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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26화 (26/98)

제26화

세정은 거실 벽에 걸린 그림을 보았다.

강 너머로 아몬드 나무가 선 경관. 강에 한쪽 발을 빠트린 채로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그림의 바깥쪽을 내다보는 사슴. 그 눈. 목적한 곳으로 친히 걸어왔다.

사슴이 손가락의 마디마디를 밟고 흉터로 남은 실금을 유연하게 피하는 것 같았다.

탁탁, 억지로 이어둔 신경이 늦게나마 반응하며 굽어지고……. 다시 온전히 펴지질 못하고.

그러다가 뼈가 산산조각이 났던 지점을 딛고 서서 크게 한 걸음. 따끔, 깨진 뼈의 조각이 근육과 근육을 휘돌아 불쾌한 통증을 유발했다.

“정말……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요.”

세정은 주먹을 쥐는 것으로 환영 속의 사슴을 압사시켰다.

이 여자에게 진심이란 뭘까. 그 진심이, 그 진심이 가득하다는 눈이 매번 저를 불쾌감에 휩싸이게 둔다는 건 알고 있을까.

세정은 나지막이 웃을 뿐이었다.

“백호연 씨는 다시 봐도 참 이기적이야.”

호연은 아랫입술을 꽉, 감쳐물며 선고와도 같은 대답을 기다렸다.

“밑도 끝도 없이 좋아한다……. 내가 믿겠어요?”

호연은 숨을 들이켜고 간신히 소리를 뭉쳐냈다.

“……믿어주세요.”

세정의 머릿속이 뿌예지는 대답이었다. 노력할게요, 믿어주세요. 거기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대답들. 아니, 그때보다 더 대책 없는 말들.

“전에는 엔마트가 필요한 이유니, 뭐니……. 별별 걸 다 가져오더니 입술 한 번 비비고, 몸 한 번 섞으니까 다 우습나?”

“그런 게 아니라…….”

“아니어도.”

세정이 호연의 말허리를 분질렀다.

“내가 백호연 씨 말을 더 들어줄 필요가 없죠.”

일을 바로잡는다는 생각을 했다. 엔마트가 필요했다고 한들, 백호연과는 얽혀서는 안 됐고. 당장이라도 뒤집을 수 있던 순간에 백호연을 안아서는 안 됐고.

그러나 안 되는 모든 일을 해냈으니 이제야 바로 잡는다고.

대답의 색채가 진해졌다.

“모든 일은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제가 싫다고 하면요.”

“어쩌라고.”

“…….”

“상관없지, 백호연 씨 대답은.”

통보를 위한 자리니까.

가벼운 어투로 툭, 던졌다. 여자의 얼굴에 제 손과 같은 실금이 가는 것 같았다.

식어가는 커피 잔을 들어 입술로 붙이는 세정의 움직임은 간결했다. 말처럼 간단하고 거침이 없었다.

기어코 무너지는 호연의 표정을, 잘게 떨리는 숨을 내뱉다가 힘없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세정은 웃었다.

그러다가 홀로 남겨져서.

“좆같네, 진짜.”

영문 모를 감정을 앓는다.

* * *

전무로 승진이라…….

“전자로 보내주실 줄 알았는데요.”

“기세정이 아니면 리테일 누가 굴리나.”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한규의 능글맞은 대답에 세정은 낮게 웃음 쳤다. 두려우시냐 묻지 않아도 두려워하심이라. 얼굴을 찌푸릴 일이 아니다. 근데 그게 너무 노골적이라 고개를 저었다.

“네가 파리에서 고생 많이 했다.”

단 이 년 만이다. 파라스 호텔의 해외 사업을 북두 그룹 내 주목할 만한 사업으로 올려놓은 게.

파라스 파리의 안정과 동시에 런던으로, 시애틀로 대도시에 자리한 호텔을 M&A하여 공격적으로 저변을 확대한 것도 세정의 뜻이었다.

너무 짧았고 너무 위협적이었다.

그러니 경계가 되셨겠지. 언제든 목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끝끝내 지금과 같은 꼴이지 않나.

훤히 드러내 보이고도 부끄럼이 없음은 고질인가.

“이혼은?”

듣자 하니 가관이네.

대놓고 제가 봐둔 사람을 옆에 두어 눈으로 쓰겠다는 말까지 서슴없으시고.

“글쎄요.”

세정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아직은 계획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한규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할 때도 되지 않았니. 이 년인데. 엔마트 단물 빨아먹을 것도 다 빨아먹었고. 이제 너도 정착해야지. 자식을 봐도 셋은 봤을 나이고.”

시간을 가늠하고자 얇게 뜬 눈꺼풀 아래로 동공이 빠르게 움직였다. 제 아들의 눈치를 살피는 눈이었다.

한규가 원하는 바는 짐작되었다.

머지않아 세정은 제 세력을 등에 업고 리테일이 아니라 전자로의 이동을 공고히 할 것이다. 리테일이 담을 그릇이 아닌 성과를 어쩔 텐가.

그러니 한규는 제가 선택한 기업의 딸자식을 들이밀어 세정을 제 손바닥 위로 두고 싶은 것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란 이런 것이었을까. 뒤주는 어디? 제 형을 좌천시켰던 정유? 북두 에너지?

세정은 피식, 웃음을 물었다.

“제 얘기는 그만해도 될 것 같고.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화제를 돌려본다.

이딴 대화나 하려고 부른 건 아니었으므로 한규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나야, 뭐…….”

“어머니는요?”

“그 사람이야, 하던 대로 있지.”

여전히 공식적인 자리에는 모습 하나 비추지 못하고 유령처럼 지낸다는 뜻이다.

그 모습에 세정은 괜히 호연이 겹쳤다.

