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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33화 (33/98)

제33화

“혹시, 한수연 팀장님……?”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은은한 피아노 연주곡이 깔린 카페였다. 노트북 속으로 빨려들 듯 몸을 기울였던 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백호연 작가님?”

“네. 백호연입니다.”

차분한 어투. 그와 어울리는 하야말간 인상.

놀랍도록 화풍과 흡사한 분위기.

수연이 몸을 들어 맞은편 의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편하게 앉으세요. 음료는…….”

“아, 시켰어요. 잠시만요.”

진동하는 진동벨을 살짝 흔들어 보인 호연이 의자에 가방만 내려놓고 다시 카운터로 걸어갔다. 수연은 정직하게 떨어지는 단정한 원피스부터 호연의 뒷모습을 쭉, 훑어보았다.

문득, 프로젝트의 성공 예감이 눈앞으로 터지는 듯했다. 전년도와 비슷한 컨셉으로 가야만 한다는 팀원들을 설득한 작품의 작가는 그렇게 생겼다.

섬세하게,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그려낸 작품들. 감상하는 사람으로 하여 물도 아닌 안개에 젖는 것처럼 후회의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작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돌아온 호연은 예쁜 미소를 지으며 수연의 앞에 앉았다. 잠시간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나 싶더니, 떨어지지 않는 수연의 시선에 민망함이 섞인 얼굴이었다.

“제가 사 드려야 하는데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호연이 가볍게 손사래 쳤다. 빙긋이 웃은 수연이 손을 내밀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북두 백화점 VMD 팀장 한수연입니다.”

그 손을 호연이 맞잡았다.

대화는 곧장 본론을 파고들었다.

“정확히는 이 작품. 이 작품이에요. 작가님과 함께 작업하고 싶어진 작품.”

호연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수연이 내미는 자료를 살폈다.

거실 벽에 걸어두었던 <아몬드 나무>의 연작이었다.

아몬드 나무에 가려졌던 강 너머를 배경으로 젖은 사슴을 그린 작품.

아, 이 그림이구나.

세정이 내리라고도, 다시 그대로 두라고도 했던 작품의 연작.

“기진 갤러리 상설 전시 보러 인사동까지 찾아갔는데 작가님 작품은 다 판매가 되었더라고요. 들어보니 거기에 무대 연출에도 참여하시고. 그것도 여기.”

호연이 기진 갤러리에 소속된 지 이 년이 되었다. 대학원을 다니며 주기적으로 그림을 납품하고 또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는 했다.

그리고 공개된 작품 대부분이 수연이 챙겨온 자료 속에 있었다. 아카이브에 정리된 것부터 아직 업데이트되지 않은 것들까지. 혹시나 해 아카이빙해 두었던 데생들까지.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다.

그런데…….

왜 세정의 앞에서는 그토록 부끄러웠을까.

왜 급하게 달려갔을까.

왜 남자가 그림을 보지 못하도록 막았을까.

호연은 목이 타 커피를 여러 번 마셨다.

결국 자꾸 세정을 떠오르게 하는 아몬드 나무 연작을 볼 수가 없어 손을 내밀어 가렸다. 그러자 수연은 호연의 손을 잡아주었다. 곧 제 품으로 당기며 간절하게 눈썹을 휘었다.

“이렇게 바쁜 작가님을 보고, 제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으세요?”

호연은 붙잡힌 손을 잡아당겨 보지만 수연이 놔주질 않았다. 머릿속을 더듬거려 대답을 완성했다.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겠다?”

수연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정도로 갈무리될 생각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듯이.

“아니에요. 그건 기진 갤러리에 연락하면 되는 일인데요. ……그냥, 그냥! ……엿 됐다? 상스러운 말 너무 죄송해요. 근데 그때 제 기분은……. 대체할 말이 없어요.”

수연은 불쌍한 강아지처럼 구구절절 고생담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호연은 이쯤 정말 죄송하지만, 일정이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려 했다.

일정이 안 되는 것만 아니라, 혹여 세정의 아내라는 게 밝혀진다면 문제가 될 것도 같아서.

