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호연과 세정이 나란히 앉은 차의 차창으로 서울의 야경이 피사체처럼 맺혔다.
호연은 백미러로 세정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인공눈물을 찾아 핸드백을 뒤지는 일도 그만두었다. 큰 눈을 깜박깜박, 피로감에 내리감았다가 다시 떴다.
반대로 더욱 선명해지는 남자의 얼굴을 차창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한참 붙잡고 있던 태블릿을 놓은 남자는 피곤한 듯 목을 젖혔다.
이 년간, 몇 개월에 한 번씩, 반나절 남짓 보았던 남자의 얼굴은 낯설게 날카로웠다.
원래도 무감한 얼굴인데 전과 비교도 되지 않게끔 날이 섰다. 남자가 때때로 보이던 서늘함, 그것이 일상적인 얼굴이 되었다.
호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K 그룹 구희성 사장 내외의 아들 돌잔치에는 호연이 아는 얼굴도 꽤 있었다. 지난해 오경석의 차남, 오현준 의원과 결혼한 여진을 비롯해 석훈과 연실도 나란히 참석한 자리였다.
어렵게 얻은 자식이라 귀히 여긴다 그러던가. 통통하고 발긋한 볼이 탐스럽게 예뻐서, 생긋생긋 웃는 얼굴이 내내 분주한 구 사장의 아내를 닮아 있어 더욱 눈길이 갔다.
더불어 그 아내를 연신 챙기던 구 사장의 모습까지도……. 다정한 가족의 일상을 엿본 것처럼 그랬다.
지금 남자와 제 사이에 형성되는 공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
아, 이런 것이었지.
초점이 나가면서 빛이 번졌다.
그 자리에 세정이 동석한다는 것은 참석 후에 들은 바였다.
조금만 일찍 알게 되었더라면, 그랬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사랑 고백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내려요.”
얼마나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걸까.
초점이 잡혔다. 호연은 눈을 내려 제게로 내어진 손을, 눈을 들어 무심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보았다.
사람이 납작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미적지근한 온도의 손이 맞닿았다. 힘을 주어 누르고 당기는 손. 무게중심이 이동하듯 호연이 남자에게로 가까워졌다.
짙어진 향수 내음. 저를 눈길 끝으로 살피는 새카만 동공으로 예측되는 미감. 살짝 벌어지는 입술.
입술.
순간, 맥없이 호연의 심장이 뛰었다.
어……. 당황한 호연이 입안으로 소리를 굴렸다.
너무 놀라 그런 거다.
호연이 바로 선 것을 확인한 세정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앞서 걸었다.
그 멀어지는 마른 등을 보는데, 이어진 박동이 돌멩이에 얻어맞은 수면처럼 진동했다.
* * *
유성채를 신혼집으로 삼지 않은 이유는 오은선 때문이었다.
만취한 채 별관을 돌아다니는 오은선과 언젠가 마주칠지도 모르는 백호연.
두 명의 전처 앞에서는 오은선이 몸을 숨겼지만, 제가 한국에 없는 상황에서도 과연 그럴까?
오은선은 부친의 허물이었다.
그러므로 유성채를 신혼집으로 삼지 않은 건 아들 된 도리였다.
“백호연 씨 취향대로 꾸며요.”
그랬었는데.
세정은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발을 돌려 침실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사용인이 가져다 둔 캐리어가 구석에 놓여 있었다.
여느 날, 여자가 유성채로 와서 보았던 그 배치를 빼닮아 침대와 협탁이 있는 간결한 방이었다.
“와중에도 그걸 그대로 훔쳐보고 옮겨왔단 거지.”
세정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아랫배가 조여드는 감각이 들었다. 이를 모르고 배치했을 여자의 무구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밤을 어떻게 잊나, 하다가도 그 하룻밤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는 게 그저 우습다.
드문드문, 바느질을 하는 것처럼 따끔거리며 계속 떠올랐지. 그때마다 좆같기도 했고, 상상만으로 꼴리기도 했고.
결국은 오늘까지.
침대 위에 난 창으로 하늘을 베는 눈발이 보였다. 곧 몸을 돌렸다. 입술에 미온이 남아 있는 듯했다. 세정은 그를 혀로 핥아 지웠다.
이혼은 할 작정이었다.
여전히 어린 아내. 여전히 서툰 거짓말. 좆될 것 같은 예감.
그 속에서 거짓 사랑을 고백하는 눈에 가득하던 불안의 근원까지도 알아낼 생각이었다.
* * *
똑똑,
침대에 앉아 스크랩북을 살펴보고 있던 호연이 파뜩, 허리를 세웠다. 문을 두드린 사람이 스크랩북의 주인공이었다.
호연은 얼른 서랍을 열어 스크랩북을 집어넣었다. 침대에 앉은 자국이 없게끔 손으로 쓸어내리고서야 후, 숨을 내쉬었다.
“네.”
가느다랗게 대답하고 문을 열자, 예상대로 남자가 서 있었다.
편한 차림.
다만 그 모습이 처음이라 호연은 시선을 죽, 미끄러트렸다. 남자에게서 제 것과 같은 바디 워시의 향이 밀려들었다.
그따위의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음성이 그 위에 얹어졌다.
“할 얘기가 있죠, 우리.”
쿵, 심장이 내려앉는다.
“나와요.”
쉽게 등을 지고 가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호연은 도망치고 싶었다.
사실 오늘 하루만은 그냥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제 낙관에 불과하고 남자는 본디 그다지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참아본 적이 있기나 할까.
후회가 따른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이 아니라 그럴듯한 제안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을 벌기 위한 짓이었는데,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제게 조금만 시간이 있었더라면. 빠른 후회가 늦은 후회까지도 낳았다.
호연이 K 그룹 구희성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세정의 곁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였다.
