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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47화 (47/98)

제47화

호연은 느리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따뜻한 물을 두들겨 맞고 있는데도 한기가 돌았다.

수전을 내리고 맨살 위로 가운을 걸쳐 입는 동안에도 한기가 그치지 않아 한참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

그리고 그렇게 노력한 시간이 무력하게도 욕실 문을 열자, 세정이 맞은편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세정은 하얀 훈김으로 감싸진 호연을 감흥 없는 눈으로 얼마쯤 바라보았다.

“난 할 얘기 있는데.”

냉정한 어투에 호연은 다시 한기가 돌았다.

“백호연 씨는?”

“하세요.”

호연은 세정의 시선을 피하면서 체념의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선 별로.”

호연은 벌어진 가운 사이로 맺히는 세정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세정이 몸을 돌려 먼저 걸어갔다.

긴 복도가 이어졌다. 벽면으로 조도가 낮은 간접등이 은은하게 따뜻한 빛을 냈다.

이곳은 남자의 별장인 것 같았다.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눈으로 훑다가 남자의 등을 또렷이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젖었던 남자는 가운이 아니라 또 다른 셔츠 차림이었다.

호연은 시선을 올려 남자의 어깨선을 쓸어보았다. 곧고 너른 어깨였다. 단 한 번도 구부러지거나 무너지지 않았을 단단한 어깨.

저 품에 안겼었다. 아프고, 세게.

남자의 어깨가 찬찬히 돌아갔다. 의자에 앉은 남자가 그 앞을 눈짓했다.

따뜻한 커피 두 잔에서 피어오른 하얀 김이 흔들렸다.

원두 향과 섞인 은은한 담배 냄새가 났다. 커피 잔 옆으로 놓인 재떨이에 구겨지듯 쓰러진 담배가 있었다.

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앉아요.”

고저 없는 어투에 호연이 그 맞은편으로 앉았다.

내내 눈을 맞춘 세정은 화가 난 것 같지도, 감정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당연하겠지.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무너진 조각 하나가 목구멍을 막아 숨이 좁고도 가파른 길을 느리게 훑고 올라왔다.

“……하.”

침을 삼키면 뜨거운 숨이 죄 말리는 식이었다. 목구멍이 졸아붙고 눈까지도 뻑뻑했다.

세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호연은 도리어 짜증스럽기도 했다.

나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고. 이런 긴장감 어린 기류에 갇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는 행위마저도 피곤하다고.

호연은 자신을 가둬두는 그 눈 속을 빠져나와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과연 죽으려던 아내를 구해낸 남편의 것이 맞나.

사실 자살 기도가 아니더라도 그때 텅 비었던 제 얼굴을 봤더라면 아무리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도, 설령 생판 남이라도 이리 냉혹하지는 않겠다.

차라리 끌어안지도, 부르지도 말지. 애초에 죽을 생각이라곤 없었는데. 책임을 면피하듯 도망칠 생각은 정말 없었다고.

이런 취급이 억울했다.

“왜 왔어요, 속초.”

호연은 처절하지도, 암흑하지도 않은 세정의 고요한 눈빛을 보자 번울증(煩鬱症)이 일었다. 가까스로 대답을 내놓았다.

“……후아드 작품전 보러 왔어요.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 콘셉트가 될 만한 걸 보러 다니고 있거든요.”

“그래서 후아드, 봤어요?”

“네.”

“봤으면 서울로 가지 왜 바다로 갔어요. 비도 오는데.”

지금처럼.

세정이 고개 돌려 여전히 비가 퍼붓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런 비가 쏟아지는 위험한 바다에 호연은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태풍 같은 해풍에 휘청이던 머리카락과 날아갈 듯 바싹 말랐던 몸 선이 떠오른다.

더불어 바다에 빠져 죽으려 했다던 소희까지도.

“그냥…….”

