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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28화 (28/98)

제28화

다를 게 없다는 대답을 끝으로 남자가 몇 걸음 물러났다. 그만큼 들어서야 하는 걸 알지만, 어쩐지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분명 최선을 다할 거라고 다짐했다. 호연은 민형의 치료만 계속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요량이었다.

하여 온종일 남자의 행적을 잘라 붙인 스크랩북을 계속해 읽었다. 무엇 하나 디밀어볼 게 있을까 봐. 제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까 봐. 남자의 손에 넘어가지 않은 엔마트의 일부 중에 쓸모 있는 게 있을까 봐.

그러나 찾지 못했다.

정말 이게 최선일까. 최선이 이딴 건가? 몸을 팔아 남자의 사리를 흐리게 만드는 게?

이게 맞는 건가. 내가 그럴 수는 있는 사람인가. 남자는 또 기꺼이 그럴 사람인가.

남자는 거짓 사랑 고백에 속지 않았고 단칼에 잘랐다. 그런데 이러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자가 속아주기로 했나? 왜? 엔마트가 필요해졌나?

손바닥 뒤집듯 변해버린 남자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갔다.

“백호연 씨는.”

그러나 저를 부르는 음성 한 번에 자욱한 생각이 밀려 나갔다.

“생각이 너무 많다니까.”

호연이 몇 걸음 더 다가갔다. 세정의 가슴팍을 짚고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근육들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던 세정은 이내 제 목으로 끼치는 숨결에 하, 짧은 헛웃음을 뱉었다.

이런 것도 미혹인가.

짧게 숨을 들이쉬고 뱉는 소리가 고르게 번졌다.

“술…… 드셨나 해서요…….”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할 발언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호연은 세정에게서 술 냄새가 나지 않자,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찜찜한 표정으로 몸을 내렸다.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하하, 크게 웃던 세정이 표정을 굳혔다.

“나라고 갑작스럽지 않았을까.”

“그건…….”

“믿어 달라면서.”

대답을 고민하던 호연이 입을 꾹 다문다.

그렇지. 이런 거였지. 믿어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관계. 왜냐고 이유를 묻지 않고 속아준다고 하면 그래 달라고 밑도 끝도 없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어야 하는 관계.

“아이를 가지면 끝나나?”

숨이 턱 막혔다.

“……그런 게 아니에요.”

“차라리 그렇다고 해요. 자식이라면 나도 필요하거든.”

호연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릴 만큼 짓씹었다.

“아, 너무 급했나?”

호연은 짙은 모멸감을 느꼈다.

“믿어줄게요.”

그런데도 이건 남자에게서 받아본 적 없는 낯선 호의였다.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렸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었다.

“증명해 봐요. 시간은 얼마나 줄까요.”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

여진의 말마따나 석훈은 유능한 기업인이었다. 북두 그룹이 뒷배가 아니던 시절 횡령 사건 때도 기어이 살아남은. 대기업들이 손을 잡기 전까지는 절대 쓰러트릴 수 없던.

그 모든 고비를 버틴 석훈을 믿어본다.

그러다가 다시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석훈에게만 기대지 않을 것이다. 제 자유도, 민형의 치료도, 천사보육원도 모두 살릴 방법을 찾을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면 며칠이 필요하지? 남자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석훈이 다시 기회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만. 제게 생각할 시간을 좀…….

“백 일……이요.”

“백 일.”

세정이 손목을 들어 올려 시계를 확인했다.

“열두 시가.”

그러곤 손을 돌려 호연에게도 보여주었다.

“지났죠.”

딱 맞물린 시침과 분침이 서서히 벌어졌다.

백 일. 열렬히 사랑할 것이다. 사랑하는 척을 하다 보면 정말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의심이 들 수 없게끔 완벽해질 것이다. 그리고 완벽히 접을 것이다. 완벽히…….

“해봐요.”

세정은 호연의 턱을 검지로 톡, 밀어 올렸다. 자연히 울렁거린 호연의 시야로 세정의 도드라진 목울대가 담겼다.

“어떻게요……?”

“증명은 백호연 씨가 해야지.”

이미 오만한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으면서 시키지는 않겠다는 유유한 태도. 두 손을 살짝 들어 자신은 모르겠다는 얼굴. 그러곤 천천히 물러나 침대에 앉는 권위적인 모습.

호연은 한참을 멀거니 서 있었다.

남자는 호연이 당장 박차고 나간다고 한들 상관없다는 듯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에 상할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가슴이 갈가리 찢겼다. 가슴에 한기가 돌고 쓰라렸다.

호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주먹을 쥐었다가 놓고 원피스를 구겼다가 풀고…….

그러다가 지난 관계를 떠올렸다. 그게 벌써 이 년 전이라고. 이토록 생생한데. 점차 숨이 덥게 느껴지던 무렵에 호연은 작은 입술을 풀어주었다.

마지막이니 모르는 척 안겨볼까, 했던 결혼 직후의 밤이 있었다. 타는 목마름을 견디지 못하고, 저를 미친 듯이 좀 먹는 많은 생각들에 잠식되어, 남자에게 안아달라고 말할까, 고민하던 밤이 있었다.

그때 안겼더라면 지금 남자에게 몸을 비비는 것도 한결 수월했을까.

고쳐 생각한다. 처음을 주었던 남자다. 더 못할 것도 없다고 마음을 긁었다. 오히려 처음이 남자여서 차라리 다행이라며 자신을 위로하지 않았나.

호연은 느린 걸음으로 세정에게 다가갔다. 세정은 물끄러미 호연을 보다가 눈을 내려 피식, 웃었다.

손목시계를 풀고 장난치듯 손에서 굴린다. 철커덕, 철커덕, 하는 소리에 호연의 심장도 덜커덕, 덜커덕, 한 계단씩 추락했다.