호연은 석훈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 그 밖에 난 룸에 들어왔다. 문을 급히 꽉 눌러 닫는 손길에서 나쁜 예감을 느꼈다.
“혹시라도……. 기 상무가 이혼하자고 하면 아직 안 돼.”
왜요, 라고 물었던가. 아니, 묻지 않아도 얼굴에 쓰여 있었던가.
“아직 엔마트가 안정이 안 됐어.”
그딴 건 이제 나와 상관이 없고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말하려 했던 것 같다.
“민형이가 이제 한국 들어와, 호연아.”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귀국하겠다던 민형은 오지 못했다. 병이 재발했기 때문이었다.
기약 없는 치료와 막연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그래도 민형의 치료비를 석훈이 감당한다고 했기 때문에 호연은 남자에게 위자료를 받아 집을 사야지,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이 정도 돈을 써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이 상황이라면 아저씨가 치료비를 대는 건 어려울 것 같아.”
고작 석훈의 한 문장이었다. 그 나약한 문장이 단단한 줄 알았던 내일을 처참하게 박살 냈다.
“한 번만 더 도와줘, 호연아. 기 상무한테는 말하지 말고…….”
계약 종료일에 계약을 끝내는 것.
그게 제가 이 결혼 생활 내 해야 할 모든 것이었고 어떤 것도 빚지지 않는 나날의 연장선이었다.
그런 호연에게 석훈은, 천사보육원의 사정을 덧붙였다. 더 불어난 종영의 빚에 교은이 사는 집을 내놨다고.
이 년 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호연은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아직 석훈의 손아귀에 있는 민형을 걱정했다. 그러므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여태…… 뭐 하셨어요.”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원망을 꾹꾹 눌러 내비치는 순간에 석훈은 언짢아했다.
제가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는 양, 신선하게 받은 타격을 고스란히 얼굴에 내비치며. 그러면서도 끝내는 언죽번죽한 얼굴로 히죽, 웃었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아저씨가 조금만 더 부탁한다, 호연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얼마나.
“앉아요.”
호연은 엄지손톱으로 검지의 연한 살을 짓누르며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따뜻한 커피 두 잔이 남자와 제 사이에 놓였다.
제가 손님 같았다.
이 집을 이 년간 지키고 고치며 취향대로 다듬은 사람은 자신인데도 묘하게 본 주인을 마주한, 객이라는 생각은 떨치지 않는 것이다. 수도 없이 몸을 붙여 앉았던 소파가 불편했다.
“엔마트는 요즘 어때요.”
기다란 복도를 따르면서 대답을 고민한 물음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이미 다 알아차린 거짓 고백을 겨냥한 물음. 겨냥이 아니라면 이미 꿰뚫은 물음. 그런 게 나올 줄 알았다.
호연은 최대한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커피 잔을 쥐었다. 물결치는 그 속에 눈을 맞추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 쓴맛이 밀려오며 절로 눈매가 어그러졌다.
엔마트 상황도 남자가 모르지 않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전 잘 몰라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이어지는 호연의 대답에 세정이 피식, 웃었다. 비스듬히 틀어 올린 입꼬리가 비웃음이었다.
“잘 몰라요?”
“네.”
구태여 한 번 확인하는, 웃음기 가득한 되물음. 믿지 않는 얼굴.
감이 뛰어난 남자였다. 거짓 고백을 알아차렸으니 고백의 이유를 헤집었을 테고, 상황이 안 좋은 엔마트에 다다랐을 것이다.
자유를 원하던 제가 돌연 당신을 사랑해서 이혼할 수 없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겠지. 지금쯤이면 자유를 원했다는 말까지도 의심하고 있지 않을까.
이대로 남자가 이혼을 강요하면……. 민형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죽는 걸까. 천사보육원은. 아직은, 정말 아직은……. 제게 아무런 능력이 없다.
석훈의 부탁은 앞으로도 끝이 없을 걸 이제는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만……. 지금만 어떻게 안 될까.
고백이 아니라 다른 수가 있었을 텐데.
아아……. 정말 지나치게 안일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도 없었다.
터져 나오는 숨을 혀뿌리로 눌렀다. 압축된 숨이 뜨거워 목이 바싹 탔다.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며 머뭇머뭇, 겨우 말을 꺼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당연한 걸, 이라고 대답하듯 남자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렇다면,
“진심이에요.”
나조차도 속을 거짓말을 해야 한다.
“정말……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요.”
아니, 거짓이 아니라 진실토록.
이 순간, 내가 남자를 정말 좋아하게 되기를 바랐다.
이혼을 하게 되는 날까지만. 그만큼만 좋아하다가 끝내자고.
남자를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어도, 지금은 겁이 났다.
남자가 사랑할 기회를 주지 않을까 봐. 사랑한대도 내칠까 봐.
그리고 그게 너무 당연해서.
“백호연 씨는.”
호연은 허벅지를 덮은 원피스를 움켜쥐었다. 힘을 주지 않으면 손이 덜덜, 떨려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말끝이 여러 번 풀리며 여린 소리가 났다.
“아…….”
남자가 알아챘을까, 알아챘겠지.
심장이 미친 듯이 자맥질했다. 사실상 구걸과 다를 바 없는 고백이었다.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하고 빌고, 머리를 조아리는 고백.
내내 준비해오던 오늘의 모습은 분명 이딴 게 아니었다.
한 번도 당당해 본 적 없던 날들을 어제로 두고, 그의 이름 아래 당당히 제 이름을 써보고 싶었다.
먼 훗날, 이런 날도 있었지, 하고 언젠가 추억했을 때 구질구질한 날이 하루만은 없기를 바랐다. 그게 오늘이었다.
그런데 왜 또 나는…….
남자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나.
어째서 이토록 부끄럽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