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34화 (34/98)

제34화

“난 괜찮은데 백호연 씨는 조금 아픈 것 같아서.”

교통(絞痛)이 있었다. 몇 번이고 쥐어진 가슴이 그랬고. 꼬리뼈 주위에는 둔탁한 것으로 치는 듯한 통증이, 앉을 때는 뼈가 부러져 살을 아프게 쿡, 찌르는 통증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 그게 성교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남녀 간의 관계에 무지하다고 하나 이 정도는 알았다.

남자는 거칠긴 해도 침대 매너가 좋은 편이었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잠자리를 가질 때도 비참함을 안겨주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보다는 몸이 다정한 편이라고.

호텔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남자가 떠나고 없어 빈자리를 보게 되었지만, 그가 신청해 두었을 룸서비스를 들이며 생각한 바였다.

그러므로 가슴을 쥐어짜는 손버릇만. 그것만.

호연은 뽀얀 사골국으로 두었던 시선을 올려 세정을 보았다.

“기세정 씨는 좋았어요?”

흐음, 소리를 뱉은 남자가 몸을 뒤로 젖히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구체적으로?”

그 정도가 뭐가 어렵겠다는 양 물었다. 호연은 아연한 표정을 숨기고 끄덕였다.

느긋하도록 살짝 치켜 올라간 검은자위 아래로 흰자위가 드러났다. 명백한 삼백안이었다.

“혀 질은 쓸모가 없고.”

호연은 손끝부터 온몸의 모든 선단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손질은 글쎄……. 딱히 받아본 적이 없고.”

겨우 이불만 쥐락펴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건 당신이잖아.

파르르, 몸이 떨렸다. 그를 확인한 세정이 씩, 웃으며 물었다.

“더 할까요?”

온몸을 끌로 긁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호연은 손끝을 주워 담듯이 주먹을 쥐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선을 여러 번 고쳐 데려오지만, 계속 도망갔다. 가까스로, 아주 힘겹게 말을 뱉었다.

“……하세요.”

“안 할래.”

변덕이다. 남자가 두 손을 낮게 들어 올리며 그만하겠다고 했다. 그 모습에 호연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힘주어 발음했다.

“하세요.”

“싫은데? 백호연 씨 지금 표정이 어떤 줄 알아요?”

어떤데요, 묻기 전에 세정이 상체를 기울여왔다. 순식간에 입을 맞출 것처럼 가까워진 거리에서 호연의 손끝을 잡아 올렸다.

“이래, 지금.”

그리고 호연이 제 얼굴을 더듬도록 했다. 숨을 제어하지 못하고 일그러진 얼굴을 가늠하게 했다.

“이런데 내가 무슨 말을 더해요.”

붙잡힌 손가락의 굴곡이 꼭 맞는다. 남자의 마디마디 굽어지는 곳마다 제 손가락이 따라서 굽었다.

그러나 손바닥의 크기 차이가 너무나도 나서 세정의 손에 호연이 기댄 것처럼 보였다.

호연은 표정을 지웠다. 세정의 손에서 제 손을 쉽게 빼내었다. 그만큼 느슨하게 잡고 있던 남자의 손에서 느낄 수 있는 온기란 없었다.

“싫다는 말씀이네요.”

호연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세정이 허공에 머물러 있던 손을, 테이블 위로 드리웠던 상체를 천천히 거둬갔다.

“제가 어떤 노력을 하면 좋을지 말씀을 해주셨으면 해요.”

남자와의 관계는 도통 모르는 것의 연쇄였다.

“전 기세정 씨를 좋아하니까요.”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고,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고 키스 한 번 해본 적 없고……. 더한 것은 상상도 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냅다 몸을 바쳤는데, 그것도 남자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면. 그게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지점과도 같다면.

남자에게서 웃는 소리가 났다.

응?

호연은 눈을 들었다.

“누가 싫대.”

응?

“난 괜찮았다니까.”

“쓸모가 없다고 그러셨잖아요.”

쓸모가 없다는 건 별로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다 식어 빠진 사골국을 세정이 도로 가져갔다.

“배워요, 나한테.”

그를 남자가 들이켜 마시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대로 나한테 써먹어요.”

