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어디 아프니? 얼굴이 빨갛네.”
교은은 식당에 그릇을 닦으러 온 호연의 얼굴을 살피곤 물었다.
“아니에요. 안 아파요. 괜찮아요.”
대답을 세 번이나?
행동도 유난스러웠다.
교은은 호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호연은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다가 툭, 그릇을 놓쳐 떨어트리더니 이내 깨트렸다.
“어! 죄송해요, 원장님!”
호연은 얼른 다리를 접어 앉아 손을 뻗었다.
“맨손이잖아! 손대지 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를 제지한 교은이 한가득 걱정을 담아 물었다.
“아, 네. 아뇨. 아…….”
만류에도 그릇의 큰 조각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린 호연이 푹, 한숨을 쉬었다. 곧 그마저도 교은에게 빼앗기자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진짜 어디 아파?”
“더위 먹었나 봐요.”
“호연아, 지금 봄이야.”
“그래두요…….”
교은은 호연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이렇게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앤데.
교은은 신문지에 깨진 그릇 조각을 옮기며 조심스레 물었다.
“점심도 안 먹고……. 무슨 일 있었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이유가 뭐야, 원장님 알고 싶어.”
“……아니……. 북두 그룹 봉사단 말이에요.”
“응. 말해.”
“날짜 지정하고 온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있는 걸 알고 왔다는 말이니까.
“아니, 내가 지정했는데? 맞춰주신 거야. 왜?”
아니라고?
반쯤 확신하고 물은 말이었다. 창피함에 배가 조여들었다. 목덜미로 열이 번지는 것 같았다.
“왜에?”
“……빗자루 가져올게요.”
불현듯 벌떡 일어난 호연이 대답을 회피했다.
호연은 교은이 궁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보육원 내에서 남자와 섹스를 한 사실이 못내 찔린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어디 있지.”
애써 생각을 비워내는데 원래 빗자루가 있던 곳에 없었다.
호연은 신발장을 지나 놀이방으로 닿았다. 어질러진 놀이방을 두리번거리는데,
“여기로 던져 봐.”
내내 귓가로 재생되던 남자의 낮은 음성이 실제로 들렸다.
비록 간헐적으로 끊어지던 신음이 더 생생하지만…….
생각하니 다시 가슴 언저리로 열이 울컥, 오르는 것 같았다. 턱 아래 얇은 살들이 남자의 손길을 기억하고 자르르, 떨렸다.
분명 싫지는 않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섹스를 했다는 게 짐승과 다를 것도 없다, 참.
호연은 세정의 음성이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크게 난 창밖으로 남자와 영주가 있었다.
둘 다 한 손에는 야구 글러브를 끼우고 영주는 야구공까지 든 채였다.
체육대회도 참여하기 싫다고 교은을 잔뜩 할퀴고 때렸다던 영주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던져 보라니까.”
“제대로―, 못…… 던지면, 어떡해요?”
조심성이 가득한 물음에 남자도 씩, 웃었다.
“다 잡아줄게.”
그러곤 글러브를 살짝 흔들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영주가 공을 홱, 던졌다. 영주의 말마따나 아무렇게나 날아간 공이었다.
그리고 그걸 또 남자가 잡았다.
눈을 꼭 감고 있던 영주가 가늘게 눈을 뜨자 남자는 글러브를 펼쳐 잡은 공을 보여주었다.
“와아!”
감탄한 영주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잡는댔잖아, 애기야. 이번에는 네가 잡아.”
남자가 영주에게 공을 던져주었다. 아이의 수준에 맞게 약하지만 정확하게 던져진 공이었으나 영주의 글러브에는 들어가지 않고 떨어졌다.
“괜찮아.”
세정은 바로 울상이 된 영주에게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호연은 그 평화로운 장면을 조용히 보다가 몸을 굽혀 창 아래로 앉았다.
계속해서 영주와 세정의 말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아이를 잘 키울 것 같다.
호연은 세정이 돌아온 이후로 꼬박꼬박 먹고 있는 피임약을 떠올렸다.
