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30화 (30/98)

제30화

“아닌데요.”

아닐 리가.

세정은 호연을 빤히 보았다. 호연은 금방 발톱을 숨겼다. 얼마 견디지 못하고 툭 떨어지는 시선에 세정은 웃지도 않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세정이 네, 응답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커피 두 잔을 내려온 동현은 묘한 적막감에 숨을 죽였다.

의아하다. 여자의 연한 얼굴은 오랜 시간 기다려 화가 난 것 같지 않고 남자는 무심한 얼굴은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기야, 제 상사가 무언가에 미안해할 유형의 사람이었던가.

“고맙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동현은 묵례하는 것으로 천천히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그때 세정이 물었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화났는데?”

장난스러움이 묻은 음성에 동현의 걸음이 맥연히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부부의 날것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저들만이 공유하는 세상이 어느 순간, 확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화 안 났어요.”

문이 열리고,

“그래요, 화 안 났다 치고.”

닫혔다.

“백호연 씨가 왜 왔을까.”

짚이는 게 있다는 얼굴이었다. 세정은 커피를 마실 생각은 없는 듯 손잡이를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호연의 시야 끝으로 출렁출렁, 검은 물이 곧이라도 넘칠 듯 위태로웠다. 이내 남자가 재미없다는 듯 손을 떼도 파동은 이어졌다.

남자의 목소리가 잠잠한 허공을 갈랐다.

“눈에 힘 빼요. 아니라면서 뭘 자꾸 노려봐.”

어느샌가 다가온 세정의 손이 작게 말린 호연의 주먹을 톡톡, 쳤다.

이에 호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숨겼다.

세정의 표정이 잠시간 굳었다가 이내 풀어지고 호연의 어깨너머를 턱짓했다.

“곧 수장고로 갈 그림인데 진짜 줄까요? 그럼 화 푸나?”

호연은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손등을 다른 쪽 손으로 문지르며 다시 그림을 보았다.

내가 정말 화가 났나?

사뭇 결연한 얼굴일 수는 있겠다. 그런데 그게 화난 것처럼 보이나? 제 얼굴이 지금 화난 얼굴인가.

그리하여 남자가 제 화를 풀어주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제가 화를 냈으면 하는 건가. 어떤 반응이 정답인 걸까. 어째서 몇 번을 화났다고 하라는 걸까.

<먹튀 금지>

네 글자가 적힌 카드를 보고 잠시간 낯이 달아오를 정도로 수치스러웠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처지를 잊고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던 것도.

그러나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엔마트를 들어 세정에게 걸어봄 직한 딜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호연은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만져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어 멍하니 그림을 보았다. 생각은 다른 쪽으로 흘렀다.

갖고 싶은 그림인 것은 맞다. 누구든 가지고 싶지 않을까.

호연은 애써 그림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선이 계속 구석으로 떨어졌다.

저게…….

어딘가 이상했다. 눈을 좁히고 한참 들여다봤다. 곧 알아차렸다.

“……괜찮아요.”

세정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왜?”

“위작이잖아요.”

“모작이지.”

“…….”

“우리 엄마는 나 안 속였거든.”

엄마? 죽었다는 모친?

세정은 눈을 내리깔고 크게 웃었다.

호연은 허탈한 기분이었다.

애초에 줄 마음도 없었잖아. 내가 돈이 필요한 건지, 아닌지 재보려는 시험이었잖아.

호연은 세정이 작정하고 저를 속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리지널을 갖고 있다는 게 너무 당연해 의심조차 하지 않고 경이롭게 감상했다는 부끄러움이 뒤늦게 밀려 들어왔다.

“이번에는 진짜 화났나?”

사람이 좁아지는 기분을 느낀다. 바싹 말리는 것 같은 감각.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 목을 조르는 화법. 호연은 이를 악물었다. 간지러운 목을 의식하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아니요.”

“알겠어요. 저녁은?”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그러면서도 호연은 곱게 대답했다.

“아직이요.”

“나도 식전인데.”

동시에 깨달았다. 남자는 자꾸 저를 시험해볼 것이라는 사실을. 제가 원하는 답을 유도할 것이라는 사실을.

걸어봄 직한 딜?

그딴 건 필요 없는 것이다. 저는 고백을 했던 것처럼 그저 세정을 사랑하면 된다.

사랑하면…….

호연은 속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에 참을 수 없이 기침했다.

* * *

달채, 지난번과 같이 연못이 보이는 룸이었다.

호연은 이 년 전도, 지금도 이곳에 남자와 앉아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그날은 이따금 남자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순간이었으므로, 더욱.

한가로이 창밖을 내다보는 남자의 머리칼이 밤바람에 어지러이 흐트러지는 모습과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로 가늠되던 웃음.

돌이켜보면 그날이 가장 다정했다. 저를 아주 어리게 볼 적에, 그리하여 저를 안지 않았던 시절에.

그때와 달라진 것은 남자와 저를 정의하는 단어뿐만이 아니었다. 관계는 더 얼어붙었고 남자는 더 알 수 없어졌다. 여전한 것은 물고기가 있을지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

다만 그때도, 지금도 참을 따름이었다.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남자는 차가운 음식 위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정갈하게 차려진 초밥을 집어 입 안에 넣고 조용히 씹었다.