사랑한다는 거짓말로 이혼하기 싫다며 버티는 호연의 모습과 또 다른 여자를 아내감으로 둘러보는 제 모습이 은선과 한규의 모습으로 완벽한 데칼코마니다.

그를 자각한 기분이……. 엿 같네.

입안이 썼다.

호연을 제 곁에 오래도록 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부친이 눈을 형형하게 뜨고 버티니 때는 조금 미루어도 되려나. 머릿속으로 조용히 시기를 더듬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조만간 찾아뵐게요.”

“그럼.”

인자함을 흉내 내는 얼굴. 세정은 심사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으나 감추었다.

“아, 세정아.”

“네.”

세정은 일어나 재킷 단추를 잠그며 고개만 기울였다. 얼핏 웃음기가 포장된 한규의 음성에 팅, 손가락이 튀었다.

아니나 다를까,

“휘영이를 불러와 북두 리테일 이사로 올릴까 하는데.”

“…….”

“네 생각은 어떠니.”

좆대로 하세요.

* * *

빛나는 감은색 명패. 북두 리테일 전무 기세정. 그 글자를 쓱, 훑은 신원은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얼마나 넓은 보폭으로 뛰어넘고 있는지 체감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세정과 눈이 마주치고 어색하게 말문을 텄다.

“전무님,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책상 위로 결재 서류를 한 움큼 올리면서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세정은 목뒤를 주무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신원은 머쓱한 얼굴로 따라 웃을 뿐이었다.

기실 피곤해 보인다는 말은 본인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이라서 신원 또한 피로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신원은 당장 하루 전에도 머물렀던 파리의 전경을 떠올렸다.

세정이 집무실로 사용하는 객실은 파라스 파리의 32층, 눈앞으로 에펠탑이 보이는 룸이었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파리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내다보이는 게 시꺼멓고 허연 차고, 권태로운 표정만이 가득한 살풍경 속에서는 더욱 간절했다.

이제 이 나라에 다시 적응해야겠지.

“파리가 좋았나 봐요. 거기로 보내줄까요?”

그리 묻는 제 상사의 말에 제법 뼈가 있기도 해서 최대한 빠르게.

“아닙니다. 시차 적응이 덜 돼서요. 몽롱하네요.”

“그건 저도 그러네요.”

“커피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래요. 엔마트 관련 서류도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손으로 짚어 알려주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세정은 좀처럼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온종일 눈물이 차오른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 내내 거북했다.

세정은 엔마트와 관련한 서류를 피해 북두 전자로 올라갈 계단이 될, 혹은 계단마저 폭발시킬 폭탄이 될 소재를 손끝으로 죽, 쓸어 만졌다.

제가 이혼하고 부친이 중매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으면 휘영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을 게 자명했다. 또한 대규모 인사이동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 전자로 옮겨주었겠지.

일종의 견제였다. 그렇다고 휘영을 제 위로 올리지는 않겠으나 사생아와 적자의 차이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면 누구의 수치가 될지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다.

아래로는 세정의 능력을 의심하는 세력이 생길 것이고 휘영에게 헛바람을 넣어 줄 계파가 생길 테니까.

한규는 그 위험을 뻔히 다 알고도 단순히 저를 저지하기 위해 악수를 두는 거였다.

확실히 노망이 났네.

세정은 눈썹 끝을 문지르며 엔마트와 관련한 서류를 가까이 당겼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신원에게도 손짓했다.

“말씀대로 엔마트 자금 현황이 꽤 수상쩍어서요.”

오 년간의 데이터가 축적된 서류였다. 정상적인 자본금을 가지고 운영되던 게 사 년 전. 이후로는 횡령 사건이 있었으나 다 되찾았다고. 서류상으로도 그랬다. 그런데 이상한 게 꼭 삼 년 전부터…….

“도산을 앞두고 있대도 이상함이 없습니다.”

도산씩이나?

주기적으로 받아보는 엔마트의 자금이 이상한 것은 진작 확인한 터였는데, 도산?

세정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서류를 넘겼다. 말 그대로 도산 직전의 상황이었다. 자본금이 바닥인 것으로 모자라 은행에서 돈을 끌어 쓴 것의 이자도 간신히 내는 행태였다.

왜일까. 세정은 헛웃음을 치며 한 장을 더 넘겼다. 연이은 투자 실패. 해외 사업 유치 실패 등으로 축적된 빚이었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다 이렇게 됐다는 말인가.

북두 그룹의 지원을 받는 엔마트가?

“많이 이상하네요.”

매출이 떨어지거나 영업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세정은 머릿속으로 엔마트를 M&A 할 경우를 셈해보았다. 스스로 자멸하고 있다. 여자와의 결혼으로도 받을 수 없던 엔마트를 삼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이렇게 쉽게.

결론은 지어졌다.

“어떻게 할까요?”

양부는 저를 팔아넘겼는데, 양부의 엔마트를 지키려는 여자. 그래서 내가 좋아 죽겠다는 여자. 끝에도 이런 얼굴일지가 궁금하다.

그때도 불안해하는 눈으로 좋아한다고, 진심이라고 할까. 도달할 수 있다면 내달리고 싶다. 여자가 속아주기를 바랐듯 속아줘 볼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박살을 내면 속이 시원할까, 라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듯한 답답함이 괜찮아질까.

백호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라고도 생각한다.

순간, 호연의 얼굴 위로 은선의 얼굴이 겹쳤다. 어느샌가 가물가물해졌던 모친, 소희의 얼굴도 따라서 떠올랐다.

세정은 서류를 엎었다. 이내 아무런 죄악감 없이 명령했다.

“투자금 회수해 봅시다.”

아니, 백호연은 믿을 수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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