그러나 말할 새가 없었다. 수연은 손을 놔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설령 일정이 안 된다고 하셔도 한 번쯤은 꼭 뵙고 싶다. 갤러리 측에 생떼를 부렸어요, 제가. 인터뷰라도 하고 싶다. 자문이라도 구하고 싶다고.”

수연은 무례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이리 말하니 기진 갤러리의 담당자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수연의 소속은 북두 문화재단을, 이틈 미술관을 안고 있는 북두 그룹이니까.

“이미 일정 안 되는 거 압니다. 그래도 한 번만. 딱 한 번만, 말만 한 번만……! 그러지 않으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아서요.”

열렬한 에너지에 호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근데, 이 작품들만 좀…….”

“네?”

“좀 치워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그보다 손이 하얗게 질렸는데…….”

창백하게 늘어진 호연의 손을 확인한 수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그 손을 놓는 찰나에,

“사모님.”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네?”

호연이 반사적으로 몸을 젖혔다.

신원이었다.

“전무님께서 뵙고 가시라고…….”

다시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수연의 반지가 아프게 살을 짓눌렀다.

* * *

“한수연 팀장이랑 같이 있다고요.”

“네.”

높낮이가 애매한 물음이었다. 신원은 습관처럼 왼손 약지를 매만지며 답했다. 어딘가 평정을 잃은 듯 공허한 어투였다. 세정이 펜을 놓고 물끄러미 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상념에 잠겨 있었다.

“북두 백화점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 관련 서류 다 올려주시고.”

“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눈을 고쳐 뜨며 여느 때와 같이 곧게 대답했다.

“그리고 백호연 씨 오면 바로 들여보내…….”

세정이 말을 멈추었다. 눈을 맞춘 채 고개를 삐딱하게 내렸다.

“안녕하세요.”

여자치고는 낮은 음성.

묘하게 짜증이 어리는 세정의 눈을 본 신원이 뒤를 돌았다.

집무실로 들이라는 세정의 말을 진작 전해 받은 비서진들이 호연을 들인 거였다.

호연은 붙잡혀 온 것처럼 몸을 움츠린 채였다.

신원은 다시 한번 호연에게 인사를 건네고서 다시 세정을 보았다.

“나가 보세요.”

“네, 말씀 주신 건 바로 올릴까요?”

“네.”

건성으로 대답한 세정이 책상 귀퉁이에 밀어놓은 보온병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호연 씨는 앉으시고.”

호연은 입 모양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멀어지는 신원의 손가락을 눈에 담았다.

보온병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호연은 소파를 돌아 세정을 마주 보고 앉았다.

세정의 느긋한 눈길이 호연의 얼굴부터 테이블 아래 감춰진 발목까지 흘렀다.

호연은 간밤의 일이 생각나 몸을 움찔거렸다.

온통 까만 시야로 번뜩이는 빛이 보이던 새벽.

이어지는 짜릿한 통증에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세정은 그 새벽의 느슨함을 닮은 얼굴로 물었다.

“왜 그냥 가요? 왔으면 보고 가지.”

“다시 오려고 했어요.”

“내가 왜 뒷전일까.”

“뒷전이 아니라 선약이…….”

“왔다 가면 내가 기다리잖아요.”

“…….”

“처음부터 오질 말지.”

정말 기다린 적도 없으면서.

이 남자는 꼭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다음부터는 그럴게요.”

갚듯 중의적인 대답에 세정이 웃었다.

“그래요.”

뭘 다음부터 그러냐고, 다시 물을 줄 알았는데.

오되, 자신만 보러 오라는 말인가. 아니면 아예 오지 말라는 뜻인가.

호연이 약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선약은 한수연 팀장?”

“네.”

호연은 신원이 들렀다 갔으니 이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더 묻는 말이 없었다.

“한수연 팀장님이 제가 기세정 씨 아내인 걸 아셨어요.”

카페로 세정의 비서인 신원이 찾아왔고, 세정을 보고 가라는 말까지 전했다. 그 순간, 모조리 들켰다.

호연은 짐짓 심각한데 세정은 어쩌라고, 말하듯 잔웃음을 쳤다.

