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술 한잔 같이 들면 좋을 텐데요.”
주당으로 유명한 오 감독이 아쉽다는 듯 입을 쩝쩝거렸다.
“정리하셔야죠. 다음에 한 번 더 시간 내서 오겠습니다.”
세정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렴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바짓단에 손을 비벼낸 오 감독이 세정의 손을 맞잡았다.
“들어가 보세요. 장마 조심하시고요.”
“예예. 걱정 감사합니다.”
도훈에게서 당장 확인해야 할 보고서를 건네받은 휘영이 한 짐 무겁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확인한 세정이 도훈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도훈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속초에서 묵고 가십니까?”
“아뇨, 저녁만 먹고 갑니다.”
“좋은 식당 꽤 많습니다. 알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회장님이 예약해주신 곳으로 가야 해서. 다음에 같이 가시죠.”
둘이 같이 밥이나 한 끼 하라던 한규의 말. 그리고 세정이 전한 참석 의사에 휘영은 생각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깍듯하게 허리를 굽힌 오 감독과 도훈의 모습을 끝으로 세정과 휘영이 차에 올랐다.
“별장 갑니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린 세정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는 서울 갑니다.”
틈을 둔 휘영이 제 목적지를 알렸다.
“별장 먼저 가겠습니다.”
형제는 서로 말이 없었다.
다만, 휘영은 감히 별장을 입에 담은 세정이 경멸스러웠다.
피아니스트로 이제 막 움을 틀 무렵, 소라가 부상으로 강제 안식년을 가졌던 겨울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몇 년의 일정이 한 번에 짜이는 피아니스트인 소라를 기다려도 너무 기다렸다고.
소라는 한참 미뤘던 청재와의 결혼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약혼은 당시 각별한 친구 사이였던 북두 그룹의 기한규와 SQ 텔레콤의 지영민이 서로의 자식을 우정의 증표로 내놓은 오랜 약속이었다.
순하고 여린 소라는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약속을 자신의 숙명처럼 대했다. 그러므로 절대 깨어질 리 없는 결혼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급히 들어온 소라는 본가보다 속초의 별장이 마음에 든다고 그랬다. 조부인 명균의 요양 시설로 쓰이기 전까지 머물렀다.
그래서 휘영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휘영은 별장을 생각만 해도 발밑이 꺼지고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주먹이 희게 질리게끔 힘주어 쥐며 숨을 짓눌렀다.
비가 오는 차창 너머를 내다보는 세정의 민틋한 턱선으로 주먹을 내리꽂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지금만 그랬나. 소라가 죽은 이후로는 늘 그랬고, 오늘도 눈을 마주한 직후부터 속이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다.
당장 얼굴에 주먹을 처박을 수 있는 거리.
그러나 휘영은 마음을 억눌렀다.
세정은 일부러 기회를 봐주고 있었다. 제가 참지 못하고 먼저 들이받을 순간을. 언젠가 그딴 건 안중에도 없는 순간이 올까. 분노가 임계점까지 불쑥,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휘영은 세정의 권태로운 눈매를 노려보았다.
일순, 그 눈에 힘이 실렸다.
“세워주세요.”
돌연 짜증이 묻은 음성이었다.
차가 완전히 정지하기도 전에 차 문을 열고 나가는 세정의 몸이 꽤 급해 보였다.
뭐야?
휘영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닫지 않은 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사선으로 내리는 빗줄기가 들이쳤다. 차마 문을 열어주지도, 우산을 건네주지도 못한 기사가 휘영을 멍하니 돌아보았다.
“괜찮겠죠.”
얼굴에 빗줄기를 두들겨 맞은 휘영은 귀찮다는 듯 대꾸하며 몸을 물렸다. 멀어지는 세정의 등을 보았다.
저 멀리 인영이 보이는데, 비안개와 해무가 뒤엉켜 눈앞이 흐렸다.
여자 같았다.
“저걸 알아보고 달려갔다고.”
혼잣말에 의문이 묻었다.
“누구인 것 같아요?”
그러곤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글쎄요.”
휘영은 등받이로 깊이 기대었다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요즘 쟤 이상해요?”
“……아니요?”
휘영은 애초에 바른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두었다.
기사가 비를 맞으며 문을 닫았다.
한층 더 흐리게 변한 풍경 속에서 세정이 여자를 끌어안았다.
휘영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순간, 청재가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와이프가 보육원 출신 입양아라던데? 엔마트 백 대표 양딸이래. 급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져서 헛소문이 돌았나 했더니, 진짠가 보네.”
그 여자인가?
이로써 확실해졌다.
세정이 처음으로 약점을 보였다.
하루 만에 기세정의 숨통을 졸라맬 기회를 두 번이나 쥐게 되었다.
한국, 나쁘지 않네.
그러니까 급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는 그 여자, 얼굴을 봐야겠다.
* * *
미술관 밖은 후아드의 와 같은 날씨였다.
“비가 오려나.”
호연은 손을 내어 빗방울을 가늠했다. 마른 손이 허공에서 뒤집히길 몇 번. 떨어지는 빗방울은 없으나 하늘은 멍든 것처럼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근래 장마를 앞둔 변덕스러운 날씨로 우산을 챙겨 다니는 편이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속초까지 왔으니 바다를 보고 싶었다. 부러 맑은 날에 일정을 뺀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호연은 까치발을 들어 미술관 뒤편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었다.
비가 오기 전에 보고 갈까. 빨리 가면 되지 않을까.
발걸음은 바다로 향하면서 수도 없이 발길을 돌릴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정말 곧이라도 비가 왕창 쏟아질 것 같으면 멈춰 서서 또 한참 뒤를 돌아보며 망설였다.
