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이불의 미끄러운 감촉이 살갗을 부드럽게 감쌌다. 땀에 젖은 호연의 손이 여러 번 쥘 것을 잃고 헤맸다.
호연의 방에서 이뤄지는 섹스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부도덕한 기분이었다.
남자의 행적을 잘라 붙인 스크랩북이 서랍 안에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외신들은, 외신들의 기사를 받아쓰는 한국의 기자들은 남자를,
‘딜레마’라고 했다.
그가 M&A를 제안하는 시점에서는 그보다 나은 선택지도 없다고. 어찌 됐든 북두 그룹에 흡수되는 건 당연한 거라고. 그러므로 그는 ‘딜레마’라고 표현한 데서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없다.
계속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 무수한 딜레마 속이었다.
“그만. ……그만하고…….”
호연은 허리를 뒤틀며 크게 신음했다.
아득하게 이어진 쾌감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그만이 어디 있어요.”
세정은 태초부터 불긋했을 호연의 가슴 위쪽 동그란 살을 잘근거렸다.
호연이 반사적으로 세정의 머리칼을 꽉 쥐었다. 아, 짧게 탄식한 세정이 힘 빠진 호연의 손목을 잡아 끌어내렸다.
“아프다니까.”
내가 할 말이잖아.
호연은 붙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눈이 시리도록 쏟아지는 빛을 가렸다.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커, 튼이라도…….”
“늦었지. 그건.”
무엇이 늦고, 무엇이 빠른가.
커튼을 쳐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던 남자가 떠올랐다.
암막 커튼을 치기만 하면 이곳은 밤이 되는데 세정은 부득불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각진 창의 모양대로 조각난 햇살이 호연의 가슴과 배를 달구는 것을 손으로 쓸어 만지며 웃었다.
오늘은 처음부터 제 의사는 하나도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었겠지.
“아, 응……!”
다른 한 손도 끌어내린 세정이 두 손목을 한 손에 가두었다. 모인 가슴 위로 다시 한번 세정의 혀끝이 닿았다. 젖은 살을 들락거리는 감각에 더해진 쾌감이었다.
“흐윽……!”
호연이 고개를 꺾었다. 몇 번째인지 셀 수 없는 절정이었다. 호연은 죽은 것처럼 몸을 늘어뜨렸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이 잔혹한 환희가 끝나길 빌었다.
그러나 세정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세정 씨……. 세, 세정 씨이…….”
몸의 모든 끝으로 번진 절정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두꺼운 성기가 내벽을 헤집었다. 둔감해지는 순간을 주지 않는 무자비함이었다.
“아, 윽, 흐윽, 응! 아…….”
호연은 가는 목선이 끊어질 듯 거세게 도리질 쳤다.
호연은 자꾸 사그라들어 뭉쳐진 소리가 나올 때마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언제 입술이 터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늘 입술에는 피를 보고 눈에는 눈물을 보는 관계였다.
언제쯤 익숙해질까. 언제쯤 쾌감에 몸서리치지 않고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끝내 눈물이 넘쳤다. 울렁거리던 시야가 한층 개었다. 젖은 베개가 차가웠다.
호연은 그저 세정에게 몸을 내어준 채로 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쉼 없이 헐떡였다.
“어딜 봐요.”
그 턱을 세정이 붙잡아 고정했다. 호연은 남자의 어깨너머로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셨다. 눈매를 찌푸렸다. 그런데도 세정은 허리를 세워주는 친절 또한 베풀지 않았다.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호연의 얼굴을 보며 허리를 길게 쳐올렸다.
“흐, 아! 응, 으응……. 네에……! 세, 아! 정……!”
본인이 듣기 좋은 높이의 신음을 낸다는 걸 알까?
세정은 무심결에 생각했다.
여자의 몸이 손으로 쥐면 안개처럼 흩어질까 걱정했던 순간이 있었지.
여자는 쥐는 대로 손자국이 남는 연한 몸을 가졌다.
세정은 짓궂게도 호연의 턱을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뺨을 손가락으로 눌러 입술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었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키스에 호연이 작게 몸서리쳤다. 이내 순응하여 감기는 혀를 미련 없이 떼어낸 세정이 다시 몸을 세게 부딪쳤다.
“흐, 윽……. 아……! 아!”
한번 터져 나온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세정은 햇살이 고루 번졌던 호연의 납작한 하복부를 문질렀다.
