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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27화 (27/98)

제27화

결혼을 분기점으로 천사보육원의 방문을 줄였다. 동기들과 어울릴 때도 자주 멍한 상태가 되었다. 이윽고 차마 상태를 꾸며낼 수도 없을 즈음에 천사보육원으로의 방문을 포기했다.

그러나 음성을 가다듬는 일만은, 그 오 분 남짓의 시간만큼은 꾸준히 노력했다.

“많이 안 좋으세요?”

―안 좋을 게 뭐가 있어.

지난번 들여다본 야윈 몸만큼이나 상한 음성이 비틀거리며 섰다. 병원에 가자고 더 강경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다음에는 병원 꼭 같이 가요.”

―가고 있다니까.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러는 거야.

“아니, 입맛이 없는 이유를 알아야죠.”

걱정을 하는 말에도 부정을 뜻하는 얼굴로 빙그르르, 웃던 게 떠올라 답답했다.

―아니야. 민형이는 요즘 괜찮고?

“오빠……. 아, 한국에 들어오기로 했어요.”

―어머! 다행이네.

호연은 활력이 도는 교은의 음성을 들으며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이번에 보는 게 세 번째던가?

“네. 오래 있을 것 같아요.”

대학 졸업을 하고 한 번, 대학원을 다니며 모마 미술관을 방문하러 동기들과 다 같이 한 번. 민형을 보기 위해 그렇게 두 번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잦은 방문은 세정에게도 전해질까 봐, 괜히 쉬쉬하며 짧은 시간 다녀왔다. 그렇게 보니 더욱 애틋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인 밤들이 많았다.

두 눈으로 살아 있는 걸 봐서, 민형의 살고 싶은 의지가 분명해서 덩달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하던 남자의 매몰찬 어투가 떠오른다. 야속했던 싸늘한 눈빛까지도. 그 모든 것에 다시 한번 매몰됨을 느낀다.

제 사정을 고스란히 이야기했어야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 번도 우위를 점한 적 없는 관계에 가장 연한 약점을 보이는 건 안 될 일이니까.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일수록 드러내 보이지 않아야 함을 석훈 탓에 배웠다.

“…….”

이런 배부른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아직은 버틸 만한가 보다.

호연은 허탈하게 웃었다.

―조만간 체육대회 있는데 올 거야?

응? 으응? 길게 되묻는 음성에도 정신은 흐릿했다.

“네에, 갈게요.”

이런 막막한 기분을 느끼는 건 꼭 이 년 만의 일이었다.

* * *

세정의 손에 쥐어진 사진들은 포커 카드 같았다. 다 이기는 게임을 무료히 관조하듯 고고한 태도로 사진을 하나로 모으고 비어 있는 옆자리에 엎었다. 그러곤 톡톡, 허벅지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오은선 씨와 사모님께서 식사 함께하셨습니다.”

은선에게 사람을 붙인 건 오래된 일이었다. 저택 안팎으로 사람을 붙여 감시했다.

유성채에 다 들어갈 뻔한 여자를 꺼내어 분리한 게 어이없게도 호연과 은선은 꽤 자주 만나는 편이었다.

사이 좋은 고부 관계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웃긴 소리지, 그건.

누가 당신 시어머니고, 누가 당신 며느리야.

백호연은 여러모로 찝찝했다.

세정의 지난 결혼 생활에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내비치지 않던 은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호연과 어울려 다닌다. 그 정신 나간 여자가.

거짓 사랑 고백을 하라고 은선이 부추겼을까. 평생을 걸어 얻어낸 것이 고작 휘영 하나뿐이면서 같잖은 조언을 했을까. 그걸 수용했을까.

여자 또한 얻어내고 싶은 것이 결국은 아이 하나와 간신히 빌붙어 사는 유령 같은 삶인 것일까.

세정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네, 전무님.

신원이었다.

“사람 하나 붙이죠.”

―……누구 말씀이십니까?

“백호연.”

내던지듯 핸드폰을 두고서야 짜증을 느꼈다.

넥타이를 살짝 끄르고 꽉 막힌 도로를 응시하던 세정은 문득 자조했다.

미친놈처럼 뭐야.

* * *

세정은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방 앞에 섰다. 비스듬한 자세로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화실인가.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가구나 장식품의 배치나 더 나아가 공간의 정의까지도 호연의 몫이었으므로 세정은 화실의 유무를 알지 못했다. 생각의 확신을 얻기 위해 눈길로 공간을 휘저었다.

여자가 앉아 있었을 의자는 살짝 흐트러진 채로 방문 쪽을 향해 돌아 있었다. 옅게 선만 그어놓은 그림은 또다시,

사슴이다.

밤하늘이 조각조각 밀물지는 낮은 창문과 원목 책상, 그 옆으로 각각 크기가 다른 틀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물감들과 물통, 붓까지도 선반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이처럼 집안은 여자의 손이 탄 흔적이 가득했다.

새벽에 찾아온 사용인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가. 입이 무겁고 별 탈이 없다고 하여 유성채에서 빼 온 사용인은 첫날,

“곧 오신다고 전해 들었어요.”

상냥하게 대답하며 앞치마를 갖춰 입었다.

“사모님이 부지런하고 손이 야무지세요.”

내가 그 여자 부지런하고 손이 야무진 것까지 알아서 뭐 해.

“요리도 곧잘 따라 하세요.”

어쩌라는 걸까. 나이가 들어 입이 가벼워졌나. 물끄러미 보았을 뿐이었다. 사용인이 그 빤한 시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아,

“편의를 많이 봐주셨어요. 저희 애가 아프거든요.”

