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평생을 아류로 살아왔던 기분은 어떨까.
서러운 삶. 그러나 후아드는 후회 없는 삶이라고 했다. 고흐보다 일찍 발견되는 삶을 살았으니 된 것 아니냐며 영혼을 털어내듯 크게 웃고 죽었다.
어쩌면 타성을 가질 수 있는 단계. 크게 좌절할 수도 있는 시점.
후아드는 완벽하고 유연하게 몸을 뒤집었고 크게 웃었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마침내 크게 웃을 수 있는 삶으로 끝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마음가짐으로 호연은 아랫입술을 씹었다. 왜인지 가슴이 욱신거렸다. 상념에서 빠져나오려 애써 목적을 상기했다.
이 작품이 북두가 3대를 이어오며 소비자들에게 각인된 지루한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힌트가 되지 않을까.
그 힌트를 찾으러 왔다.
“아…….”
그러나 한 번 든 우울한 감상은 사라지질 않아, 시선을 돌렸다.
먼 곳으로 후아드의 연작이 보였다.
암청색 위주로 드리핑한 에나멜페인트가 공격적으로 퍼부어져 있었다. 소낙비처럼, 그 예고 없음처럼. 언젠가 정신없이 캔버스를 가로질렀을 광기의 후아드를 떠올리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무자비하게 과감하며 오만하던 시절의 작품.
호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조용히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이건 꼭…….”
기세정 씨 같다.
굳이 발음하지는 않았다.
* * *
“리조트 사업. 휘영이, 네가 해봐라.”
모래알처럼 끝도 없이 쏟아지는 세정의 성과를 들으며 병풍처럼 앉아 있던 휘영이 눈을 들었다.
한규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으로 못마땅한 기색이 스몄다. 못난 놈. 발음하지 않아도 비틀리는 입매가 가히 상징적이었다.
인이 박인 듯 익숙한 일이다.
“듣고는 있어?”
“네, 듣고 있습니다.”
휘영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어쩐지 휘영은 입맛이 떫었다. 어딘가 모르게 켕기는 느낌. 뒷골이 찌르르, 땅기는 기분. 더불어 타오르듯 직선으로 뻗어오는 시선 하나도 느껴지고.
“어려운 일은 아니다. 몸 푼다 생각하고…….”
휘영은 볼 안쪽을 혀로 밀며 세정의 눈치를 살폈다. 똑바로 쳐다보라는 듯 날 선 눈이 있었다.
존나 사납네…….
휘영은 그를 해석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이토록 노골적이라는 건 그 의미조차 뚜렷하다는 의미였다.
“강원도 동해안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을 한 바퀴 두를 생각이야.”
잘못 건드리면 좆될 것 같은 상황을 본능적으로 짐작하는 촉은 세정보다 휘영이 더 좋았다.
그리고 하필 지금 그 직감이 들었다. 휘영은 눈썹을 휘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기세정 눈만 봐도 지금 여차하면 좆될 거 같은데.
“제주 리조트 개발 사업을 추진 중이던 대서 리조트의 사업계획서가 심의 반려된 데 밀리언 리조트를 참전시킬 예정이고.”
밀리언 리조트는 파라스 호텔과 북두 호텔&리조트로 묶여 있었다. 그러나 리조트 사업은 2000년대 중반, 대서 리조트의 등장으로 사장된 것과 다름없고 북두 그룹은 파라스 호텔만을 주력으로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업계 선두를 휩쓸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서 리조트의 사업계획서가 반려되었다고.
“대서 리조트는 그만큼 자본 조달이 안 돼. 그런 건 북두나 되는 거지.”
그를 역공의 기회로 삼은 한규의 눈이 반질거렸다. 밀리언 리조트는 언젠가 한규가 가장 먼저 지휘했던 사업이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북두 그룹이라는 뒷배가 무색하게 처참히 박살 났으므로 함구하는, 북두 그룹의 트라우마였다.
