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빠르게 들어오던 신원이 멈칫, 멈추었다.
“전무…….”
사그라드는 부름이었다.
버거운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호연에게는 불분명하게 들렸다.
신원도 듣지 않았으나 들리는 듯했다.
‘나가’라는 두 글자가.
여자를 집어삼키듯이 거칠게 물어대는 세정의 모습이 늘 정적이던 모습과 달라 이질감이 들었다. 작살에 꿰인 듯 퍼덕이다가 이내 죽은 것처럼 순응하는 호연의 태도는 또 어떻고.
신원은 도망치듯 뒷걸음질로 걸었다. 최대한 조심히, 조용히 인기척을 지웠다.
달칵, 다시 문이 닫혔다.
그게 어떤 스위치와도 같다.
입맞춤이 깊이 흘렀다. 조이듯 말려드는 입술과 그를 얇게 펴고 누르는 혀가 쉴 틈 없이 엉겼다. 반항을 거부한 여자의 입 안쪽 여린 살들은 탄력이 좋아 아무리 밀어내도 다시 혀를 감싸 새로운 자극을 안겼다.
그리고 그따위의 것보다 강한 자극이 되는 건,
“기, 흐으……. 세정 씨…….”
낱낱이 부수어지는 이름 사이로 끼는 호연의 벅찬 숨소리였다.
* * *
휘영은 지겨웠다. 권태한 표정으로 제 앞으로 놓이는 톳 돌솥 밥을 보았다. 작은 종지에는 간을 할 양념장이 있고, 무생채와 굴비, 미나리전과 말간 된장국이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정갈하고도 정성을 들인 찬들을 보는데도 입맛이 돌지 않고 모든 것이 무감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제 모친, 은선 탓이었다.
“우리 아드님, 엄마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렸는데……. 오라고 몇 번이나 그랬어, 엄마가.”
몇 년 만에 봐도 변하질 않네.
휘영은 그리 착잡하고,
몇 년 만에 봐도 어쩜 저리 무심할까.
은선은 이리 서운하다.
한규가 휘영까지 불러들여 식사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제가 밥상에 앉아 은근히 휘영의 이야기를 꺼내고 재롱과도 같은 성과를 늘여놓지 않았다면, 휘영의 존재는 진작 잊었을 남자였다.
“우리 귀한 아드님은 엄마 마음을 어쩜 이리도 몰라줄까.”
속이 상하고 까맣게 썩었다. 혼인 신고도 해주질 않는 남자의 옆에서 체면도 모른 척하고 산 것은 오로지 휘영 탓이었다. 북두 그룹을 안겨주려고.
제가 한규 곁에 소희보다 더 오랜 세월을 머물렀는데, 언젠가는 저를 가엾게 여겨줄 것 같아서.
“귀국한 김에 다른 집 구하지 말구, 본가로 다시 들어와아……. 응? 얼굴을 자주 보여야 회장님도 정이 가고, 말도 붙여보고, 그러다가 남자들만의 이야기도 하는 거 아니겠어?”
은선이 휘영의 눈치를 살피며 간곡히 회유했다.
그런 은선의 음험한 속내를 알기 때문에 휘영은 싫었다.
“아드니임. 우리 아드님! 으응?”
은선은 곧이라도 울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휘영은 금방이라도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입매에 힘을 주고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휘영은 한규가 저를 본사로 불러 요직에 앉힌다고 했을 때도 세정의 조력자 역할 혹은 자극을 주려는 의도 말고는 없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다.
사생아와 적자의 구분을 가장 정확히 하는 사람이 한규인데, 저라도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지. 주제를 알고 살아야지, 되뇐 덕이었다.
“어제도 술 드셨어요?”
휘영은 얼굴을 바싹 들이민 은선을 보며 물었다. 급히 손목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는 은선의 행동이 분주했다.
“어어……? 냄새나?”
“많이요.”
“어머, 어떡해. 강 여사!”
은선은 곤란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강 여사를 찾는 버릇이 있었다. 설령 강 여사가 무언가를 해결해주지 못해도, 그저 소리 내 불러보는 것이다.