깨끗하게 빈 뚜껑에 다시 보온병을 기울여 사골국을 채워 내밀었다. 펄펄 김이 퍼졌다.

“난 백호연 씨한테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니까.”

호연은 등줄기가 찌릿했다.

“쉬울 거야.”

세정은 테이블에 놓인 호연의 손끝을 끌어 뚜껑을 감싸 쥐게 했다.

“백호연 씨한테 나는 쉬운 남자잖아요.”

세정의 손에서는 느낄 수 없던 온기가 여기 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까불지.”

애초에 진정한 사랑 따위는 바라지 말라는 양, 그저 위장된 사랑만을 느끼라는 양, 그렇다.

“먹어요.”

그게 선을 긋는 것 같다.

호연은 뚜껑을 반 바퀴 돌렸다. 남자의 입술이 닿았던 것이 이쯤. 그곳에 입을 맞추고 마셨다. 남자를 바라보다가 끝내 눈꺼풀을 내리고 한 번에, 끝까지.

뜨거웠다. 식도가 타오르는 것처럼, 불길이 내리는 것처럼. 실밥이 뜯어지듯 살이 벌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을 참자 잠시간 눈앞이 흐려졌다. 맥박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었다.

호연은 뚜껑을 내려놓고 잠시간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 몸 깊은 곳으로 넉넉히 퍼지는 열을 가눌 수 있을 때까지만.

그러나 북받치는 뜨거운 날숨은 소리를 동반하여,

“……그러면요.”

선을 넘게 한다.

“저한테도 관심을 좀 가져주세요.”

세정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할 건지, 누구랑 친한지,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나와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해 주세요.”

이어지는 말에 남자는 눈매를 구겼다.

호연은 제 입 밖으로 철렁철렁, 떨어지는 불길을 진압하지 않았다.

“믿어주실 거면.”

믿는 척할 것이면.

호연은 눈을 떴다. 똑바로 마주하는 눈이 불길을 머금었다.

“협조도 해주세요.”

장단을 제대로 맞추라고.

“제가 헷갈리지 않게.”

내가 헷갈리지 않게.

그러므로 이 관계는 불바다가 된다.

* * *

호연은 졸고 있었다.

아랫입술이라도 진탕 빨 것처럼 분위기를 위태롭게 당기던 호연은 금세 느슨하게 풀어졌다.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요.”

“지금? 나 바빠요.”

“그러면…… 여기 있어도 돼요?”

“될 것 같아요?”

백호연은 안 될 건 뭐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었지.

그래, 이 공간의 주인은 나니까 안 될 건 없는데.

그래서 못 할 것도 없는데.

제가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당신을 취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가 없다는 건 아는지.

“백호연 씨.”

호연은 몸을 감싼 셔츠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세정을 한순간에 등신으로 만들었다.

“잔다고.”

호연은 소파 등받이로 볼이 찌그러질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그 꼴이 가관인데.

“말이 되나.”

세정은 헛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가가서 본 백호연의 숙면은 정말……. 가관이었다.

“누구는 등신처럼 세우고 앉아 있었는데.”

들으라는 듯 말하지만, 호연은 눈 하나 찡그리는 일이 없었다.

“진짜 자요?”

세정은 그 앞에 편히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테이블 아래로 얌전하게 모인 호연의 발을 툭툭, 약하게 건드렸다.

탁,

이내 발끝에 걸리는 게 있어 고개를 꺾어보면 호연의 손가락에서 떨어진 연필이었다.

여자의 손가락은 아직도 연필을 잡은 것처럼 굽어 있었다.

세정은 연필을 툭, 가볍게 걷어찼다. 데구루루, 구른 연필이 소파 아래로 깊이 들어갔다.

세정은 다리를 접고 허리를 굽혀 낑낑거리며 소파 아래를 더듬거릴 호연을 떠올렸다.

이상하게 백호연은 괴롭혀주고 싶다.

괴롭히려면 아주 못되게 괴롭히면 되는데 이런 식으로 사소한 것을 자극해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고 싶은 건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진짜 자네.”

세정은 팔을 뻗어 테이블에 엎드렸다. 호연을 빤히 응시했다.

