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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44화 (44/98)

제44화

세정은 제 앞까지 굴러온 젓가락을 응시했다. 툭, 제가 쥔 젓가락 끝으로 호연의 것을 쳐 돌려보냈다.

따라 흐르는 시선 끝, 굴러온 것은 한쪽뿐. 다른 한쪽은 호연의 손가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호연은 기우뚱한 자세로 불편하게 잠든 채였다.

이로써 제 앞에서의 두 번째 수면.

입맛이 떨어졌다.

그냥 테이블에 왼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그러곤 젓가락을 뻗어 호연의 남은 한쪽 젓가락도 툭, 쳐냈다.

깡그랑―

위에서 떨어진 젓가락이 생각보다 큰 소음을 냈다.

눈을 뜰까.

호연의 입술 끝 근육이 실룩였다. 무언가를 씹듯이 우물우물. 이내 무게감이 사라진 손가락을 바르작거리더니 잠잠해졌다.

잠결에서 깊은 잠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 것 같은 꼴이 되었다.

세정은 요동 없는 얼굴로 호연을 시야에 담아두다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렸다.

내내 곤한 얼굴이었다. 제게 불려왔을 때도, 여러 번 옷을 갈아입을 때도, 끝내는 맥없이 축, 늘어질 때도.

아직도 솟아오르는 복국의 뽀얀 김이 호연의 얼굴을 감싸고 올라갔다.

그를 밀어 치워주었다.

톡, 토톡.

호연의 고개가 꾸벅꾸벅, 아래를 향할 때마다 조용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런 얼굴은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했다.

어쩌면 여자의 민낯은 이와 같지 않을까.

평온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한다. 흔들리라고 불어오는 바람에 내처 사정없이 나부끼는. 그러다가 천천히 제자리에 서는. 흔들리되 꺾이거나 부러지지는 않는 것.

흔들릴 바에야 부러짐을 택한 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성.

그래서 반드시 찍어 누르고 싶은 강한 열패감이 들었다.

그 속이나 알고 저리 빈틈을 보일까. 제 앞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같을까.

문득, 언젠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호연의 대학교 앞, 해장국집. 호연을 보고 달려오던 동기 중에 말쑥하고 훤칠한 하나.

세정은 테이블에 놓인 호연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무심한 손길로 스와이프하는 화면에는 잠금도 없었다.

[오늘 옆 테이블에서 번호 받아 갔던 김승혁입니다. 혹시 기억나시나요……?]

심부름센터의 대표, 송영한이 말하던 게 이건가, 싶었다.

기실 나한테만 보이지 않는 빈틈인가.

세정은 스크롤을 좀 더 내려 보았다.

[안녕하세요. 기억나기는 하는데, 제가 이런 걸 싫어해서요.]

[그럼 번호를 왜 주셨어요?]

[죄송해요.]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친구라도 하고 싶어서 번호 받았습니다. 친구로 지내는 건 괜찮죠?]

[저기요? 똑똑.]

[나 차단했어요?]

[스물네 살이랬죠? 나 스물다섯 살이에요.]

[나 알아요. 대헌예술대학교 예술대학원 다니죠?]

[이름 알았다. 백호연 씨죠?]

[왜 답장이 없어요? 이 번호 맞는데? SNS 계정 나오는데?]

호연의 직설적인 거절이 있었다. 그를 차단도 해두었으나 번호를 바꿔서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모양이었다.

세정은 흥미 없는 표정으로 화면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매번 대화창을 정리하는 건지, 연락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건지 특이점이 있는 메시지란 없었다.

통화기록부도 마찬가지였다. 저장되지 않은 제 번호 아래로, 오은선, 이교은, 현소예…….

세정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호연이 정말 연인을 뒀어도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랬으면 했다. 그러면 백호연이 오은선과 다를 바 하나 없다고 매듭지을 수 있겠지.

이러다가 정말 백호연이 제 아이를 갖는 상상을 한다.

