못내 슬퍼서 계속 눈물이 났다.
호연은 다시 티슈로 향하는 세정의 손을 붙들었다. 손끝에서 티슈가 떨어졌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세정의 손을 가만히 끌어내렸다.
봉긋한 가슴이 시작되는 지점. 살아 있음을 알게 해주는 심박보다 훨씬 거센 것. 파도의 소리를 닮은 것.
“저요…….”
세정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잠시간 동공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여물지 못한 시선과 흔들림 없는 시선이 맞붙었다.
“오늘은 거짓말 안 했어요.”
이 마음만은 거짓이 없다고.
“아이.”
증명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호연은 세정의 손을 이끌었다. 온기가 남은 손을 제 입술에 비스듬히 붙였다. 굽은 남자의 손가락이 뺨을 스쳤다. 그대로 입술을 갈랐다.
“가져요.”
은근한 전율이 입술과 손바닥을 울렸다.
당신은 언젠가 나를 끝낼 마음이지만, 나는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영혼이 한 겹씩 벗겨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대로도 괜찮다고. 꽤 잘살고 있다고. 거짓으로 중무장했던 영혼이 하나씩, 또 하나씩.
그래서 비참하고 후련했다.
숨이 이토록 뜨거울 수 있나. 이토록 날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가 있는 건가.
벗겨진 영혼을 내어주는 게 아니고서야.
호연은 세정의 손바닥 끝을 입술로 베어 물었다. 약한 살과 약한 살이 맞닿은 자리는 간지러움이 일었다. 세정은 미간을 좁혔다.
작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얼굴도, 체격도 전부 다 작으면서 왜 눈물이 비집고 나오던 눈만은 클까.
아니, 눈만 큰 게 아니라.
손아귀로 넘치듯이 담기던 가슴이 떠올랐다.
키스라도 하듯 앙앙거리며 살을 물어대는 여자의 꼴을 보고 있노라니,
개 같다.
동시에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다.
오은선과 백호연은 무슨 계획을 꾸미는 걸까. 지난 추측은 호연의 가방에서 약을 찾아내어 그 정체가 피임약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에 박살 났다. 피임약을 복용한다는 건 은선과 같은 행보가 아니니까.
풀리지 않은 의문 속에 이런 짓들은 마치 정말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속지 않겠지만.
“노력하네, 백호연 씨.”
흠칫, 당황한 시선이 건네졌다. 세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이제 여자의 마음이 중요하지 않지.
한규가 휘영에게 밀리언 리조트를 넘겼을 때부터, 당장이라도 굴복하라는 듯이 북두 리테일 계열사 분리를 운운할 때부터, 백호연이 마지막 기회를 저버렸을 때부터.
엔마트도, 백호연도 이제는 놔줄 수가 없는 일.
세정이 테이블을 가볍게 밀어젖혔다. 까드득― 테이블이 바닥을 긁으며 밀려나는 소리에 호연이 우물거리던 입술을 벌린 채로 멈추었다.
“더 해봐요.”
세정은 밀려난 테이블만큼 생긴 간격을 단숨에 훅, 좁혀 다가왔다. 그러곤 여전히 호연의 입술에 손을 비빈 채로 그 앞에 앉았다.
“해봐.”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는 무기질적인 눈빛이 오히려 야욕적으로 보였다. 나쁘지 않은가. 호연은 두 손으로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남자가 뿌린 옅은 향수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얼마쯤 그랬을까. 츱, 빨아올리는 입술 틈으로 문득 혀가 내어졌다. 놀란 입술이 다물렸다. 세정의 입꼬리가 주저앉나 싶더니 다시 올라와 호선을 그렸다. 그러곤 살짝 손을 내려 호연의 입술을 지분거렸다.
“아…….”
“더 벌려봐요.”
그 안쪽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있었다. 다시 한번 호연의 입술이 닫히는데, 세정은 손가락을 빼지 않았다.
“흣…….”
생경한 감각이 들었다. 단단한 이를 지그시 문지른 손가락이 혀에 스칠 때마다 몸이 움츠러들었다. 저릿한 전류가 혈관을 타고 흘렀다.
혀가 비벼지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
급히 말아 쥔 손아귀로 땀이 배어 나왔다. 몸 깊은 곳에서 솟구친 더위가 몸을 지배했다.
곧 남자의 손가락이 꾸욱, 혀를 눌렀다. 말캉하게 젖은 혀가 눌릴수록 자연히 입술이 벌어졌다. 호연은 입술을 다물지도 못하고 눈을 내렸다.