“이번 선거로 도지사가 바뀔 거야. 민경당의 최원길 의원이 밀리언 리조트를 밀어줄 거다. 그때까지…….”
정계와 재계는 떨어트릴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북두 그룹과 손잡은 곳은 민경당이었다. 그런 민경당의 표밭이 제주도였다.
잠시 잠깐 자국당에게 표밭을 빼앗겼던 민경당은 얼마 전의 대선으로 자신의 표밭이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확신이 선 일이었다.
그런데 고작 뼈저린 실패를 갚아주려는 한규의 마음 따위에 이 정도로 서늘한 기운을 느끼진 않는데.
의아해진 휘영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그리고 리테일 계열사 분리를 할 생각이다.”
그게 밀리언 리조트와는 무슨 상관인가.
리테일의 몸집은 이미 심각할 정도로 거대했다.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얽히고설킨 리테일을 깔끔하게 분리해야만, 북두 그룹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일. 사실상 지금도 비공식적 후계자인 세정에게로 가는 결재 서류만 아니라면 대부분 독립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 분리?
“아…….”
그래서 이제 와 분리.
휘영의 입가로 깨달음의 탄식이 터졌다. 한규의 말이 한결 멀게 들렸다.
세정의 자리를 공고히 해준 것이 파라스 호텔인데, 그를 제게로 넘겨준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성과가 확실할 리조트까지 얹어서.
과중한 리테일의 업무를 분산한다는 핑계로 세정의 지지기반이 되었던 파라스 호텔. 즉, 팔과 다리를 모두 잘라낸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여전히 아리송한 일이 있다. 분명 제가 탐탁해서 넘겨주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또한 세정이 두 손이 잘리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닌데.
픽, 웃는 소리가 세정이 앉은 쪽에서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를 의식한 한규가 못 들은 척 굴었다.
그 모습이 희한했다.
한규가 네덜란드에서 저를 불러들일 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묘하게 나란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네덜란드로 떠나던 시절만 해도 어땠나. 세정은 깍듯했고 한규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관계는,
평행 같다.
한규는 세정을 견제하고 세정은 한규를 향한 적대감을 부러 감추지 않았다.
누가 이길 싸움인가? 누가 무릎을 꺾고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땅에 박고 사정없이 자비를 구할 텐가?
그러나 누가 이기든, 휘영에게는 이미 답이 있는 질문이었다.
소라가 죽은 후로 세정이 완벽한 왕의 재목이라 한들, 왕좌로 가는 길을 쉬이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나. 사사건건 그의 앞에 돌부리가 되리라, 악천후가 되리라, 물길이 되리라. 결심했다.
돌이켜 보니, 내내 기다렸던 순간이다. 휘영의 입꼬리가 휘어져 올라갔다. 한결 유쾌했다. 한규의 말이 귓가로 다시 감겨들었다.
“늦어도 9월에는 임원 소집 설명회가 있을 예정이고, 11월에는 분리해야겠지. 그전까지, 알겠어?”
“잘 알겠습니다.”
세정이 다른 계획을 추진할 수 없도록 진작 준비를 다 하고 촉박하게 넘겨오는 일정이었다.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세정을 생각하자, 휘영은 하복부가 다 짜릿했다. 쭉, 길게 이어진 다리가 근질거렸다. 몸에 딱 맞춰 입은 슈트가 답답했다.
“현장 답사도 필요하겠지. 밀리언 리조트 강도훈 사장이 속초에 이미 가 있어. 세정이랑 같이 가봐.”
이제 더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눈길을 거두었다.
“네.”
휘영이 다리를 펴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휘영이 너도, 자리 잡으면 결혼을 해야지.”
휘영의 웃음이 전소했다.
“네가 많이 늦었다.”
적기를 놓친 물건을 대하듯 한규는 무성의하게 말했다.
“상대는 최원길 의원의 딸, 최리연이야.”
그리하여 급 낮은 혼처만 남아 있다는 듯이, 애초에 네가 좋은 혼처를 받을 주제나 되냐는 듯이. 그마저도 사생아에게는 과분하다는 듯이.
