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29화 (29/98)

제29화

“오늘은…… 오늘은, 여기까지만요.”

호연이 숨을 가누지도 못하고 간신히 내었다. 피비린내가 났다.

“오늘은?”

세정이 찌푸리듯 웃었다. 그 입술로 피가 번졌다. 세정은 호연의 머리칼을 넘겼던 손을 그녀의 어깨 위로 길게 뻗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

장난스러운 어투. 단정하다 못해 균열조차 가지 않은 모습이었다. 경황이 없는 여자를 샅샅이 핥아 보아야겠다는 무언의 눈빛이 호연은 불편했다.

“지금 제가 아직 씻지도 않았고…… 속옷도…….”

왜 이런 말이 나왔나 몰라.

호연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끊었다. 속옷도? 하고 되짚어 묻는 세정의 시선이 헐렁한 티셔츠 안쪽으로 머물렀다.

남자가 고개를 기울인 각도에서는 충분히 가슴을 들여다볼 수 있을 터. 호연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호연은 몸을 살짝 비틀었다. 그때 툭, 남자의 입술에서 드러난 가슴으로 피가 떨어졌다. 동시에 남자의 손도 떼어졌다. 주르륵, 살을 따라 내렸다.

“……짝짝이?”

호연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짝짝이인지, 짝이 맞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열선이 붕대처럼 온몸을 친친 감은 기분이었다. 자각될 정도로 온몸이 절절 끓었다.

“난 상관없는데.”

“…….”

“어차피 벗길 거잖아요.”

어떻게 이런 말을 하고도 태연할 수 있는 걸까.

호연은 잠시간 말을 잃은 채로 큰 눈을 깜박거렸다. 세정의 입술이 시원스레 벌어졌다.

“내려가요.”

그러곤 사뿐히 내려주었다. 호연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 * *

정면의 화면을 두고 U자형 테이블에 앉은 임원들은 삭막한 인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세정의 표정이 가장 무감했다. 북두 백화점 VMD 팀장, 한수연은 영상이 끝나자 두 손을 모아 잡고 다가왔다.

“보신 영상은 작년에 진행했던 북두 백화점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입니다. 당시 상당히 평이 좋아서 올해도 진행해볼까 하는데요.”

북두 백화점 VMD 팀이 올린 연 단위 프로젝트였다.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는 삼 년 전부터 꾸준히 시도해오던 것인데 지방 지점에서나 하던 프로젝트를 본점으로 옮기고 밸런타인데이에 진행하던 것을 연말로 밀자,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세정이 있었다.

“시기는 크리스마스를 정조준할 계획입니다. 또한 이번에는 본점뿐만 아니라 리뉴얼을 마친 압구정점까지 두 지점으로 삼아보려 합니다.”

세정은 기획안을 살펴보았다.

“VMD 팀 내부 회의 결과입니다. 지난해에는 크리스마스 영화를 콘셉트로 잡은 ‘판타스틱 타임’의 역동적인 미디어로 ‘변화하는 북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번에는 정적인 느낌으로 북두만의 세련된 이미지를 구축해보려 합니다. 리스트 업된 작가님들을 확인해 보시면…….”

지난해 번쩍거리는 조명과 화려한 미디어와는 정반대로 가겠다는 계산인데, 먹힐까.

세정은 레퍼런스로 올라온 그림들을 훑어보았다. 그림과 그림 사이 공백으로 문득 호연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쥐고 있던 펜을 검지와 중지로 핑그르르 돌렸다.

사실 이유는 너무 적나라하게 알고 있다.

어제 여자에게 분출하지 못한 욕구가 전신을 타고 올라 눈에 맺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 걸 가져다 놔도 백호연이 떠오르겠지.

그딴 물음은 왜 했을까. 그냥 안았으면 될걸. 그걸 각오한 여자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다니. 쥐새끼 궁지에 몰아놓고 잡아먹힐래, 도망갈래, 쥐보고 고르라는 꼴이지, 이게.