호연이 말끝을 흐렸다. 세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을 따름이었다. 이에 호연도 정원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정원은 난만한 조경수들로 스산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정말 넘치게 화려한 풍경이다. 그 속에서 호연은 어디에도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주눅 들었다.

세정이 툭툭, 침을 뱉듯 뇌까렸다.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 때문에 후아드 봤고, 바다는 비가 이렇게 오는데 그냥 갔고.”

“…….”

“이걸 믿으라고.”

“……믿어주세요.”

“뭘 매번 믿으래. 믿을 짓이나 해요?”

세정은 짜증이 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부러 이래요?”

“아니에요.”

대답도 형편이 없고, 지금 제 꼴도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이 호연의 머리를 지배했다. 단 한 번도 당당해 본 일이 없지만, 이런 날것 같은 기분은 또 처음이었다.

홀로 시작한 마음조차도 버거운데, 날 선 말들에 속수무책으로 몰리는 상황은 힘들었다.

“대체 백호연 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해를 포기한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체기까지 어리는 듯했다.

“왜 매번 상상을 초월하는지.”

세정은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할 수만 있다면 호연의 작은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었다.

후, 짤막한 숨을 내쉰 세정이 물었다.

“죽으려고 그랬어요?”

놀라 눈을 든 호연이 천천히 도리질 쳤다.

“그냥…….”

“백호연 씨는 그냥이라는 단어 없이 얘기할 순 없나?”

짜증스러운 세정의 물음에 호연이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두 손을 맞잡았다.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바다를 보고 싶어서 갔어요.”

한규가 붙인 경호원에게 붙잡혀 돌아왔던 소희의 궁색한 변명도 그랬다.

“나는 바다도 못 봐? 그냥 바다 보고 싶어서 간 거야!”

결국은 자살 시도였지만.

세정은 쓰게 웃었다.

바다를 보고 싶었다는 백호연의 말 또한 믿지 않았다.

한규가 소희의 그 말을 믿어주어 그녀는 결국 죽지 않았나. 소희의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던 순간, 상대방의 집착 또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순간, 한규가 무시로 일관함으로 그녀는 결국 삶을 비관해 죽지 않았느냐고.

“그렇게 가까이서?”

“발도 담가보고 싶었고요.”

“왜.”

그냥…….

호연은 다시 입술을 닫았다.

무력감이 충동과 열망으로 폭발했던 순간을 말할 수가 없었다.

세정은 입을 꾹 다문 호연을 보았다.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과감했다가, 어떤 날은 지금처럼 한없이 소극적인 여자의 본 얼굴은 뭘까.

“내가 왜 자꾸 묻는 거 같아요?”

눈썹 끝을 문지른 세정이 허리를 세웠다.

“나는 백호연 씨 말이 죽고 싶었다는 말로밖에 안 들려서 그래.”

세정이 답답하다는 듯 깊게 숨을 토해냈다.

“백호연 씨도 잘 생각을 해봐요. 그 말이 설득력이 있나. 매번 그래.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했다가. 지금도 바다에 발을 담가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왜 또 죽을 것 같은 얼굴이지?”

선이 얇고 흰 얼굴을 보는데 속이 뜨겁게 엉켰다. 한번 터져 나온 말이 화살처럼 호연에게 박혀 들었다.

“내가 씨발, 이런 생각도 해요. 내가 뭘 잘못했나?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한다며. 알겠다고 했잖아. 협조하라며. 섹스보다 확실한 협조가 있나? 하란 대로 다 해줘도……. 씨발, 왜.”

“…….”

“사랑 지랄 같게 해, 백호연 씨는.”

사람인지, 사랑인지 구별되지 않는 어투였다.

세정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백호연의 머릿속을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더 빠를 것 같은 좆같은 기분이었다.

거기다 이런 욕을 들어도 괜찮다는 양 미련하게 고개를 숙인 여자를 보자 속에서 열이 치밀었다가 동시에 차게 식었다.