결국 모래사장을 앞에 두고 하늘이 쩍, 갈라지는 천둥과 함께 번개를 동반한 비가 쏟아졌다.
신발이 젖고 계단도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머리칼이 젖어가는 듯 은근한 무게가 느껴졌다.
호연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호연은 급히 핸드백을 뒤져 우산을 찾았다. 그를 펼쳐 머리 위로 바짝 들어 올리고도 아쉬움이 겹쳤다. 짙푸른 파도가 발목으로 밀려드는 듯이 몇 걸음 물러나고 계단으로 다시 돌아와 서성였다.
어느 때보다 더 미련이 맺혔다.
저 시커멓고 웅장한 바다에 무언가 빠트리고 싶은 말이라도 있었나.
아, 생각해보면 자신은 늘 이런 식이었다. 머뭇거리다가, 망설이다가, 고민하다가, 멈춰 섰다가, 좋은 건 남들이 다 가져가고 남은 걸 가져가는 삶을 지냈다.
욕심을 내 본 적이…….
지금만큼 욕심을 내 본 적이 없었다.
양부모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기를, 천사보육원을 지킬 수 있기를, 민형이 건강해지기를 바랐고 당당한 태도로 이 결혼을 매듭짓고 싶었다.
그런데 결과는……. 용기를 낸 만큼의 반도, 반의반도 손에 쥐지 못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쥐지 못했다.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두 손에 쥔 것은 늘 모래 같고 두 눈에 담은 건 눈을 뜨면 악몽이며 가득 안겼던 희망은 곧 절망이었다.
용기를 낼수록 더 최악의 결과를 도출해낸다는 것.
그게 자꾸 발목을 끌어 이곳에 세웠다.
바다에 발을 담그면 나는 또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 이번에는 휩쓸려 죽을까. 그게 최악인가. 그것보다 나쁠 수가 있나.
그러니 확인해 봐야겠다.
나는 바다에 발을 꼭 담가야겠어.
호연은 언제부터 고였는지 모를 눈물을 닦았다. 걸음에는 이제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막연히 바다에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을 뿌리째 흔들었다.
호연은 우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 모래사장을 밟았다. 유리 파편같이 사각거리는 모래알이 구두로 밀려들었다. 젖은 모래알이 뭉쳐 연한 살을 찔렀다. 개의치 않았다.
이내 모래사장에 빠진 구두가 벗겨졌다. 호연은 남은 구두를 벗어 던졌다.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빗방울이 딸려 들어왔다.
그런데,
바닷바람이 더는 오지 말라고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멈춰 섰다.
바다를 코앞에 두고 시커먼 파도가 삼킬 듯이 밀려드는 게 무서웠다. 더는 발걸음을 내디딜 수 없었다.
빗방울이 징그러운 파동을 만들었다. 호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발을 내밀었다.
빠른 유속이 발목을 휘감겠지.
조금 더 나아가면 홱, 쓸려갈까.
그렇게 바닷속에 끌려갈까.
그때,
“야.”
어깨를 홱,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미쳤어?”
확, 딸려간 몸이 당기는 쪽으로 치받았다. 젖은 몸이 맞닿았다.
“미쳤냐고.”
세정의 음성이 바다처럼 성 나 있었다. 어두운 품이 이상하게 뜨거웠다. 가쁜 호흡만이 생생했다.
그게 이미 바닷속 같았다.
몸이 푹 젖었고 숨을 쉬기 어려웠다. 코끝으로 바다의 향이 났다. 입술 끝으로 닿은 눈물이 짭조름했다.
그게 충분히 바다 같았다.
이 품은 내게 충분히 바다 같아.
나의 깊고 어두운 바다.
* * *
뜨겁게 퍼붓는 물줄기 아래서 호연은 젖은 얼굴을 쓸었다. 지난 일이 모두 꿈 같았다.
속은 후련했다. 오히려 바다에 깊이 가라앉히고 싶던 마음이 모두 토해져 속이 허했다. 너무 허했다.
“하…….”
호연은 이마와 뺨에 엉겨 붙은 머리칼을 넘겼다.
사실 세정이 있어, 그 찰나가 꿈 같았다.
서울에 있어야 할 남자가 왜 이곳에, 하필이면 이 바다에, 제 눈앞에.
남자의 맥박이 선명했다. 가파르던 숨이 제 것인지, 남자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게 뒤섞였던 것까지도 똑똑했다.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웠다. 부드러이 웃음 지으며 악수를 청하는 또 다른 남자가 떠올랐다.
세정에게 떠밀리듯 올라탄 차였다. 당연히 운전기사를 제하고는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낯선 남자가 있었다.
멀끔한 정장 차림에 조금은 사나운 인상이 웃고 있어도 서늘했다. 빗물에 젖어 추운 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시선이 오싹했다. 세정과 닮은 듯 다르게 생겼었는데…….
누구였을까.
아니,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야…….”
호칭을 곱씹어보았다. 남자가 아주 많이 화가 났을 때조차도 이런 호칭은 들은 바 없었다.
성가시게 굴지 말라는 듯한 짜증 어린 표정이 연이어 떠올라 호연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빗줄기를 맞고도 주저앉지 않았는데, 세정의 말을 되짚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가슴에 닿은 무릎으로, 심박이 느껴졌다.
그리고 좁은 욕실에서 심박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온몸을 감싼 순간, 호연은 인정해야만 했다.
남자를 생각하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건 분명 바라마지 않았던 일인데,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내 사랑이 시작됨으로,
거짓 사랑까지도 완벽히 시작되었으므로.
남자가 기어코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끝내 속지 않더라도. 내가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를 속이려는 행위, 모든 게 죄스러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