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호연의 걸음이 느려졌다.
“자기야, 안 와?”
앞서 걷게 된 은선이 몸을 돌려 호연을 길게 불렀다.
“저 전화 좀 받을게요. 잠시만요.”
호연이 살짝 들어 올린 핸드폰을 유심히 보던 은선이 다시 성큼성큼 되돌아왔다.
그러곤 전화를 받으라고 고개를 까딱, 그랬다.
못 받을 것도 없지만……. 굳이?
호연은 귓가로 핸드폰을 붙이면서도 의아했다.
“네, 백호연입니다.”
―어디예요?
본인의 정체를 밝히지도 않는 무례함. 목적만을 밝히는 단조로운 물음. 낮디낮은 음성과 특유의 오만한 어투.
단순히 어디냐고 물었을 뿐인데, 어디서든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호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로비를 훑어보았다.
높은 층고와 큰 창으로 탁 트인 개방감. 호화스럽고 찬란한 샹들리에. 그 빛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대리석 바닥. 이 층과 삼 층 난간과 에스컬레이터. 하염없이 이어지는 새하얀 계단…….
―어딘데 말을 못 할까.
북두 그룹과 경쟁하는 K 백화점에 와 있어도 안심할 수 없게 만드는 남자,
기세정이었다.
* * *
“별로.”
세정은 뻣뻣이 선 호연에게로 시선을 딱 한 줌 주었다.
그리고는 별로라고 말하며 손을 닦았다.
정확히는 호연이 입은 옷마다 번번이 퇴짜를 놓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별로고, 어떤 옷이 어울릴 거라고 말을 해주시면 좋을 텐데요.”
커튼으로 가려진 VVIP룸의 탈의실 속에서 퍼스널 쇼퍼가 아주 작게 속닥였다. 호연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흐리게 웃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까탈스럽지 않은 분이신데…….”
세정을 몇 년간 담당해 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던 퍼스널 쇼퍼는 꽤 난감한 눈치로 궁색한 변명을 더 했다.
이에 호연은 고개를 숙여가며 픽, 웃었다.
까탈스럽지 않은 분이라니. 난 살면서 기세정 씨만큼 까탈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어요.
“탈의 도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몸에 둘러진 모든 것들은 아주 고가의 물품들이었다.
제가 스스로 벗어내는 것보다 몸을 맡기는 게 그녀를 돕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호연은 따끔거리며 몸에서 떠나가는 아름다운 액세서리와 벗겨지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팔다리가 기셔서 웬만한 건 정말 다 잘 어울리시거든요.”
퍼스널 쇼퍼는 행거에 옷을 걸면서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깨끗한 하얀색이 이렇게 잘 받는 분은 처음인걸요.”
그러곤 호연을 힐끗거렸다. 밀가루를 문지른 것 같은 살결 위로 번진 붉은 울혈들을 살폈다.
제 상사의 자국.
매번 건조하다 못해 삭막한 공기를 거느리고 다니던 사람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면…….
그래도 저건 심하잖아.
처음에는 놀랄 정도였다. 옷으로 감싸진 곳은 온통 손자국이고 심지어 이로 깨문 듯한 짓궂은 흔적도 있었다. 마치 제 것이라고 영역 표시라도 하듯이 남겨놨다.
심지어 옷을 입고 벗을 때도 쓰라린 통증이 있는 것 같던데.
얼마나 짐승처럼 붙어먹었으면.
두 사람의 행위를 그려보느라 얇은 눈을 하던 그녀는 호연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손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다른 느낌으로 입어보는 거 어떠세요?”
“좋아요.”
“아키엔디랑도 분위기가 잘 어울리실 거 같아요.”
처음에는 부끄러웠나. 호연은 제법 덤덤하게 시선을 받아들였다. 가만히 거울 속 제 모습을 보았다.
덩그러니 흰색 속옷만 입은 여자의 모습은 가련한 것도 같다.