세정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들리지 않던 빗소리가 들렸다. 그 어둠 속으로 수십 개의 동공이 별처럼 켜졌다. 호연의 눈이었다. 이내 흐려지던 것처럼 탁탁, 감겼다. 이제 남은 건 공허한 눈.

그 눈만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

그 눈을 본다.

숨이 밀폐된다.

모든 게 지나치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알아. 여자에게만 늘 쉽게 넘어버리는 감정의 한계선. 생애 몇 번이나 이토록 지저분하게 토해내고 추슬렀나. 압착된 숨을 내쉬며 헤아림의 시간을 갖는다.

언제였던가.

커다란 소나무와 부러진 가지 옆으로 무릎이 꺾인 소희가 땅에 처박혀 있던 봄날을 스친다. 피아노 대신 제 손을 부쉈던 여름날을 지난다. 미치도록 비가 쏟아졌던 겨울날, 소라의 발인식에 멈춘다.

한규의 멱살을 잡고 질질 늘어지다 끌려 나가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산산조각 냈던 날에 머문다.

“좋아해, 오빠……. 나 정말 좋아해……. 정말이야. 나, 너무……. 무서워.”

아, 그 젖은 얼굴.

이제는 눈을 감아도 흐릿한 얼굴. 소희를 닮았던 선한 웃음. 소희를 떠나보내고 또 한 번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었던, 지켜낼 의지도 없었던 그날부터 삶은 갈수록 무저갱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뿌옇게 쌓이는 먼지 같은 서글픔이 그 순간을 돌아볼 때마다 부유한다.

세정은 목을 쓸어내리며 끊어지는 숨을 내쉬었다. 목을 졸라매는 어떤 것도 없는데 숨이 납작했다.

“괜찮으세요?”

언뜻 들려온 음성에 세정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안색이 안 좋아요.”

울 것 같은 호연의 얼굴로 지워져 가던 소희와 소라의 얼굴이 겹쳤다.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죽지 말라고 하면, 죽지 않았나.

나를 두고 죽지 말라고 하면, 죽지 않았을 거냐고.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놓고 가지 말라고 붙잡았으면, 나를 위안으로 삼고 기꺼이 살았을 거냐고.

대답은 이미 안다.

죽었겠지.

나를 온통 바보로 만들고.

사랑하면 살아야지. 사랑하는데 왜 죽어.

사랑은 얄팍하고 보잘것없다.

나는 죽어도 사랑 안 해.

그러니까 백호연 씨, 나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내게서 달아날 마지막 기회야. 죽지 않을 마지막 기회야.

세정은 고개를 비틀어 호연을 보았다.

도드라진 쇄골 아래로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나비의 날갯짓을 떠올리게 하는 여린 움직임이었다.

“백호연 씨는.”

그 명료한 눈빛에, 음산한 부름에 호연이 몸을 굳혔다.

“아직 나를 좋아하나?”

서늘한 물음이었다.

대답을 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진실로 고백하고 싶은 속이 뜨겁게 끓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백했다.

“……네.”

전부 거짓말.

남자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많이 좋아해요.”

호연은 떨리는 음성으로 한 번 더 고백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미친 듯이 자맥질하는 심장이 폭죽처럼 터지는 것 같았다.

“아.”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던 세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이런 대답을 해야 했다.

나는 너를 속이려고 했다. 미안하다. 사실은 너를 사랑한 적 없다. 그만하자. 다, 그만하자.

그러나 여자는,

“사랑도 하게 될 것 같아요.”

아랫입술을 깨물고 하얗게 질린 입술로 한 번 더 고백한다.

“그러면.”

고요를 되찾는다.

계속 거짓말해. 그렇게 계속 나를 속여.

세정은 턱 끝을 들어 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비스듬히 나른하고, 감히 오만하며 거대한 위압감으로 둘러싸인 채 웃는다.

“피임은 하지 말죠.”

세정은 나비장의 문을 걸어 잠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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