이를 아는 강 여사는 맞은편 상차림을 하다 말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 사모님.”
“나, 방에 좀 가봐야겠어. 회장님 오시면 말 좀 전해주고.”
“네.”
은선이 급히 다이닝룸을 뛰어나갔다. 그 철없는 모습에 휘영은 목이 탔다.
“물 한 잔만 주세요.”
“네, 가져다드릴게요.”
여전하시네요, 여전하세요.
휘영과 눈빛을 주고받은 강 여사가 싱겁게 웃었다. 물컵을 받은 휘영도 따라서 헛웃음이 샜다.
천진하다고 할까. 독하다고 할까. 보통의 정신 상태로는 버틸 수 없는 삶을 견뎌내려면 저 정도로 얼이 빠지는 걸까.
“잘 주무셨어요?”
그 웃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고 말았다.
“전 잘 잤고요.”
여유로운 어투로 사용인들에게 안부를 건넨 세정이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세정은 이미 와 앉아 있는 휘영을 쓱, 보더니 밀려난 흔적이 있는 은선의 의자도 보았다. 그러곤 뛰어간 은선의 궤적을 더듬듯이 살폈다.
세정과 휘영은 각각 제 모친을 닮아, 다른 얼굴이었다. 미인인 세정과 미남인 휘영은 그림체가 사뭇 달랐다. 세정은 세필로 섬세하게, 휘영은 펜으로 거칠게 그려낸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몸이 길쭉하고 탄탄한 것만은 비슷했다. 키는 세정이 조금 더 클까. 우열을 가른다면 취향에 따라 갈리는 문제였다.
적막은 길지 않아, 울리는 진동음에 세정은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대었다.
“네, 고모님.”
이틈 미술관장이자 세정의 고모인 윤진이었다.
―너무 이른 시간인가?
“이제 아침 먹으려고요.”
피식, 웃는데 한규가 들어왔다. 세정은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고 잘 주무셨어요, 했다.
한규는 세정의 인사를 먼저, 휘영의 인사를 다음으로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한국에 돌아온 거 축하한다.”
세정의 앞길에 방해가 될까 봐, 유배 보내듯 네덜란드로 쫓아내던 게 생생한데,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양 서글서글 웃는 한규에게도 휘영은 이제 웃을 수 있었다.
그 꼴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세정이 전화에 귀 기울였다.
―전화 안 돼?
“됩니다.”
윤진이 어떤 일 때문에 전화를 했는지 알았다. 그리 간단히 끝날 전화도 아니기에 세정은 몸을 일으켰다. 다이닝룸을 나와 거실까지 걸었다.
―얼른 얘기하고 끊어야겠구나?
“그래 주시면 아침 식기 전에 먹고요.”
―빨리 말하고 끊으라는 얘기로 들리네.
“설마요.”
―북두 소장전 소식 들었어.
기 씨 일가 중에서도 겨우 몇 명만 드나들 수 있는 미술품 수장고를 여는 일은, 한규가 싫어했다. 하여 ‘북두 소장전’은 윤진의 오랜 꿈으로만 머물러 왔는데, 그런 한규를 설득해 그녀에게 넘겨준 사람이 세정이었다.
그것도 수장고에 들어가 직접 작품들을 고르고 기획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주었다.
북두 문화재단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윤진에게는 세상 어떤 것도 비교가 안 되는 커다란 선물이었다.
수장고는 언제 방문할 수 있을지, 몇 점 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묻는 대화가 이어졌다. 답변을 들을수록 밝아지는 윤진의 음성이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어 세정은 여러 번 웃었다.
“끊을게요.”
―응. 아침 맛있게 잘 먹고.
전화를 끊자, 인기척이 들렸다. 세정은 발을 반쯤 틀었다. 곧바로 은선과 눈이 마주쳤다. 치마를 붙잡고 급한 걸음을 걷던 은선의 걸음이 더 급해졌다.
겁내는 걸음이었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세정은 모든 게 무상하게 지나가는데 자신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벽을 돌아보았다.