섹스할 때나 짓던 표정을 하고.
세정의 나른한 표정이 야하게 보였다.
“왜…….”
순간, 세정이 혀를 눌러 말이 먹혀들었다. 입술 하나가 아니라 몸이 통제되는 기분을 느끼며 호연의 머릿속이 아득해졌을 때였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들락거리는 손가락을 보던 세정은 아래쪽으로 맺히는 열감을 느꼈다.
뭐 버거운 거라고.
세정은 호연의 입술을 벌려가며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매번 힘든 티를 내곤 했었지. 결국은 다 받아내면서.
뜨겁고 붉은 속살이 아래가 자아내는 감각과 거의 흡사했다.
공기가 더워졌다. 뜨거운 입안을 돌아 나온 숨이 훗훗한 건지, 몸이 달아오른 건지.
확인해보면 될 일.
갑자기 더운 것이 확, 밀려 나가는 느낌에 호연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 속에 세정이 티슈로 손가락을 닦아내고 있었다.
아, 이제 끝?
어쩐지 조금 아쉬운 기분이었다.
정말 미쳐버리긴 한 것 같았다. 남자의 표정을 섹스할 때나 짓던 표정이라고 규정하고 겨우 혀를 누르는 손가락에 아득함을 느끼고.
호연이 흥건한 입안을 얼얼한 혀로 곰곰이 쓸어볼 때였다.
“잘까요.”
“……네?”
“자자고.”
이어진 말에는 선택권이 사라졌다. 홱, 고개 돌려 벽면을 훑어본 호연이 시계가 없음을 확인했다. 창 너머로 드리워진 먹구름은 시간을 알기에 부적절했다.
“시간이 뭐가 중요하다고.”
발목을 쥐어보는 세정의 손길에 놀란 호연이 팔걸이를 붙들었다.
위험한 눈빛이었다. 제가 미쳐버린 것도 아니었다. 남자도 같은 걸 느끼고 흥분했다. 그까짓 행위에…….
“우리 아침에도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파르스름한 새벽부터 햇무리가 희붐하게 번지는 아침까지. 커튼도 쳐주지 않겠다고 짓궂게 말하던 그날.
기억을 더듬는 호연의 눈이 몽롱했다.
세정은 한 손에 쥔 호연의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물었다.
“이 발목으로 어떻게 걸어 다녀요?”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호연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세정은 호연의 얇은 발목을 손에 감고 찬찬히 끌어올렸다. 연하고 매끄러운 살결. 퍽 단단한 발목뼈.
어디까지 한 손에 감길까.
종아리 중간을 미처 도달하지 못하고 끊어진다. 그 손이 가운을 들치고 습윤한 안쪽을 쓸어 올렸다.
“아!”
의자 팔걸이를 틀어쥔 호연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동공을 굴렸다. 세정도 잠시 손을 멈추었다.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는 얼굴 위로 깨달음이 번졌다.
씩, 입꼬리를 올린 세정이 호연을 올려다보았다.
“안 입었네요?”
속삭이듯 낮게 전한 문장에 호연은 턱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사리물었다. 곧 목덜미와 귓불이 발개진 채로 파르르, 떨었다. 침을 꼴깍, 삼켰는지 목덜미가 크게 진동했다.
“비에 젖어……서 입을 수 있는 옷이 없었어요.”
“응, 그렇구나.”
간신히 꺼낸 대답인데, 세정은 비웃었다.
“여기도 젖었는데, 어쩔 생각인가 해서.”
이어진 말에 호연이 도망치듯 무릎을 붙였다. 채 빠져나가지 못한 남자의 손이 갇혔다.
호연의 얼굴로 자괴감이 드리웠다.
뭘 했다고? 뭐 했는데? 입을 맞췄나? 가슴을 쥐었나. 하다못해 끌어안기라도 했나. 그냥 입안에 손가락을 넣고 휘저은……. 그런 말도 안 되는 행위에 아래가 젖었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없다면 두 손에 얼굴이라도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아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면.
그때 허벅지를 끌어내리는 힘이 있었다. 호연이 손아귀가 아플 정도로 팔걸이를 움켜쥐자, 손등에 가느다란 핏줄이 섰다.
호연은 엉덩이가 의자 끝에 겨우 걸쳐진 채로 길게 숨을 뱉었다. 남자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이대로 가운을 젖히면,
“아읏…….”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