“애초에 난 숨길 생각 없었는데?”

“저도 동기들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그럼 됐네요. 그런데 왜요?”

“한수연 팀장님이 북두 백화점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를 제안하셨어요.”

“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낮은 음조로 반응했다. 호연은 땀이 밴 손을 비볐다.

“아는데도, 함께 해주었으면 한대요. 저도 하고 싶어요.”

신원의 등장에 잠시간 당혹스러워하던 수연은 곧 제가 선약이라고 찍어 눌렀다. 그 상대가 기세정이라고 한들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수연이 내어놓은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보수도 좋았고, 다양한 직업군이 협업하는 프로젝트라는 점도 좋았다. 실험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어떤 협업보다 더 큰 경력을 차지하게 될 북두 그룹과의 한 줄이었다.

언제가 되든 남자와 이혼하게 되면 어떻게든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니까.

그러나 기세정, 하나가 마음에 쓰였다.

진작 끝났어야 하는 계약 결혼을 우겨 연장한 것부터 민폐라, 더 불편한 상황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최소한의 양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할게요.”

염치를 모르는 척 굴었지만, 모르지 않았으므로.

“네, 그러면 하지 마세요.”

“……네?”

“농담.”

“네?”

호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볼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세정이 짧게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신원이 다시 들어왔다. 그는 세정에게 각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서류를 건네주고 돌아나갔다.

그 사이에 호연이 기다리는 대답은 없었다. 세정은 손에 들린 서류를 살필 뿐이었다.

무시인가?

“기세정 씨.”

속으로 발음했나. 다시 목을 틔워 이름을 불렀다.

“세정 씨?”

“그거 말고.”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던 남자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거 말고 뭐가 있어?

“……기 상무님?”

“나 상무예요?”

세정은 이토록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러곤 서류를 엎어두고 엄지를 꺾어 제 명패가 있는 쪽을 가리키는데,

“아…….”

문득, 부평댁이, 신원이 남자를 전무님이라고 불렀던 게 떠올랐다.

“승진하셨어요?”

“백호연 씨는 나를 좋아한다면서 나한테는 관심이 없네요?”

관심이 없는 것을 타박하는 말이 아니었다. 증명하겠다고 하고는 사소한 것부터 기어이 어긋나고 마는 애정의 일 원칙을 지적하는 거였다.

“하고 싶은 건 허락받지 말고 해요.”

세정은 손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보온병을 집었다. 뚜껑을 돌려 열고 사골국을 붓는 것을 보며 호연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 타이밍을 다시 세정이 빼앗았다.

“말했잖아요.”

“…….”

“나를 충분히 이용하라고. 그건 이혼 전까지 유효해요.”

시간은 간다.

이혼 전까지 유효한 시간은 백 일. 아니, 그마저도 며칠이 지났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남자는 기회를 주었다. 왜 자신을 뒷전으로 두냐고도 했고, 기다린다고도 했다. 거기서 대답이 중요했는데. 조금만, 조금만 신경 썼어도 남자가 전무가 된 것을 모를 수가 없었는데. ……진짜 바보야?

호연은 아랫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이혼했다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서 잘라내진 않으니까.”

굳은 호연의 얼굴을 확인한 세정이 웃었다. 뚜껑에 반쯤 채운 사골국을 호연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먹어요.”

호연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사골국은 세정이 유성채에 머물 적에 아침을 대신하던 거라고, 부평댁이 그랬다.

북두 그룹 사내 카페에서 약속이 있던 호연이 심부름꾼을 자처한 것이고.

그러니 이 사골국의 주인은 세정이라는 말이다.

“아주머니께서 기세정 씨 드리라고 하셨어요.”

호연은 다시 밀어주었다.

“그걸 나는 백호연 씨 주는 거고.”

세정은 다시 호연의 앞으로 놓아주었다. 호연은 아직도 김이 올라오는 사골국을 보았다.

“왜요?”

“약하니까?”

“……네?”

“부서질 것 같으니까?”

이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살을 좀 찌워볼까요.”

길쭉한 입꼬리가 만드는 호선에, 호연은 이제 알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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