오늘도 콘돔 없이 했었지.
세정은 아이를 원한다고 했지만, 호연은 아니었다.
나는 온전한 엄마의 사랑을 주지 못할 거야.
호연은 그런 마음이 속에 늘 내재 되어 있었다.
또한 이혼하게 된다면 제 뜻과는 관계없이 아이는 세정이 데려가게 될 테다.
남자는 아이를 몹시 잘 키울 것 같지만,
“아이를 가지면 끝나나?”
“……그런 게 아니에요.”
“차라리 그렇다고 해요. 자식이라면 나도 필요하거든.”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밖에 대우하지 않을 것이라는 남자의 어투.
진실로 남자의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사랑받지 못할 아이를 차라리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
그게 호연이 가진 모성애였다.
“휴…….”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의 눈빛과 입을 맞출 때의 눈빛이 정말 달랐는데.
호연은 저를 원했던 눈빛 속에 강요라고는 없던 세정을 떠올렸다.
“자꾸 왜 이러는 거야.”
진짜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중인 걸까?
아니라면 왜 남자의 긍정적인 면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될까.
남자는 협조하라는 말 한 번에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는 건가.
다행이어야 마땅한 일인데,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도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본인의 마음을 알고 있을 남자가 부러웠다.
내 마음은 전혀 모르겠는데.
남자만큼 나이가 차오르면 알게 될까.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행동을, 마음을 바꿀 수가 있게 되나.
“호연아! 빗자루 가져온다더니 여기서 뭐 하는……!”
교은이 벽에 기댄 채 가만히 상념에 젖어 있던 호연을 부르며 들어왔다.
호연을 바라보며 들려 있던 눈썹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리고 창밖의 세정을 보고 맑게 웃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영주 놀아주고 계셨구나? 곧 단체 사진 찍으셔야죠?”
황급히 몸을 일으킨 호연의 뒤로 쏟아지는 교은의 음성이었다. 세정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네.”
호연은 제 뒤통수로 느껴지는 세정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못, 찾았어요!”
그러곤 부리나케 놀이방을 빠져나갔다.
교은은 잠시간 넋이 나간 채로 호연의 흔적을 눈으로 더듬었다.
피식, 세정이 작게 웃는 소리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토록 아름다운 남자가 있나.
새삼 놀라운 얼굴이었다.
* * *
“기 이사, 회장님 안 말릴 거야?”
휘영은 소파에 앉은 청재를 보았다.
집무실을 받게 된 지 고작 일주일. 이곳의 주인이 자신인지, 청재일지 헷갈릴 정도로 청재가 뻔질나게 들락거리고 있었다.
“뭘 말려.”
귀찮다는 듯 대꾸한 휘영은 청재가 핑계 삼아 가져온 서류를 넘겨보았다.
하등 쓸모없는 것들.
“말려야지. 당연히 말려야지. 회장님은 기독교 신자인데 도사님이라니, 굿이라니?”
휘영이 눈썹을 모으며 다시 서류를 밀어두었다. 업무를 넘겨받은 지도 일주일인데 신기할 정도로 일이 없었다.
이건 뭐 고의로 일을 빼돌리고 있다고 봐야겠지.
누가?
기세정이.
휘영은 인터넷 창을 켜 기세정의 이름을 검색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소라 얘기에 고개 숙여 웃던 세정이 떠올랐다.
“씨발 새끼…….”
“나?”
자리에서 튀어 오른 청재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휘영은 대답 대신 화면에 뜬 세정의 프로필사진을 노려보았다.
출생과 소속, 은선과 사윤 그리고 휘영이 포함되지 않은 가족란, 학력 아래로 이어지는 경력.
기세정을 군 면제로 이끌었던 콩쿠르 이력.
다시 한번 확인하는 가족란, 소라의 이름.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휘영이라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분명 처음에는 세정에게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수치를 알았다.
