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야, 호연아. 너 작품 팔렸다?
누구야? 백호연? 나 바꿔줘. 하는 진오와 내가 통화하고 있잖아, 하고 소예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꺼지라고!
소예가 핸드폰을 사수한 모양이었다.
―네 거가 제일 먼저 팔렸어. 제일 비쌌는데.
“누가? 누가 샀는데?”
―나야 모르지.
대헌제가 한창일 시간이었다.
회화과에서 진행하는 작품 전시의 경우에 작품을 팔기도 했는데 책정한 가격이 터무니없거니와 그를 사가는 경우도 드문 일이었다.
호연은 소예의 들뜬 음성을 들으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재밌겠다.”
―그러니까, 너는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 생겼다고. 별일 없으면 오지. 지금도 안 늦었어.
“못 가…….”
―웃겨, 진짜. 그렇게 준비해놓고. 제 작품 팔리는 것도 못 보고. 뭐 하러 그렇게 사냐?
“그러게. ……나 잠시만! 조금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야, 야!
통화 종료음과 동시에 다시 전화가 걸려오는 핸드폰을 뒤집어 두었다. 닫힌 문밖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더불어 이 대표님, 하하, 웃는 석훈의 음성까지도.
매일 보아온 얼굴인데,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머리 위의 면사포와 눈부시게 하얀 웨딩드레스. 소리가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호연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하얗게……. 하얗게 번지는 입술이 희게 질린 얼굴처럼 색을 잃어갔다.
오늘, 세정의 아내가 된다.
남자가 제 남편이 된다.
그리 슬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례하고 오만하지만, 지극히 합리적인 남자와의 결혼이니까. 남자와의 결혼으로 천사보육원과 엔마트. 민형과 제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으니까. 남자는 떠나 한참을 돌아오지 않는다니까.
……그리고 남자는 굉장히 잘생겼으니까.
킥킥거리며 웃는데 굵은 눈물이 무겁게 떨어졌다. 눈매가 눅눅해졌다.
“나 왜 우니…….”
생이 자주 무거웠다.
* * *
비척비척하는 걸음으로 호텔 방에 들어온 호연은 주저앉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위스키의 단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방 안이 더운 것 같은데. 다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듯 온몸이 둔중했다. 2부 드레스로 입은 은은한 녹색 드레스는 레이스가 여러 겹이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기에 머리까지도 지끈거렸다. 와인에 절은 뇌가 출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본식만으로 벅찬데 2부 때는 남자의 팔뚝에 손을 얹은 채 정신없이 누군가를 소개받고 인사했다. 그 과정에서 결혼식과 관련된 기억은 모두 휘발되어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남자는 그게 일상인 것 같았다. 흐트러짐이 없었다.
결국 제가 높은 구두에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던 순간에도, 저를 붙잡아주며 그만 올라가 보라고 했다.
더 있고 싶었는데. 더 버텨보고 싶었는데.
한계였다.
호연은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자행했던 일들이 쏜살처럼 빈 벽으로 날아가 꽂혔다.
문득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기진한 것은 제 탓인 것 같았다.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언젠가 교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도 저를 괴롭히는 건 생각이다. 생각, 생각, 생각. 생각…….
호연은 손등을 들어 입술을 닦아냈다. 옅게 발린 붉은 립스틱이 피처럼 그려졌다.
그날 피가 묻은 시트를 걷어가던 남자가 떠오르는 건 뭐랄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던 그 밤을……. 실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많은 생각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느낌. 온몸이 곤죽처럼 흐무러지고 남자의 손이 닿는 곳마다 감각이 쏠려 머리에 남아나는 생각이 없던 밤.
그림을 그릴 때보다 짙은, 완벽한 극도의 몰입감.
호연은 졸아붙는 목구멍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이 있었다. 그 날씬한 병을 잡아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그 사이 갈증은 점점 더 심해져서 입안으로 쏟아붓듯이 들이켰다.
아무리 마셔도 해갈되지 않는, 타는 목마름을 어떻게 해야 하나.
