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37화 (37/98)

제37화

천사보육원과 북두 그룹.

영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정확히 부조화했다.

“이거 언제 끝나요?”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호연은 테이블을 치우다 말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100M 달리기를 마친 아이들의 손목에 순위대로 도장을 찍어주던 원주였다.

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고 있었다.

“점심이랑 계주 남았어요.”

호연은 테이블의 쓰레기를 봉투에 집어넣으며 답했다.

“오래도 하네요, 정말. 하…….”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음성이었다.

원주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이내 의자에 앉을 것처럼 주변을 살피더니 흙 범벅이 된 의자를 보고는 팔짱을 끼고 정원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점심을 먹으러 사라진 정원은 고요했다.

원주는 반쯤 마신 페트병을 테이블 위에 대충 내려놓으며 물었다.

“점심은 뭔데요?”

“국수요. 치킨도 있고. 가서 드세요. 고생 많이 하셨는데.”

“아아.”

싫은 티를 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주는 한석에 비해서 열심이었다.

“됐어요. 시끄러운 건 질색이야. 여기가 딱이네요. 덥지도 않고.”

그러곤 힐끗, 천막을 올려다보았다.

한석은 내내 이곳에 앉아 있었다. 원주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라도 하듯이 툭툭, 발을 까딱거리면서.

“그쪽은 뭐……. 선생님인가? 누나랬으니까 여기 출신?”

문득, 호연을 돌아본 원주가 물었다.

원주는 내내 이런 게 궁금했다.

이곳에서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는 어린 여자. 왠지 눈길이 가는 이상한 분위기를 가진 예쁜 여자. 어느 순간, 세정이 바라보는 것 같던 여린 여자.

“네.”

호연은 원주가 저를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했다. 대답이 조금 더 수월했다.

“연예인이라도 해요?”

“아뇨.”

“입양됐어요?”

묻는 원주의 표정에는 악의랄 게 없었다. 또한 호연도 감출 생각이 없었다. 멈칫했던 호연이 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네, 뭐…….”

“잘됐네. 성공했네요. 장하다?”

그러나 이런 말 탓에 속에서 올라오는 쓴물은 적응이 안 됐다.

호연은 대답 없이 행주를 들어 테이블을 닦았다.

원주는 경험해본 적도 없는 세계였다. 부정 채용이 발각되고 부친인 한석의 연대 책임만 아니었더라면 오지 않았을 봉사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란 말야?

원주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호연을 품평하듯 뜯어보다 물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잘 모르겠네요.”

호연은 원주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이에 눈을 가늘게 뜨고 호연을 뜯어보던 원주가 쩝, 입소리를 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일순, 입꼬리가 홱, 올라갔다.

“오빠!”

정원의 울타리를 열고 들어오는 세정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부는 바람에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세정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 밥은?”

원주가 성큼성큼, 천막 밖으로 나와 살갑게 물었다.

“가서 먹어.”

세정은 가볍게 고갯짓하며 문 쪽을 가리켰다.

“으응? 왜에? 같이 가자.”

어릴 때만 해도 곧잘 놀아주던 친척 오빠였다. 이따금 공식 자리에 팔짱을 끼게도 해줘 저를 기세등등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원주는 손을 뻗어 세정의 소매 끝자락을 잡았다.

“가.”

그를 세정이 살짝 털어내었다.

원주는 이맛살을 살짝 구겼다. 그러곤 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세정의 시선이 닿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 끝이 또 저 여자였다. 아니, 여자를 향한 세정의 시선은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었다.

“오빠 결혼하지 않았어?”

“했어.”

“근데…….”

“그래서.”

“…….”

“어쩌라고, 원주야.”

완벽한 무시.

섬뜩하리만치 무심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세정은 굳어 있는 원주를 가볍게 지났다. 그러곤 행주를 쥐고 있는 호연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체육 대회를 도우며 이래저래 생채기가 난 손이었다.

그를 세정이 말없이 내려다보는데 호연의 손이 조금씩 곱아들었다. 쌕쌕, 같은 곳을 닦아대던 손도 천천히 멈추었다.