늘 경계를 드리웠던 얼굴이 무방비하게 순해져 있었다.

불쑥 치밀어 내내 묵직하던 하복부, 그보다 더 아래로 몰린 힘이 풀렸다. 온몸에 피가 도는 감각을 느꼈다.

세정은 드러누운 그대로 호연이 그림을 그리던 종이를 낮게 들어 올렸다.

그저 스케치에 불과한 그림의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이따금 오래도록 고이던 시선. 눈을 들면 홱, 휘발되던 시선.

시선이 주섬주섬 모인 집약체가 제 얼굴이라니. 이 익숙한 필치라니.

세정은 풀어진 얼굴로 한숨을 내뱉듯 웃었다.

왜 몰랐을까.

수연이 리스트업한 작가 중에 호연이 있었다는 걸.

작품과 작품 사이 공백에 호연이 떠오른 게 아니라 그냥 그 작품이 호연의 그림이었다는 걸 왜 몰랐지.

신원에게서 다시 받아본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 레퍼런스에는 호연의 작품이 버젓이 있었다. 기가 찼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이걸 모를 수가 있었나, 싶다.

그만큼 여자의 마티에르는 독특했다.

물을 많이 섞어 은은하고 서정적이다가 끝을 눌러 성질을 낸 생동감이 돋보이는 수채화. 짓뭉개졌다가도 거칠게 솟아 역동적이고 묵직한데도 속도감이 줄지 않아 차가운 감상을 일으키는 유화.

세정은 종이를 두 번 접어 바지 주머니로 넣었다. 눈을 감고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백호연이 가진 것을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하던가.

그걸 축복이라고 하던가, 저주라고 하던가.

기어코 발현되어 한 사람의 삶을 온통 그것이 아니면 안 되게 만드는 재능을 축복이라고 하던가. 저주라고 하던가.

세정은 주먹을 쥐었다가 풀고 다시 쥐었다가 풀었다.

왜 제게는 저주였나.

손가락 감각이 둔해졌다. 묘한 일이지. 백호연의 재능을 마주하는 순간이면 늘 이렇게 됐다.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 제 것이 아닌 것 같고 저린 통증이 유발되고.

이내 망치를 들고 건반 대신 손가락을 타건했던 그 여름 정원 위에 서게 된다.

기세정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수만 번도 했던 유일한 원망이 웃음이 되어 잇새를 튀어나왔다.

이딴 생각 안 하고 살려고 했는데……. 안 하고 살고 싶은 사람인데, 그게 난데.

세정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평온하게 잠든 호연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사람을 이렇게 빡돌게 하고는 지나치게 태연하잖아, 백호연은.

속말처럼 중얼거렸다.

“괘씸한 백호연.”

하필이면 은선과 수법이 똑같아서 괘씸한 백호연.

“존나 짜증 나는 백호연.”

좆될 것 같은 예감을 한시도 지워주지 않아서 존나 짜증 나는 백호연.

“불쌍한 백호연.”

그러면서도 호연을 기만했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기만하는 관계였다.

본인이 그런 방법으로 날 붙잡고 싶다는데. 나는 잡힌 척, 넘어트려야지.

세정은 손을 뻗어 늘어진 호연의 팔을 잡아당겼다. 맥없이 쏟아지는 호연의 어깨를 안전하게 그러쥐고 끌어와 입을 맞췄다.

뭉글뭉글하고 탄성이 좋은 입술을 쭉 빨아올렸다. 아, 차마 뱉지 않은 낮은 탄식이 있었다. 언젠가 버릴 백호연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촉감을, 환희를 여자의 그림처럼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막연한 무력감을 겪는다.

이게 좆될 것 같은 예감의 근원이었던가.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호연은 입술이 빨리자, 형용할 수 없는 쾌감에 몸을 비틀었다. 세정은 그를 놓아주질 않았다. 말을 하려고 움직이는 호연의 혀를 강하게 옭아매고 입안을 휘저었다.

이미 좆됐다.

백호연이 나의 영원한 저주를 상기시키듯, 나 또한 여자의 영원한 저주가 되어볼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정에게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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