소희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바다에 빠져 죽기를 실패하고 돌아오던 날에 그린 고덕준 작가 <심해>의 모작이었다.
목이 졸렸다.
아버지는 알까. 당신 앞에서 엄마는 참 많이 죽었다는 걸.
모르겠지. 모르니까, 모르니까……. 당신은 사방에 엄마의 죽음을 걸어놓고 살 수 있는 거야. 나는 시선이 닿을 때마다 삶에 염증이 나는데.
세정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그려낸 심해 속에 갇혀 꼼짝할 수도 없는 기분이다.
어떠한 선택들이 나를 묶여 있도록 했나. 나는 어디, 어느 순간에 묶여있어 자꾸 돌아보게 되나.
어머니가 죽던 날. 그리하여 사생아들과 상간녀가 집에 발을 디디던 날. 소라가 저를 붙잡고 고백하던 날. 소라가 죽던 날. 피아노 대신 손을 부수었던 날.
모든 게 최선이었으며 최악이었던 순간들이 필름처럼 스쳤다.
멀미가 났다. 울렁거리는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소라가 죽은 후로는 더 그랬다. 세정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안녕하세요, 형님.”
의외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 * *
소라의 오랜 약혼자였던 청재는 한규에게 있어 소라를 대신한 자식에 가까웠다.
소라의 기일 외 가족 행사가 있는 날이면 휘영과 사윤, 은선은 초대하지 않아도 청재만은 빼놓지 않으므로 그 각별함을 알 수 있었다. 또 소라가 죽자, 특별히 북두 리테일에 자리를 마련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취급이 사생아들보다 좋았다.
“회장님,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휘영은 양념장을 덜어 톳 돌솥 밥에 쓱쓱, 비벼가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 보이나?”
“네, 회장님. 오늘 되게 좋아 보이세요.”
서글서글한 성격의 청재가 엄지까지 치켜세웠다.
으음, 한규가 입매를 비틀며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좋진 않은데.”
청재가 엄지를 내리며 멋쩍게 입맛을 다셨다.
은선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숨겨 휘영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괜한 말을 왜 해서.
그리 눈빛을 쏘아대는데, 제가 어떤 말을 하든 한규가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지 않는 건 유구한 일이었다. 왜 모를까.
휘영은 은선의 손을 툭, 떨쳐내며 밥을 한 수저 크게 떴다.
“소라가 꿈에 나와서 그런가.”
한규를 제한 모두의 수저가 정지했다.
한규가 소라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혹여 잊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의식적으로 꺼내지 않던 이름.
기일 때나마 존재를 잊지는 않았구나, 싶었는데…….
“소라가…… 왜요?”
은선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로 물었다.
아직도 잊지 못한 전처의 자식. 은선은 그리 생각하고. 휘영은 사납게 눈을 들어 세정을 노려보고. 청재는 둔탁한 무기에 두들겨 맞은 양 잠시간 두 눈에 초점을 잃었다.
“제 꿈엔 한 번도 안 나오고 아버지 꿈에만 나오네요.”
가장 먼저 다시 수저를 움직이는 세정은 담담했다. 휘영은 그런 세정이 파렴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널 원체 좋아했는데…….”
한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련하게 회상했다.
소라를 생각할 때는 늘 이런 표정이었다. 살아 있을 적에나 잘하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세정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휘영이 보고 있단 걸 알아도 감출 수가 없는 웃음이었다.
그를 보지 못한 한규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먼 곳을 내다보면서,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멍한 구석이 있는 어투로 말했다.
“소라가 꿈에 나온 뒤로 마음이 안 좋아. 애가 계속 우는데 깨고 나서도 잊히지 않는 게 영 께름칙해.”
다시 한번 모두가 수저를 멈추었다.
“우, 울어요?”
청재가 놀라, 말을 더듬어가며 물었다. 그에 한규가 입맛이 없다는 양 거푸 물을 들이켜다가 말했다.
“그래서 용한 도사를 한번 만나볼까 하는데.”
“……어머.”
이게 무슨 씨발, 개소리야.
세정은 어이없는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규의 뒤편으로 크게 박힌 십자가가 유독 커다랗게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