맞은 것처럼 불그죽죽한 전신이 학대의 흔적 같기도 하고.
학대…….
호연은 눈썹 사이를 좁히며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색감이 짙은 거로 입어 볼까요?”
유독 연한 살성을 가졌다고, 때리면 곧장 티가 나서 어디 때리기나 하겠냐고 말하던 부친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탈의 끝에 타인의 시선은 익숙해졌는데, 시야 속에 들어오는 제 몸은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던 피부인데, 온통 거울로 둘러싸인 공간에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문득, 속이 꽉 막히는 듯한 답답함에 호연이 큰 숨을 들이켰다. 호흡이 이상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데 그 반절도 삼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쓸 수 있는 호흡이 들쭉날쭉해서 이상하게 식식거리는 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이에 불안이 증폭되었다. 제대로 된 숨을 쉴 수가 없다. 그 사실에 손쓸 수 없는 공황이 밀려와서 호연은 손가락을 꽉 붙잡았다. 동공이 자꾸 위로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또 말이 먹먹하게 들려서 호연은 머리를 작게 흔들었다.
몸에서 쭉쭉, 피가 빠지는 듯한 기분. 그리하여 바닥이 푹, 꺼지는 듯한 감각. 흔들리는 시야와 이제 어지러운 머리.
순간, 호연이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렸다.
“어머, 고객님!”
퍼스널 쇼퍼는 대답 없는 호연을 쳐다보다가 고성을 내지르며 달려와, 주저앉으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 괜찮아요…….”
반사적으로 힘없이 대답한 호연이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신이 있었다. 아직……. 정신이 흐려지던 순간이었다.
“나가보세요.”
단단하고 의지가 되는 음성.
“들어오지 마시고.”
감기던 호연의 눈이 느리게 다시 뜨였다.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뒷걸음질로 걸음을 옮기는 퍼스널 쇼퍼와 저를 무신경하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시야에 들어찼다.
드러난 살결과 속옷, 잔뜩 구부러진 몸, 맥없는 시선과 처참할 몰골.
그를 담담하게 차례로 훑은 세정은 돌아나갔다.
분명 따뜻한 공간인데, 남자가 일으킨 바람이 찼다.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묻어 몸을 웅크린 호연은 덜덜 떨면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주 잠깐 떨었던가.
“어디 아파요?”
호연의 몸 위로 두툼하고 커다란 담요가 덮였다. 붉고 하얀 살결 하나 보이지 않도록 호연은 담요의 끝과 끝을 잡아당겼다.
세정은 눈썹을 까딱, 그 이상한 모습을 보다가 다리를 굽혔다.
가까이서 호연을 살폈다.
커튼이 쳐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여자가 갑자기 이런 꼴이라니.
헝클어진 머리칼을 넘겨 귀 뒤로 꽂아주고 식은 뺨부터 흔들리는 동공 아래로 젖은 눈매를 매만졌다.
“병원 갈까요.”
“…….”
“집으로 갈까.”
“…….”
호연은 간간이 인상을 찌푸리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호연을 따라 표정을 구기던 세정이 손을 뻗었다.
움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는 호연의 모습에 세정은 손을 멈추었다.
“…….”
“…….”
좆같네.
누가 때렸을까. 도박장에서 굶어 죽었다는 부친?
세정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부러 골탕을 먹이려던 건 맞다.
오은선이랑 있었잖아, 네가.
자꾸 웃잖아.
은선에게 붙인 사람에게서 사진을 받아보는데, 정확히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오은선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아니라, 백호연이 자아낸 감정이라는 건 확실한데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트리거가 눌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백호연을 북두 백화점에 데려온 거였다.
영문 모를 불쾌한 기분이나 나누자고. 아니면 전부 백호연, 너 가지라고.
그런데 이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더 좆같네.
세정은 뻗었던 손으로 머리칼을 넘기며 호연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알 도리가 없지.
“씹…….”