햇빛이 스미지 않았어도 가장 따뜻한 곳.
여자의 얇은 피부가 제 것의 모양대로 굴곡이 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묘한 충만감을 느낀다.
에어컨 바람이 닿은 여자의 차가운 피부와 몸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 열로 발긋해진 뺨과 눈꼬리.
묘한 만족감을 느낀다.
보상을 줘야 할까?
“천사보육원 말이에요.”
세정은 호연의 다리를 올려 어깨에 걸으며 물었다. 호연의 몸이 밀려 나간 만큼 골반을 당기고 몸을 기울였다.
“네, 에……. 하윽!”
순간 드리워진 그늘에 호연은 초점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달라진 공기의 밀도감으로, 코끝으로 느껴지는 향으로, 고루 퍼진 위압적인 예감으로 호연은 남자가 제게 바싹 다가왔구나 짐작했다.
“내가 후원을 좀 할까 하는데.”
“흐읏, 으으…….”
“백호연 씨 생각은 어때요.”
호연이 엉덩이를 움찔거리는 원초적인 본능이 세정에게는 또 다른 자극이었다.
“좋아요?”
세정은 호연의 흐린 눈에 시선을 박아 넣었다.
“좋냐고.”
아주 빠졌다가 깊이 들이치고. 아주 딸려 나왔다가 긴밀하게 붙어 들어가고.
“네에, 네에……!”
절정의 순간, 세정은 오히려 느린 움직임으로 호연의 극점을 긁었다.
“으, 응!”
바들거리며 무너지는 호연의 몸. 빠듯하게 솟은 턱과 깨끗한 흰자위.
세정은 이대로 호연의 눈이 멀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그림을 그리지 못할 테니까.
그러면 너를 볼 때마다 들끓는 열등감도 사라질 텐데.
그러면 너의 다리를 벌리고 무력하게 신음을 흘리는 것에 흥분하지 않을 텐데.
* * *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다.
호연은 세정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지금까지도 몽롱한 기분이었다. 여전히 멍한 눈으로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배달일까?
명란 오차즈케였다. 밥알이 녹차 물을 머금고 구워진 명란이 위에 얹어져 고소하고 담백한 맛에 짭짤한 맛이 예감되었다.
분명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잠이나 더 자고 싶었는데.
정갈한 상차림에 입맛이 돌았다.
“알람 울리길래 깨웠는데 컨디션 어때요?”
세정은 호연의 잔으로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
“좋은……!”
호연은 대답하며 반사적으로 잔 아래를 붙들었다. 몸에 밴 예의였다.
그러나 순간, 아랫입술부터 복사뼈까지 꼬챙이로 쑤신 듯한 강한 둔통이 일었다.
호연은 몸을 웅크린 채 입 안쪽 여린 살을 씹어가며 버텼다.
이처럼 유사한 통증을 몇 번이나 겪었는데도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좋기는.”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되받아쳤다.
“입안도 다 헐었던데.”
통증이 가라앉을 쯤 호연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세정은 호연의 손을 보고 있었다.
“피곤하면 그렇다던데. 대학원 힘들어요?”
그게 아니라…….
“아, 아뇨.”
“그러면 나 때문에?”
세정은 호연을 힐끗, 바라보곤 웃었다.
“약은 협탁 위에 뒀어요. 밥 먹고 먹어요.”
호연은 장난기 어린 그 미소에 시선을 빼앗긴 채로 가만히 있었다.
어쩐지 공기가 모자란 것 같았다. 조금은 빠듯하게 숨이 쉬어지는 기분.
“그리고 너무 예의 갖추지 말죠, 이제.”
숟가락을 들어 올린 세정이 호연의 손을 눈짓했다.
호연은 아직도 잔을 붙들고 있는 제 손을 보았다.
“응, 그거.”
가볍게 확신을 심어준 세정이 한 술을 떠먹었다. 잘그락, 얼음이 그릇에 닿는 소리가 났다.
대화가 중단된다는 뜻이었다.
호연은 뜨거운 손 탓에 미지근해지는 물을 바라보았다. 유리잔 속에 제 모습이 맺혀 있었다.
가만히 눈을 맞추고 들여다보았다.
남자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이 관계의 암묵적인 법칙.
이상하게도 목이 졸아붙는 듯했다. 뜨겁고 간지러웠다.
호연은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아직 차가웠다.
전날의 기억이 물과 함께 몸속으로 퍼졌다.