호연은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으나 남자가 먹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배가 고파졌다. 그가 그다지 먹음직스럽게 먹는 편도 아닌데.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요.”

문득 마주친 두 눈에 남자는 뺨을 문질렀다. 호연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 세정이 호연을 보았다.

호연이 보았던 것보다는 대담하게, 뻔뻔하게.

여자의 내리떠진 눈부터 이어지는 콧대, 우물거리는 입 따위를 유심히 바라본다.

본디 차가운 게 잘 맞지 않아 뜨거운 장국으로 입안을 달래는 것도. 그리하여 불룩 솟았다가 꺼지는 볼도.

그리고 <오후의 정원>의 모작을 보고 싸늘하게 식던 얼굴까지.

세정은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 웃음에 호연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착각인가.

분명 웃음소리가 들렸는데.

호연은 창밖을 내다보는 남자의 마른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식사하면서 딴짓을 하는 건 본 적이 없는 남자이니만큼, 젓가락은 이미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호연이 입술을 열었다.

“이제.”

곧장 말허리를 자른 남자가 이어 말했다.

“호텔로 갈까요, 집으로 갈까요.”

귀를 의심했다.

“네……?”

호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세정은 엄지부터 하나씩 손가락을 펼쳤다.

“화가 나서 온 것도 아니고, 달리 할 말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핑계 만들 시간은 충분히 줬고.”

구부정한 손가락에 호연의 시선이 머물렀다. 살짝 오목하게 휘어져 들어가는 마디마디가 왜인지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

다시 느리게 손을 내린 세정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호연은 세정의 짙고 짙은 눈 안에 다시금 무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정이 입술을 갈랐다.

“난 백호연 씨가 날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해석해볼까 하는데.”

눈을 가득 채운 어둠보다 탁한 색의 음성이었다.

* * *

“호텔이요.”

호연은 그리 대답한 순간부터 계속 후회했다. 차라리 집을 택할 것을.

세정은 파라스 호텔의 주인이었고, 널리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파라스 외에 다른 호텔을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또한 파라스 호텔은 남자를 아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 곳을 제 발로 들어왔다. 직원들의 조아림을 받으며 걷는 길에서 제 우둔함을 탓해도 이미 늦은 거였다.

어쩌면 싫냐는 물음에 좋아요, 라고 대답했을 때부터 잘못된 거겠지. 그를 되짚다 보면 남자와의 첫 만남부터 부정해야 한다.

……그리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파라스 호텔에 북두 그룹 일가를 위한 객실이 있다는 건 유명했다.

그러니까 남자가 언제 체크인을 하든 지금처럼 깨끗하게 비어 있다는 말이다.

세정이 문을 잡은 채로 고개를 까딱했다.

들어온 객실은 순백의 고결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과도 같았다. 통창을 통해 푸른 밤의 빛이 흰 침구 위로 고르게 내렸다.

“씻고 나와요.”

그 다섯 글자가 아니었더라면 아주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은 색감이었다.

* * *

지켜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뜸을 들이고 싶었던 게 맞는 말 아닐까. 호연은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면서 무용한 생각을 흘려보냈다. 그래도 불안정한 심장은 쉴 새 없이 뛰었다.

입고 온 옷을 다시 입어야 하나, 가운만 입어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방은 낮은 조도의 등만을 켜두어 어둡고 고요했다.

멈칫, 호연의 걸음이 멎었다.

그 속에서 세정은 의자에 앉아 와인을 기울였다. 호연의 잔이었다. 멀리서도 인기척을 느낀 걸까.

마찬가지로 가운 차림인 남자는 창을 등진 채 돌아보지 않았다. 느긋하게 잔에 입을 맞추고 혀로 입술을 살짝 쓸었다. 그 붉은 와인에 호연은 지난밤의 남자가 떠올랐다.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손으로 목을 짚어가며 한 걸음 걸었다.

동시에 투둑투둑, 문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그쪽을 내어봤다. 깨끗한 빗소리와는 반대로 세상이 번지고 있었다.

“비 오네요.”

호연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좋아해요?”

고저가 헷갈리게끔 유난히 낮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호연은 울렁거리는 창밖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불규칙한 빗소리에 안정감이 들었다. 박동이 규칙을 찾았다.

이 빗소리가 멀어질까, 호연은 세정에게 다가가는 것 대신 낮은 창틀에 걸터앉았다.

“난 싫은데.”

“왜요?”

대답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남자의 대답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호연은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남자가 제 앞에 가깝게 앉는 것도 모르고.

“내 동생이 비 오는 날 죽었으니까.”

홱, 어깨를 젖혔을 때 남자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내려왔다.

빗소리가 거세진다.

와인 잔을 쥔 남자의 손이 내려갔다. 얇은 와인 잔과 두꺼운 창이 부딪치는 소리로 과민한 신경이 뚝, 분질러졌다.

입맞춤은 그때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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