작은 체구에 달처럼 동그란 배를 하고 저린 손으로 여러 번 붓을 고쳐 잡는 여자의 모습과

배를 끌어안고 소파에 앉아 아무 말이나 속삭이다가 웃음을 터트릴 여자의 음성과

끝내는 아이를 낳고 쫓겨나는 여자의 꼴을 상상한다.

여자의 배에서 양분을 먹고 자랄 아이의 모습도 그려본다.

여자를 닮았으면 색소가 옅은 것들을 갖게 될 것이다. 노랑이 깃든 눈이나 탐스러운 숱의 연갈색 머리칼, 하얗고 여린 살성 같은 것.

아이는 귀여울 것이다.

이 관계의 말로가 파국이라 하더라도.

세정은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을 돌아 호연의 앞에 다리를 접어 앉았다. 살짝 열린 입술을 엄지로 가볍게 짓누르자 호연은 불편한지 입술을 실룩이다 고개를 틀었다.

매끈하게 드러난 목선이 자극적이었다. 이대로 눕혀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세정은 손가락으로 호연의 뺨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솜털이 느껴지는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미약한 충족감이 번졌다.

개나 고양이를 만지는 느낌이 이와 흡사하려나.

무심하게 생각하던 세정이 호연의 뺨에서 손을 뗐다. 가까이 놓인 가방을 당겨 열고 그 안으로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 * *

오금과 목뒤를 받치고 있던 단단한 팔뚝이 떠나갔다. 언제부터 남자의 체온이 익숙해졌는지 모르겠다. 남자의 팔뚝이 떠나간 자리로 푹신한 매트리스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호연은 잠에서 깨지 않은 척 눈을 뜨지 않았다. 어깨선에 맞추어 이불을 덮어주는 손길이 이어졌다.

왜인지 콧잔등이 시큰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언제고 아버지가 만취해 들어올지 몰라, 어린 민형과 저는 늘 불면증을 앓았었다.

불안을 중얼거리며 나누던 새벽, 뜬눈으로 마주한 아침. 이윽고 쏟아지던 잠과 지쳐 꿈자리마저도 흉흉하던 날들.

그런 날들에 호연은 부러 이불을 걷어차고 자곤 했었다. 문득 잠에서 깬 민형이 발치로 밀려난 이불을 끌어 올려 제게 다시 덮어주는 순간이 좋아서.

그게 사랑 같아서.

사랑이 눈에 보이는 순간 같아서.

그런데 이런 감정을 남자가 안겨 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가만히 혼란스러웠다.

“후우…….”

호연은 세정이 문을 닫고 나가고서야 큰 숨을 내뱉으며 몸을 세웠다. 남자가 덮어주었던 이불이 흘러내렸다. 침대 헤드에 허리를 붙이자, 안정감이 들었다. 어두운 방의 어딘가를 한참 바라보았다.

콧잔등이 시큰했던 찰나가, 사랑이라고 규정했던 행동을 남자가 행하므로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찰나가 저물었다.

호연은 다시 미끄러지듯이 누워 이불을 눈 바로 아래까지 덮었다.

정말 내가 사랑에 빠지는 중일까.

잠에서 깨어 올려다보았던 세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가 기꺼이 내어준 탄탄한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있던 기억.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게 되었던 건, 머쓱함이 시킨 짓은 아니었는데.

미약하게나마 덜컹거리는 차에서 어깨를 붙잡아 충격을 억제하던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했는데.

치부를 걸고 협상하던 남자의 어투가 눈에 띄게 누그러져 있었는데.

……그래서, 뭐?

뒤따르는 의문에 호연이 어둠 속에서 표정을 구겼다. 왈칵, 짜증이 솟았다.

남자도 제게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고 합리화하고 싶은 거야?

하하…….

호연은 그 물음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남자가 저를 사랑하다니.

이보다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디 또 있나, 싶었다.

* * *

속초는 높고 맑은 하늘을 쥐고 있었다. 서울의 어느 곳보다 선명한 싱그러운 풀 내음이, 가까운 바다의 예감이 물씬 밀려와 여름의 한복판에 선 기분이었다.