벌어진 실내화 그 앞에 가지런한 실내화가 움직임을 그쳤다.

재미없네, 중얼거린 세정은 손장난을 멈췄다. 호연은 그 손목을 끌어 침대로 내렸다. 손에서 미끄러지는 시계를 보던 세정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언젠가 여진이 제게 알려주었던 것들이 귓가로 들렸다.

“응……. 이런 거 싫어하는 남자들 없대. 이런 게 뭐냐구……? 아, 이런 말 해도 되나?”

그래, 여진이 제 신혼집에 초대한 날이었다. 그녀는 눈부시게 새하얀 가구들을 자랑스레 등지고서 소곤댔다.

“안 그럴 줄 알았던 애가 야하게 구는 거.”

“…….”

“내가 그럴 때마다 너무 예뻐서 미쳐 버리겠대.”

살짝 붉어진 뺨으로 올라온 훈기가 낯설게 소름 끼쳤다. 슬쩍, 제 가슴을 내려다보는 여진의 시선을 느끼며 얼마나 진저리 쳤던가.

손을 잘게 떨었다. 실내화를 벗고 맨발로 섰다. 머리끝까지 모든 감각이 삐쭉거렸다. 침을 꼴딱 삼켰다.

세정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 다리를 하나씩 올려 허벅지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부드러운 살과 매끈한 옷감이 스칠 때 그 안으로 뜨거운 것이 가늠되어 옅은 신음이 나왔다. 들쳐진 치맛자락에 드러난 허벅지로 가늠되는 팽만감이 불편했다.

그리고 이제 키스를…… 해야 하는데…….

남자가 고개를 들지 않으므로 각도를 잡기가 어려웠다. 호연은 남자의 턱을 검지로 밀어 올렸다.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세정은 이런 손길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차마 힘을 주지 못하는 손가락의 방향을 짐작하고 고개를 들어주었다. 호연이 무릎을 세워 버티고 있기에 올려다보며 눈을 맞추는 일이 새삼스러웠다.

세정은 무심코 호연의 커다란 동공과 휘늘어진 기다란 속눈썹이 사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몰래 들여다보는 것 같던 화실 속 그림에 매료되는 기분이었다.

그 눈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 패배감에 침몰하게 만드는 그 눈이.

호연은 몇 초 사이에 사납게 짙어지는 세정의 동공을 보았다. 등골이 저릿하게 오싹해지는 감각이 있었다. 학습된 기억이 건너왔다. 이런 눈을 할 때면 놀랍도록 제게 싸늘해지지 않았던가. 곱씹어 봐도 이유를 모르는 순간들이 연쇄되지 않았던가.

호연은 본능적으로 그 눈을 가렸다. 손바닥을 스치는 간지러운 속눈썹의 움직임을 참았다.

그리고 아, 벌어지는 세정의 아랫입술 끝을 물었다. 그때까지도 세정의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호흡이 젖은 입술을 말렸다.

그리하여 더 깊이 탐했다. 마를 새가 없도록 혀를 빨았다. 질척한 소리가 뭉개져서 흘러나왔다.

어딘가가 흥건해지는 것 같은데, 그게 눈인지 살갗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저 노력했다. 미동도 없는 남자를 붙들고 수없이 꿈틀거렸다. 동하라고. 저를 안을 만큼 크게 흔들리라고.

눈빛이 혼탁하게 흐려지는 것을 염원하며 남자의 혀를 비스듬히 쓸었다. 혀와 혀의 수많은 돌기가 맞물렸다가 허무하게 밀리기를 반복하던 때였다.

“읏……!”

세정이 호연의 골반을 잡아당기며 하복부와 하복부가 닿았다. 꿈질거리던 엉덩이가 딱, 그쳤다. 그 소스라치는 감각에 호연이 세정의 입술을 짓씹었다.

힘이 빠진 손이 남자의 눈에서 떨어졌다. 금세 비릿한 피가 꿈틀거리는 혀에 묻어나왔다. 느슨하게 눈을 뜬 남자는 어딘가 흐린 눈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채로 마주 보는 남자는 새삼 너무 가까웠다. 덜컥,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아서 호연은 턱을 당겼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점점이 번진 핏방울이 하나의 선이 되어 남자의 입술로 고였다. 이내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을 당혹스럽게 보고 있을 때였다.

기우뚱 중심을 잃었다.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팔을 뻗지도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지는 모습이 상상돼서 눈을 질끈 감는데…….

굵은 팔뚝이 제 등을 받치고 끌어안았다. 안도감이 닥치기 전에 다시 입술이 빨렸다. 아찔함이 뺨을 후려쳤다.

호연은 다시 눈을 뜰 적에 보았다. 남자의 벌어진 입속으로 보이던 새빨간 혀. 고인 피를 하나도 삼키지 않은 붉음. 고스란히 넘겨지는 비린 맛에 바둥거렸다. 그를 억누르는 세정의 악력에 호연은 몹시 두려워졌다.

고루 번지는 피가 기폭제라도 되는 것처럼 세정은 좀 더 사나웠다. 성난 물건이 선득하게 닿아 있어 그럴까. 알 수 없는 예감이 머리꼭지를 싸하게 스쳤다.

호연은 저를 삼킬 듯한 세정의 앞에서 무력했다. 예민한 살점을 야하게 핥아오는 쾌감 앞에 처참히 바스러지던 찰나였다.

입술이 떼어지고 숨을 쉬는 법 또한 잊어 캑캑거릴 때, 세정은 호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에 꽂아주었다.

“이래서 더 하겠어요?”

터질 것처럼 빠근한 아랫도리와는 상반된 단정한 물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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