그때쯤 얼이 빠진 채로 서 있던 원주가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정원을 빠져나갔다.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그를 눈에 담고서야 호연은 먼저 말문을 텄다.

행주를 멀리 밀어두고 천천히 허리를 세우며 애써 웃는 얼굴이 제가 생각해도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웠다.

전부 세정을 속이기 위한 표정인데, 그는 속을 뻔히 아는 사람처럼 씩, 웃었다.

“백호연 씨한테 내가 보고를 해야 해요?”

“……아, 아뇨.”

호연이 말을 더듬었다.

세정이 방금까지 행주를 쥐고 있던 손을 스스럼없이 잡아 올린 탓이었다.

“생각보다 손을 막 쓰네.”

들어 올린 손을 뒤집어 본 세정이 낮게 혀를 찼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이 나 있었다. 날카로운 곳에 쓸려 살이 파인 곳도 여럿 보였다.

“이 정도로 다치기도 어렵겠는데.”

세정은 다시 눈을 내려 호연을 보았다.

“손이 더러워요.”

호연은 그게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천사보육원의 모습이나 순박한 아이들, 소박한 행사 그리고 그곳의 출신인 자신이 아니라, 이까짓 손의 상처가 창피했다.

네 몸도 하나 챙기지 못하면서.

그리 타박하는 것 같은 세정의 눈빛이 불편했다.

호연은 손을 빼내었다.

정확히는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힘주어 단단히 쥐고 있는 손아귀에서 손을 뺄 수가 없었다.

“기세정 씨, 손 좀…….”

호연은 제 등 뒤로 난 창을 보았다. 이곳은 복도를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훤히 보일 공간이었다.

그 초조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세정은 마찬가지로 호연의 뒤를 넘겨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호연이 바투 다가온 세정의 얼굴에 움찔했다. 얼굴에 묻은 장난기가 낯설었다.

“손 좀 잡고 있으면 안 되나?”

호연은 그 말이 황당했다.

“이게 손을 잡는 거예요?”

잡아당기는 거에 가까운데?

“기세정 씨는 손을 이렇게 잡아요?”

“네.”

어이없는 긍정.

호연은 고개 돌려 실소를 터트렸다. 그를 보는 세정의 표정은 담담했다.

“놔주세요.”

“싫은데.”

남자가 다시 한번 힘을 주어 잡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떻게든 저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못된 심보라면 완벽히 성공이다. 호연은 창문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천사보육원은 가족 단위 봉사가 불가능해요.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러워하니까요. 그런데 왜 원장님이 허락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모습은 안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족이라는 게 이쪽?”

세정이 문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석과 원주를 자신과 묶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쪽도 있긴 하지만……. 호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기세정 씨랑 저요.”

착각인가.

호연은 세정의 얼굴에서 미소를 본 것 같았다.

“그러면 이렇게 할까.”

그리고 이어지는 행위에 정신을 빼앗겼다.

맞잡은 손이 천천히 내려가나 싶더니 테이블로 엎어졌다. 제 손 위를 남자의 손이 돔처럼 감싸고 있는 모양새였다.

차라리 손의 상처가 보이지 않아서 수치가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어찌 됐든 창 안에서는 이상하게 손을 잡은 모양이 보이지 않는다지만…….

“아니, 기세정 씨는 이게 손잡는 거예요?”

다시 얼굴과 얼굴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다. 세정이 장난기가 묻은 어투로 대꾸했다.

“응.”

호연은 이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세정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떨구며 물었다.

“혹시 제가 또 뭔가 기세정 씨 마음에 안 들 짓을 했어요? 저 지금 또 벌 받는 거예요?”

“찔리는 게 있나.”

세정은 씩 웃었다. 호연의 붉어진 귓불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비스듬히 두어 호연의 분주한 동공을 살폈다.

호연은 세정의 시선을 가늠하지도 못할 만큼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아, 역시 남자는 상대하기가 어렵다. 무슨 말을 물어도 어떤 저의가 들어 있는지 도통 짐작이 안 됐다.

정말 제게 벌을 주려고 그랬던 게 맞을까.

집무실에서의 입맞춤도 잠든 것에 대한 벌. 그렇다면 지금은.

“……아!”