제 모친인 은선이 세정의 모친인 소희의 가슴앓이를 시켰다는 것도 알고, 그 죽음에 일조했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세정만 보면 설설 기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던 분위기도 있었다. 본디 북두 그룹의 주인. 적자와 사생아. 그를 가르는 지배자의 아우라, 그런 게 세정에게는 있었다.
본능적으로 눈을 깔고, 자리를 피하고, 두려워했다. 무심한 눈빛 아래, 그가 제 자리에 올라서게 되면 은선과 사윤 그리고 저는 쫓겨나갈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엎드려 살았다. 은선이 그러지 않았으니, 오만하게 굴었으니, 앞으로도 방자하게 굴 테니 휘영은 눈치를 배우고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납작한 삶을 안쓰러워한 것인지, 한규는 휘영을 유학 보낼 때 세정과 다른 나라로 보내주었다.
기실, 차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타고난 지배자와 그 아래 수족이 될 애를 같이 둘 수는 없었겠지. 그 사실을 앎에도 휘영은 좋았다. 그 무서운 형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좋았고. 제가 갈 나라에 있는 소라가 좋았다.
소라는 세정과 달리 온화하고 다정한 성정이었으므로 처음부터 휘영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불같은 성미에 일을 치는 은선과 철모르고 날뛰는 사윤 사이에서 고통받던 휘영을 친누나처럼 감쌌다.
동양인 차별을 하는 백인 놈들과 흠씬 치고받고 있을 때 그 순한 소라가 뻐킹! 하고 욕을 하던 순간을 휘영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소라가 죽었다.
소라를 죽였다.
누가?
기세정이.
기세정이 기소라를 죽였다.
동복 남매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소라의 모습도 충격적인데, 그 애처로운 고백에 그게, 뭐. 짜증스럽게 대꾸하던 세정의 싸늘한 말은 더…….
그리고 다음 날에 소라가 죽었을 때는.
세정은 두려운 차기 지배자가 아니라, 언젠가 목을 잘라내야 하는 괴물 같아 보였다.
선이 선명하므로 악은 분명했다.
세정이 편안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씨발 방법이……. 일 하나도 내 손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뭘 어떻게 해.
거절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북두 홈푸드에 있을 때는 골 때리는 엿을 먹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대놓고 업무에서 배제당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한다.
“기 이사님아……. 내 말 듣고 있어?”
“닥쳐 봐, 좀!”
조심히 물어오는 청재에게 신경질을 부린 휘영이 스크롤을 내렸다.
“이건 또 뭐야.”
[북두 그룹 기세정 전무, 강원도 산불 피해 복구에 기부 이어 사내 봉사단 이끌고 보육원 봉사까지]
“별 지랄을 다 하네.”
소파에 움츠러들었던 청재가 살금살금 다가와 휘영과 같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와이프도 같이 갔네?”
“와이프?”
휘영이 힐끗, 청재를 올려다보았다.
“아, 이래서 보육원 봉사를 갔구나.”
청재는 손가락으로 호연의 얼굴을 가리켰다.
사진의 정중앙에 있는 세정과 그 끝에 간신히 담긴 여자.
둘이 부부라고?
“공식 석상에 몇 번 안 데리고 왔긴 해. 근데 나는 봤거든, 결혼식장이랑 소라 기일, 회장님 환갑잔치.”
휘영은 전부 참석하지 않은 행사였다.
‘정확히는 초대받지 못한’이지만.
“아까 했던 말은 뭐야?”
“어?”
청재는 제가 했던 말을 되짚었다.
“아, 이래서 보육원 봉사를 갔구나?”
“그거 뭔데.”
“별 건 아니고. 뜬소문 중 하나인데 맞는 건가, 싶어서.”
“뭐냐고.”
“와이프가 보육원 출신 입양아라던데? 엔마트 백 대표 양딸이래. 급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져서 헛소문이 돌았나 했더니, 진짠가 보네.”
가만히 손가락을 꼽으며 시간을 가늠하던 청재가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이혼 소식이 없네? 이 년 꽉 채운 것 같은데. 정착하나?”
정착하나?
그 말이 타오르는 휘영의 가슴으로 기름을 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