“…….”
이어지는 긴 침묵에 한규는 감히 내 것을 그냥 내어주겠냐, 묻듯 날카로운 눈빛을 올려 보냈다.
* * *
속초에 도착했을 땐 바람에 구겨진 나뭇잎이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땅을 디딘 모든 것에 바람이 공평하게 불어닥쳤다.
“씹, 날을 골라도…….”
바람 한 번에 헤집어지는 머리칼을 쓸어 올린 휘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에서 출발할 적에는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이었는데 이제는 먹색 구름이 곧이라도 세찬 비를 내릴 듯 징그럽게 하늘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쏟아져도 한참 쏟아지겠네.”
“오셨습니까!”
어디선가 굵직한 목청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에 간격을 두고 서 있던 세정과 휘영이 동시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비가 올 것 같아 현장을 정리하느라 늦었는데…….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오현민 현장 감독과 강도훈 사장이었다.
“좀 기다렸습니다.”
건네 오는 악수를 받은 세정이 가볍게 웃었다. 장난인 걸 단박에 알아차린 오 감독이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따라 웃었다.
그 모습에 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삐딱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기휘영입니다.”
“아, 회장님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앞으로 밀리언 리조트 이끌어나가 주신다고요.”
세정에 비해 다소 뻣뻣한 휘영의 손을 도훈이 맞잡았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인데요.”
“이쪽으로 가시죠.”
도훈의 안내를 시작으로 커다란 공사 현장이 펼쳐졌다. 수많은 인부가 곧이어 닥칠 비를 예감한 듯 서둘러 갈무리를 하느라 여념 없는 모습이었다.
“공사가 바쁩니다. 장마가 곧 시작이라 마음이 급한데, 기상청은 들어맞질 않으니.”
이미 골조 공사는 제법 진행이 된 모습이었다.
그를 둘러보는 세정의 표정이 묘했다.
리테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서류를 올려 받는데, 이걸 회장실 직통으로 받았다고.
세정은 헛웃음이 샜다. 한규의 뜻을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제 손바닥에서 놀아나지 않는다면 팔다리를 자른 채 북두 전자로 올려 보내겠노라. 할 수 있다면 계속 찍어 눌러 만년 후계자라는 오명을 씌우겠노라.
물론 한규가 자행한 일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며 충분히 불쾌한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 괜찮았다.
그 전에 엔마트가 세정의 손에 들어올 테니까. 거기다 곧 있을 뉴웨이브의 M&A까지. 북두 마트가 국내 시장과 해외 시장의 파이를 잡아먹어 몸집을 불릴 거였다.
그러므로 휘영의 밀리언 리조트가 리테일 계열사 분리의 핵이 되는 게 아니라, 엔마트를 가져올 세정의 행보가 핵이 될 예정이었다.
한규에게 속수무책으로 파라스 호텔을 빼앗기는 모양새가 아니라 정말 필요로 계열사를 분리하는 것처럼 보일 테다. 오히려 좋았다.
리테일 계열사 분리는 세정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으니까.
“이쪽에 골프장이 들어옵니다. 보시죠.”
세정은 속초로 오는 내내 들여다보았던 조감도를 떠올렸다.
설명과 함께 눈앞으로 그림이 펼쳐졌다. 광활한 대지를 그대로 사용하는 골프장은 아마 속초 밀리언 리조트의 자랑이 될 것이다.
세정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속이 트이네요.”
내내 세정의 낯빛을 살피던 도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속초 공기가 좋습니다. 많이 마셔두세요. 자, 이쪽으로 가시면 온천이에요.”
세정은 멀어지는 세 사람 뒤로 핸드폰을 들어 알림을 확인했다.
호연에게로 보낸 메시지의 답장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안 오세요?”
눅눅한 바람이 불어왔다. 메시지를 하나 더 전송한 세정이 고개를 들었다.
“갑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