천사보육원을 후원하겠다고 약속한 남자.
계속, 계속 좋냐고 묻던 남자.
결국엔 좋다던 대답.
전날의 관계에서 가장 수치스러웠던 순간이 언제냐 묻는다면 그 순간이라 하겠다.
마지못해 떠밀려 한 대답이 아니다. 관계 중에 아무렇게나 나온 말이 대답이 된 게 아니다.
그 순간, 정신이 들었다.
필요해……. 그 돈이 필요해.
다시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그 대답만큼은 정말 진심이었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또 한 번 남자가 선을 그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관계를, 저와의 밤을 돈으로 매기는 남자. 몸을 파는 것에 지나지 않는 연장된 결혼 생활.
그런데도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돈을 지불할 수 있고, 자신은 돈을 원하니까.
그거면 된 것 아닐까.
몸 깊은 곳에서 치솟는 뜨거운 수치를 호연은 외면했다. 찬물을 한 번 더 삼키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뜨거운 녹차 물이…….
이 뜨거운 녹차 물이…….
간신히 식힌 속을, 모든 다짐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 * *
“백 작가!”
높은 음성. 반가워하는 기쁜 호흡. 호연이 허리를 세워 그쪽을 바라보았다.
“나 많이 늦었나?”
미안한 기색 하나 없는 여자의 보폭은 넓고 걸음은 빠른 편이었다. 꽤 멀었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아니요. 얼마 안 기다렸어요.”
호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호연보다 한참 작은 아담한 체구의 중년 여성으로 올려 세팅한 머리칼이 세련되게 잘 어울렸다.
“우리 오랜만이지? 자기는 왜 이렇게 시간이 안 났어?”
저기루, 저기루. 여자가 손을 뻗어 콕콕, 앞을 가리키자 호연이 여자와 걸음을 맞춰 걸었다.
“개강했어요.”
“대학원? 대학원도 개강이 있나?”
호연이 눈을 좁히며 죽을 맞춰주었다.
“대학원생도 사람이에요.”
“아, 그런가?”
호연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여자의 얼굴은 기쁨이 가득했다.
“K 백화점에 웨카 신규 입점한 거 알아? 한국 첫 입점이야.”
여자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발랄함이 있었다.
호연은 그게 익숙한 눈치로 눈을 접어 웃었다.
여자는 호연이 내내 궁금해했던 사람이었다. 대헌제에서 호연의 그림을 매번 구매하는 사람.
그러나 호연의 성격상 바로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호연이 교수의 전시회에 불려 나가 일을 했을 때나 인영의 소개로 몇 번 더 만나보았다.
인영은 떨떠름한 호연의 어깨를 붙들며 속삭였다.
“아트센터를 차리실 거래. 여러모로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니.”
그 아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든, 아트센터에 그림이 걸리는 것이든.
그로부터 알고 지낸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고, 두어 달에 한 번은 만났다.
여자의 씀씀이로는 푼돈이라고 하나 주기적으로 작품을 구매하니 어쩌면 후원자와 작가의 만남이었고 갑과 을이 명확한 관계였다.
그러므로 호연은 여자를 만나면 본인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명품관 쇼핑 위주의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물론 지루하고 따분하기는 하나, 허울만 북두 그룹의 일원인 호연에게는 별세계(別世界)였다.
그런 별세계 속에 북두 그룹이 있으니 언젠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자기야, 지난번에 선물은 잘했어?”
상념에 잠겨 있던 호연이 느리게 대답했다.
“커프스 링크요?”
“응. 그러고 보니까 자기가 누구 선물 사는 거 처음이었네?”
그날도 여자와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남자의 커프스 링크를 살 생각도 못 했겠지.
“마음에 든대?”
그러나 세정이 그 커프스 링크를 하고 나온 걸 본 적이 없었다.
“네, 좋아하셨어요.”
그런데도 호연은 거짓말을 하며 웃었다.
같이 골라준 성의가 있지 않나. 그 덕에 그 밤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날들을 갖게 되지 않았나.
“좋아했구나.”
여자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걸음을 마저 옮겼다.
지잉―
핸드폰 진동음이 들렸다.
호연은 핸드백을 열어 핸드폰을 꺼내었다. 너무 늦게 확인했나, 전화가 끊어졌다.
호연은 최근 기록 속 여자의 이름, 오은선 바로 위에 쌓인 번호를 보았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마침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