―그래, 그렇다니까. 우리 오빠가 너도 밥 한번 사주고 싶대.

“나를?”

택시에서 내린 호연은 핸드폰을 고쳐 쥐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후아드 작품전’ 건널목 너머로 커다란 현수막이 펄럭였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뜨거워 발걸음을 바쁘게 옮겼다.

―응. 나랑 제일 친한 친구가 너라니까, 꼭 한번 밥 한 끼 하고 싶대. 내가 학교에서 남자 동기들이랑 말 한마디도 안 한다고 그랬거든? 아마 이거 물어볼 것 같아.

소예는 꽤 나이 차가 나는 연애를 시작했다. 대기업의 차장이라고 그러던가. 나이를 지적하는 동기에게 그는 능력이 좋다고 했다. 차도, 돈도 없는 시시한 또래와는 다르다고.

“뭐? 진오는? 진오가 여자야?”

―아, 솔직히! 진오는 동성 친구 같지, 이성 친구 같진 않잖아. 나만 그렇게 생각해?

내심 동의하는 부분이긴 했다. 군 제대 후 아직 학부생인 진오는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내와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생물학적으로 여자는 아니니까…….”

―아니, 그걸 떠나서 넌 진오랑 사귈 수 있어?

왜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냐. 왜 소개를 받지 않냐. 남자는 영 관심이 없냐. 그림에 미쳤냐. 그림이랑 연애하냐…….

제가 결혼했다는 걸 알면 할 수 없는 말들.

호연은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걔랑 왜 사귀는 상상을 해야 하는 건데……. 끊어. 나 후아드 전시회 다 왔어.”

호연은 손차양을 만들어 미술관을 올려다보았다. 외벽에 걸린 후아드의 초상화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도 가고 싶다, 후아드…….

“같이 가자니까.”

―오빠랑 선약 있는데 어떻게 가. 너는 저번에 너 번호 받아 간 사람이랑 잘돼 가?

호연이 반듯한 미간을 구기며 답했다.

“잘되긴 뭐가 잘돼. 그다음부터 그냥 연락 안 했어.”

―왜에? 잘생겼잖아. 연락 더 안 와?

“계속 답장 안 하니까 안 보내더라고. 나 진짜 들어갈래, 끊을게.”

―좀 아쉽다. 아무튼, 내 몫까지 후아드 많이 보고 와!

호연은 잠잠해진 핸드폰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미술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록에도 후아드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다만, 마음이 숙연해지는 까닭은 생몰의 기록이 아주 최근의 것이라, 그랬다.

유명세를 얻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으니까. 자칫하면 생전 제 이름이 화단과 평단에서 호평받는 일을 보지 못하고 죽었겠지.

호연은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강원도 속초와 프랑스 화가 후아드.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나 어느 방면에서는 흡사했다. 후아드는 바다를 낀 지역,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평생을 살았으므로.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를 수락한 이후 수연에게서 전달받은 컨셉이 있었다. 최대한 정적이고 세련된 북두만의 이미지를 선보이고자 한댔다.

호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후아드를 떠올렸다. 그는 생전 잘 팔리는 작품을 내놓는 화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호연이 그를 아는 이유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작품 덕이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19.3 x 22.7cm의 아주 작은 작품이었다. 한 벽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작품을 그리는 후아드의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거칠고 사나운 기질로 감히 위압적인 작품들과 다르게 이 작품은 단아하고 얌전한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강렬하기는 마찬가지라 한 벽을 오롯이 차지하고 있었다.

내내 잭슨 폴록의 아류라고 평가받던 그가 ‘후아드’, 독립적인 작가로 조명받게 된 작품이었다.

호연은 조금 멀찍이 물러나 섰다. 완전히 잠식되지 않기 위하여, 한눈에 온전히 감상하기 위하여.

제목과 모순적이게도 명청색 위주로 드리핑한 에나멜페인트가 조금은 느린 속도감으로 흩뿌려져 있었다. 모든 걸 체념하던 말년, 캔버스를 가로질렀을 후아드의 차분한 손길을 떠올리자 절로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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