아아, 나가지 않겠다고 고개를 살래살래 젓기를 내심 바랐는지도 모르지. 언젠가 그 바락바락 대드는 성미를 한풀 꺾어놓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으니까.

그런데 상상 속에서 여자에게 가학적인 행위를 일삼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 도망치듯 가는 여자를 봤는데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던 게 증거다.

왜인지 모든 게 따분하게 느껴졌다. 그리 만든 자극적인 장면들이 눈앞으로 지나갔다.

하얀 살갗에 동그란 가슴을 따라 흐르던 핏방울…….

하복부가 굳고 그를 자각한 눈매가 찌그러졌다.

좆같네.

앞에서는 수연이 정적인 이미지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설파했다. 구태여 세정이 묻지 않아도 세정의 옆으로 늘어진 임원들이 수연에게 툭툭, 질문을 던졌다.

그럴 때마다 수연은 잘 정돈된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러다가 세정의 쪽을 보고 일순 확, 눈을 내리깔기도 했다.

“전무님.”

세정은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부름에 고개를 까딱였다. 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음 일정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 여상한 음성에 세정은 새삼 궁금해 본 적 없던 게 궁금해졌다.

서 비서는 어쩌다가 한 팀장과 이혼했을까.

* * *

“웬 장어예요?”

나른히 기지개를 켜며 주방으로 다가온 호연의 눈에 가장 먼저 담긴 것은 장어였다.

“장어만 있게요? 한약도 있어요.”

한약까지?

“그러니까 웬 거예요?”

잠을 한숨도 못 잤다. 눈을 뜨고 있는 동안 세정이 먼저 출근하는 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평댁이 출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자에는 숨을 감추었고 후자에는 방을 나섰다.

아침을 차리는 부평댁의 뒷모습을 보며 호연은 그제야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그마저도 반복해 들려오는 부산스러움에 몸을 일으켰다.

“세정 씨한테 온 선물이에요?”

남자가 귀국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분주하게 쇼핑백을 열어 정리하던 부평댁의 황당한 눈이 호연을 올려다봤다.

“아이고, 전무님이 이런 거 받으시면 잡혀가요.”

“……네?”

“정도경영을 목 터져라, 외치는 기업이라 커피 한 잔도 남한테 안 얻어 마신대요.”

정도경영(正道經營). 세정과 관련한 기사를 스크랩하며 수도 없이 본 단어였다. 그토록 본 걸 왜 잊었을까.

여전히 알딸딸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았다.

찬찬히 이것저것 들여다보았다.

식탁 위에 놓인 장어와 소고기. 의자에 올려진 한약, 아직 쇼핑백에 들어 있는 달콤한 에클레어와 뜬금없는 부추.

호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프다던 자제분 주려고 시키신 거예요?”

부평댁의 아연한 눈이 호연에게 가닿았다.

“이걸 왜 여기로 시켜요? 들고 가기 힘들게. 그리고 이렇게 귀한 걸…….”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 타박 어린 음성을 호연은 깨닫지 못하고 가볍게 되물었다.

“그러면요?”

커스터드크림 에클레어 맛있겠다.

디저트 박스를 보던 호연은 명함판 정도의 카드를 집어 들었다.

“전무님이 사모님 드시라고 보내주신 거죠.”

부평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소녀처럼 웃었다.

고이는 침을 삼키려던 호연이 행동을 멈추었다.

* * *

세정은 북두 그룹을 모기업으로 둔 프로 야구팀, 북두 스타즈의 개막 경기를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실질적 구단주인 세정의 관람이 시사하는 바는 비단 방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년간 하위권을 전전하는 팀에 불어넣는 사기였다.

신원은 뉴스란에 올라온 세정의 얼굴을 확인했다. 잘 나왔다. 못 나올 리도 없는 얼굴이지만.

세정의 관람 승률이 높아서 팬들 사이에서는 세정을 승리 요정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이런 사탄 같은 얼굴이 요정이라니…….