세정에게서 흘러나온 욕설에 호연은 잠시 잠깐 눈을 들어 올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금세 내리깔았다.
“병원 가.”
그 모습에 세정이 툭, 침을 뱉듯 내뱉었다. 이제야 정신이 든 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이제…….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일어나.”
“공황이에요. 집에 약도 있고요, 지금은 괜찮아요. 가봤자, 아무것도 못 해요.”
호연이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세정은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들었다.
움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 섬광이 지나갔다. 학습된 공포로 몸을 떠는데 머리칼 위로 세정의 손이 떨어졌다.
그저 한 번, 부드러이 머리칼을 쓸고 내려간 손이 세정에게로 되돌아갔다.
호연은 세정의 손이 울컥할 정도로 다정하게 느껴졌다.
분명 좀 전까지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도록 만든 얄궂은 짓을 한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의지가 되었다.
“누구예요.”
이어서 물음이 닿았다. 호연은 의도를 알 수 없는 물음에 되물었다.
“……네?”
“누구냐고, 백호연 씨 팬 사람.”
말문이 잠겼다.
“왜 갑자기 궁금해하세요.”
방어 기제로 튀어나오는 대답이 이따위였다.
호연은 아랫입술을 티 나게 깨물었다.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백호연 씨가 갑자기 이러니까.”
“…….”
“내가 대답했으니까 백호연 씨도 대답해야죠.”
호연은 부러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치부의 기억이었다. 찔리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야 마는, 저를 구성한 것 중에 가장 연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맞고 자랐다는 말을 어떻게 해.
남자의 앞에서 얼마나 더 비참해져야만, 불쌍해져야만 하나.
“말해주면, 나도 백호연 씨가 궁금해하는 거 말해줄게요.”
세정은 호연의 턱을 엄지로 툭, 밀어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말이 의외로웠다.
“그래야 다음에는 내가 조심하죠.”
이용하지 않고 조심하겠다고.
잔잔한 심박 위로 남자가 무심하게 돌멩이를 던졌다. 고른 물결을 순식간에 어지럽혔다. 마음이 흔들렸다.
내 치부를 알려주면 제 것도 알려주겠다고.
이미 남자는 제 학대 이력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남자와 제가 가진 차이니까. 쉽게 사람을 시켜 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남자와 고작 스크랩북 하나에 의지하는 자신이 공유하는 치부는, 그 가치가 달랐다.
오히려 제가 이용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도 호연은 작은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주저했다. 세정은 검지를 올려 호연의 아랫입술을 내렸다.
오종종한 아랫니를 고스란히 보여주던 호연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정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대답했다.
“아빠가 손버릇이 안 좋았어요.”
“똑같이 해줄까요?”
호연이 고개를 숙여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에게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생사도 몰라요.”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래요. 정말 다 괜찮아졌는데, 가끔 연관된 것들이 보이면…….”
“지금은 연관된 게 뭔데.”
호연은 담요를 살짝 내려 어깨를 보여주었다. 그곳에도 세정의 잇자국이 나 있었다.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세정이 물었다.
“……그만할까요.”
심장이 기우뚱, 몸을 뒤집었다. 생각과 다른 결론이었다.
마치 이 관계를 그만두자는 말로 들렸다. 순식간에 웃음기가 흐려지고 초조해졌다.
아직 남자가 원하는 걸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런 데서 섹스가 빠지면 이 관계는 무엇이 되지. 이대로 끝이 나는 거잖아.
대답은 반드시 아니, 였다.
머리를 굴린 호연이 급히 대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세정의 눈이 좁아졌다.
“살살.”
“살살?”
어이없다는 듯 곱씹은 세정이 피식, 웃었다.
“살살, 어떻게?”
그런 건 도통 할 줄 모르겠다는 양, 세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르쳐줘 봐요. 어떻게 하는데.”
세정은 담요의 양 끝을 붙잡은 호연의 손을 홱, 당겼다.
불쑥, 입술 사이가 미친 듯이 가까워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