찔린다는 듯이 말했을 때는 이십여 년간 제 편의를 봐주던 이의 결혼 여부조차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딴 게 무슨 상관이냐. 당연히 결혼했을 것이고 남편이 있을 것이고 자식이 있을 것이란 막연한 것들은 있었다. 그런데 제가 아니라 호연에게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자애를 구했다는 게.

그게 좀 이상하게.

“언제 오셨어요?”

세정은 복도를 걸어오며 말을 붙이는 호연을 응시했다.

호연은 갑작스러운 세정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세정이 올 시간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그러곤 세정이 화실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는지 급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문 앞을 가로막았다.

“보면 안 돼요?”

그래봤자 다 보이는데.

“……그런 건 아닌데.”

호연이 말끝을 흐리며 어깨 너머를 흘깃 바라보았다.

“보여드릴 만한 것도 아니라서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고쳤다.

“거실 벽에 있는 건 보여줄 만한 게 되고?”

호연의 목덜미가 조금 홧홧해졌다. 그 변화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세정은 본인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만 웃었다.

“아주머니가 벽이 너무 허전하다고 하셔서요. 그때쯤 완성하기도 했고……. 내릴까요?”

“내려요.”

“……정말요?”

어차피 오래 머물지도 않을 공간.

“마음대로 해요.”

툭, 스치고 지나간다. 잠시 허탈함이 내려앉았던 호연의 얼굴 위로 말간 웃음이 번졌다가 다시 마르는 것까지 눈에 담았다. 미약한 쾌감 같은 것이 고였다.

“식사는! ……하셨어요?”

여자는 곧 뒤를 따라와 소리 높여 물었다. 당장 멈춰 서도 등과 머리가 부딪치지 않을 만큼. 딱 그 정도의 안전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먹었습니다.”

“아…….”

탄식이 낮게 떨어졌다. 걸음도 멈췄다. 아니, 다시 이어졌다. 멀어지는 걸음. 화실로 가나. 온 신경이 뒤쪽으로 쏠려 있는 기분이 뭣 같았다. 심사가 뒤틀렸다.

얼마나 더 여자를 이 집에 둘 수 있을까. 그 전에 엔마트를 정리하고 싶은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문득,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었다.

“왜 따라…….”

와요.

세정은 예고 없이 돌아보았다.

가슴팍으로 화살처럼 날아와 꽂히는 동그란 머리통이 꽤 단단했다. 세정은 호연을 안은 채로 잠시간 멈췄다. 가슴 아래로 달뜬 숨이 끼치는 게 느껴졌다.

“뭘까, 이건.”

세정은 호연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밀었다. 가볍게 떨쳐진 호연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생경한 표정이었다.

그렇겠지. 안전거리를 유지하던 여자니까, 예상 못 했겠지.

“죄송해요.”

“괜찮은데.”

눈을 들었던 호연은 가까운 데서 저를 내려다보는 세정의 눈을 보고는 다시 내리깔았다. 그러곤 두 손으로 쥐고 달려왔던 것을 보였다.

특별한 무늬랄 게 없는 매끈한 원형 재떨이와 헤리온의 시그니처 무늬가 양각된 커프스 링크였다.

“재떨이랑 커프스 링크인데요.”

“알아요.”

“선물로 드리려고요.”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호연답지 않게 장황했다. 세정이 올 줄 몰라 재떨이를 따로 사놓지 않았다고. 커프스 링크는 오늘 쇼핑을 하는 중에 눈에 보여서 샀다고.

횡설수설하는 호연을 보는 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여자는 좀 전에 제가 신원에게 무슨 말을 꺼냈는지나 알까.

당신에게 사람을 붙이라고 했어, 내가. 과연 이 말을 듣고도 천연하게 식사 여부를 묻고, 선물이랍시고 이런 걸 내밀 수가 있을까.

그러나 말할 생각은 없다.

세정은 커프스 링크를 받고 재떨이는 다시 밀었다. 동그란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세정은 호연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덧붙였다.

“담배는 끊을까 해서요.”

아…….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세정은 방문을 열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이혼을 조금 유예해야 한다는 생각에 뒤를 돌았다.

“이거 말고 준비한 건 또 없어요?”

있으면 들어오고.

세정은 방문을 조금 더 넓게 벌렸다.

여자에게 속아주기 위한 판까지도.

“…….”

“…….”

오랜 눈맞춤이었다. 이내 호연이 한 걸음 내디뎠다. 발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준비한 것.

호연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의도를 잘 섞어 알지 못하게 하던 눈이 보란 듯이 하나의 의미를 만들었다. 분명한 정염이었다.

순간, 목덜미를 스치는 사늘한 게 있었다. 튕기듯 상체를 세우자 남자가 눈앞에 가깝게 있었다.

“…….”

“…….”

세정의 손이 호연의 목 위를 가볍게 눌렀다. 사락사락,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높게 들렸다. 이어서 허리.

목이 시작되는 지점과 머리칼이 떨어지는 지점을 가로지른 작업복의 끈이 풀렸다.

“필요 없는 건 다 벗고 들어올까요.”

허무하게 떨어지는 작업복을 보면서 호연은 어깨에 힘을 주었다.

몸이 가벼워졌는데, 이상하게도 고개가 자꾸 기울었다.

그 꼴을 보며 세정은 무성의하게 툭, 던졌다.

“혹시 원하는 게 아이인가?”

호연은 눈을 홉뜨고 세정을 보았다. 세정은 제 눈을 보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속에 들어앉은 본인을 보는 듯했다.

“사랑이요…….”

“응. 그러니까 아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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