신원은 새삼스럽게 얼굴을 훔쳐보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파라스 부산도 들러야겠는데. 시간이 될까요.”

세정은 최근 리뉴얼을 시작한 파라스 부산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백미러로 마주친 세정의 눈에 신원은 크지 않은 동작으로 풀어진 자세를 고쳤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러곤 태블릿을 들어 일정을 확인했다.

시간이 될까요? 라고 물었으면 시간이 되게끔 만들어야 하는 게 제 일이었다. 신원은 뒤로 미룰 수 있는 일정을 살피려 눈길로 그어 내렸다.

그러다가 전무 비서실의 전동현에게서 온 연락을 확인했다.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 응접실로 모시기는 했는데 어떡할까요?]

갸웃, 세정에게 따로 들은 바는 없었다. 신원은 슬쩍 몸을 돌려 세정을 보았다.

누군가와 시야를 나누지 않는 무소불위 절대 권력을 지닌 남자의 모습이 권태로웠다. 햇살조차도 뚫지 못하는 차 안에서 먼 곳을 조망하는 눈에는 한가득 피곤이 묻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것처럼 느리게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찍어 누르는 손짓은 마치 피아노를 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를 훼방 놓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신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한 음으로만 이어지는 연주는 길지 않았다.

“전무님.”

“네.”

“혹시, 사모님 방문 예정 있으셨습니까?”

금세 저릿해진 손마디를 꾹꾹 누르던 세정의 눈이 물음표를 띠었다.

“회사에?”

“네, 회사요.”

세정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방문하셔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이 여자가 왜 왔을까.

세정의 손가락이 다시 느린 타건을 시작했다.

신원은 잠자코 볼 따름이었다.

한 건반, 한 건반. 세정에게는 모두 다른 소리로 들려왔다. 그게 너무 당연해서 소리라고 자각하지 못할 만큼.

아아, 이내 물음표가 지워졌다. 세정은 여자의 방문 이유를 깨닫고 피식, 웃었다.

“선물이 도착했나 보네.”

“선물……이요?”

신원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호연의 뒤에도 사람을 붙이라고 하던 세정이 아닌가. 제게도 선물을 사 보내라는 지시가 없었는데? 손수 골랐다는 말인가?

언젠가 이러한 웃음을 본 적이 있었는데 언제인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면 바로 본사로 모실까요?”

차를 돌릴지 말지 분위기를 살피는 기사에게 눈짓하던 때였다.

“아니, 부산으로 가죠.”

일자로 상처가 남은 세정의 긴 입술이 기울어졌다.

* * *

응접실 벽면에 크게 걸린 유화는 하그, <오후의 정원>이었다.

기다림은 지루한 일이었으나 매번 미술품의 실물을 확인하는 게 새로워서 넋을 놓았다.

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공적인 공간까지 미술품을 다채롭게 걸어둘 수 있는 기업이라니. 수장고에는 얼마나 많은 미술품을 묻어두고 들여다보는 걸까?

호연은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멀찍이서 <오후의 정원>을 감상했다.

애인인 앨리스의 집을 장식할 그림을 의뢰받아 그린 거랬지.

그러므로 부드러운 기법과 사랑스러운 색채가 무르익어 눈길이 닿는 곳마다 생동감이 넘치는 명작이다.

그 정원에 하그의 딸과 함께 앉아 있는 기분을 느낀다. 위대한 작품은 그런 힘이 있다.

“갖고 싶어요?”

불현듯 들리는 나른한 목소리에 호연이 몸을 젖혔다.

큰 보폭으로 반듯하게 걸어오는 세정은 여느 때보다 더 금욕적인 인상이었다. 이내 의자를 빼고 살짝 비스듬히 앉는 모습이 또 다른 그림의 한 자락 같았다.

“갖고 싶으면 주시기라도 하세요?”

호연은 그게 거슬렸다.

“……삐딱하네?”

세정도 피하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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