호연이 눈을 들었다.

“아?”

“가족. 기세정 씨랑 저를 가족이라고 한 게.”

“나는 그거 좋았어요.”

호연이 눈을 깜박깜박했다. 제가 들은 게 맞는 건가, 싶어서. 구태여 되물었다.

“네?”

“좋았다고. 백호연 씨랑 가족으로 묶였던 거.”

“어…….”

진심 같다.

호연은 남자의 선선한 웃음에 섞인 말이 꽤 진심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슴이 떨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미친 듯이 뛰고 있으니까. 부정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러나, 이 남자가.

나를 역겹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제는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두 개의 눈빛이 전부 너무나도 진심 같은데…….

나는 왜 오늘을 믿고 싶을까.

호연은 다른 손을 남자에게 보이지 않게 꽉 쥐었다.

들릴 것 같다. 들릴 것 같았다. 호흡에 심박이 새어 나올까 봐, 뱉지 못한 말을 혀로 굴렸다.

호연은 간신히 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을 조절하며 내뱉었다.

“그러면 제가 잘못한 건 뭘까요.”

“글쎄. 협조하라며.”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할 건지, 누구랑 친한지,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나와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해 주세요.”

순간, 입술이 닿았다. 눌렀던 숨이 남자의 입 안으로 터져 나왔다. 동시에 차츰 느려지던 심박이 다시 제어를 잃고 빨라졌다. 심장이 박살 날 것 같았다.

차라리 강압적이기라도 했으면.

다시금 드는 찌릿함에 호연이 혀를 떨었다. 그를 부드럽게 문지르는 남자의 혀가 있었다.

그처럼 입맞춤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호연의 손등 위로 올려진 세정의 손이 둥글게 말렸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돋아난 뼈를, 힘주어 솟아난 핏줄을 약하게 쓰다듬었다.

“흐…….”

“난 지금 하고 싶어요.”

“…….”

“백호연 씨는?”

집에서 해요, 따위의 선택권은 없는 물음이었다.

* * *

공간을 메운 공기는 남녀의 결합으로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았다.

“응! 으흐……. 아. 아, 아!”

빠드득, 쳐올리는 힘에 밀려 창문을 짚은 호연의 손이 미끄러졌다. 그리고도 쾅쾅, 이어지는 충격에 팔이 점점 굽었다. 뺨에 맞닿은 창이 차가웠다. 소스라친 호연의 몸으로 힘이 들어갔다.

“씹…….”

가장 안쪽을 푹, 찔렀을 때였다. 느닷없이 강하게 조여오는 감각에 세정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내벽의 모양이 성기가 박힌 그대로 입을 다문 것 같았다. 이토록 틈 없이 맞물릴 수가 있나. 도망치듯 허리를 물리는 세정의 성기를 따라 찐득한 소리가 났다.

“흐으…….”

소스라치게 느린 움직임이었다. 터져나갈 듯 부푼 성기의 핏줄이 내벽에 난 굴곡들을 긁는 감각에 호연이 길게 신음했다.

아래가 텅 비어버리는 느낌. 원래 하나였던 것도 아닌데, 오래 하나였던 것 같은 지독한 상실감. 가느다랗게 숨을 틔워내는 호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세정은 갈라진 틈으로 들락날락하는 검붉은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살과 살이 부딪쳐 연한 분홍이 돌기 시작한 엉덩이 아래로 혼탁한 애액이 덕지덕지 묻은 게 색정적이었다.

호연은 고개를 돌린 채 하얀 숨을 그리듯이 토해냈다. 창이 깨어질 듯 어깨를 쿵쿵, 박아댔다. 자극을 버티려는지 불안한 손끝이 몇 번이고 손톱을 세웠다가 허무하게 펴졌다.

그 마르고 작은 손에 솟아오르는 뼈대가 이상하게도 자극적이었다. 이에 세정이 다시 한번 부드럽게 안쪽을 깊숙이 들쑤셨다. 아흑, 엉덩이로, 그 아래 뻗은 다리로 맞닿는 뜨거운 몸에 호연의 무릎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내 확, 주저앉았다.

“아, 흐……! 안, 되겠, 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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