호연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와인 병을 내렸다. 그리고 헛것 같은, 환영 같은 세정을 눈에 담았다.
“언제 들어오셨어요?”
“지금.”
세정 역시 피곤한 얼굴로, 귀찮은 손길로 호연에게서 와인을 가져갔다. 호연의 입술이 닿았던 그 부분에 제 입술을 대어 몇 모금 마셨다. 테이블에 다시 와인을 두고 입술은 손끝으로 문질러 닦았다.
“지금 가세요?”
아니, 가볍게 대답한 남자가 느리게 넥타이를 끄르는데, 그 모습이 몽롱하게 울렁거렸다. 와인을 가져가며 살짝 닿았던 손마디가 화끈거렸다.
“나도 잠은 자야죠.”
그래봤자 비행기 시간까지 서너 시간. 계산을 끝낸 세정이 씩, 웃었다.
그 눈시울이 묘하게 풀려 있었다. 호연은 알 수 없는 간지러움에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 결혼이 유지되는 이 년의 시간 동안 남자를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당장 내일 눈을 떴을 때부터 보이지 않을 남자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잘 자고요.”
아쉽다.
호연은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간격으로 서 있는 남자를 가늠했다.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백호연 씨 이기적이네.”
빠르게 귓가를 파고든 음성에 느리게 손을 내렸다. 여리게 대답했다.
“……기세정 씨도요.”
“잘 있고요.”
“…….”
“나는 잘 갈게요.”
전하지 않은 인사를 끝으로,
남자가 떠났다.
* * *
이 년 뒤,
세정은 피아노를 타건하던 기다란 손가락으로 이혼합의서를 내밀었다.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호연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세정은 2년 전과 비교해 더 마른 낯을 가진 날카로운 남성이었고, 호연은 아직도 앳된 티가 여릿하게 남아 있는 단정한 여성이었다.
정적이 입술을 짓누른 듯 무거웠다.
호연은 느릿한 시선으로 이혼합의서의 조항을 쓸어보았다.
아, 정말 계획적인 남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혼을 두 번이나 한 경력직 남자였다. 처음 약속대로 이혼의 귀책을 모조리 제 쪽으로 돌렸다. 비밀 유지 조항까지 두렵게 써놓았다.
그건 비단 세정에게만 당연한 일이 아니다. 계약이 끝난 후에도 살아야 할 긴 인생이 있는 호연에게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두 의미 없는 호의.
호연이 먼저 입술을 틀었다.
“이혼, 못 해요.”
반듯한 음성이 이혼합의서 위를 스치고 지나가 세정에게 닿았다. 세정은 의외로운 눈초리로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좋아해요.”
호연은 세정에게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세정 씨를 좋아해요.”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다. 하얀 치맛자락을 말아 쥐면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면서, 사뭇 결연한 표정으로.
고백에 서툰 어린 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상 어떤 남자를 데려다 놓아도 동했을 얼굴이다. 삶에서 비롯된 애처로움이 얼굴에 배어 있어 뭇 남자들의 비틀린 음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세정 또한 그런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눈길은 투명한 테이블 아래 호연의 주먹에 잠시 머무르다, 그를 지나 여자의 얼굴에 정착했다.
“언제부터?”
“……오래됐어요.”
호연은 어쩐지 속이 홧홧해졌다. 맞비비는 시선이 뜨거웠다. 분명 시리도록 차가운 눈길인데. 서둘러 시선을 내리깔았다.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들었다. 호연은 두 손을 바르작거렸다.
“백호연 씨.”
남자의 어깨 너머 창밖으로 흰 눈발이 나부꼈다. 고작 이름 한 번 불렸을 뿐인데 사로잡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명령과 같은 부름에 눈발마저도 정지한 것처럼 빼곡하게 그어졌다.
“키스해봐요.”
호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좋아한다며.”
“……네.”
“2년이 짧은 시간인가.”
남자는 커프스 링크를 풀어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하고 싶었겠네. 기다렸겠네.”
그러곤 가늘게 웃었다.
“장난……이시죠?”
“장난이라고 생각해요?”
동시에 세정의 상체가 테이블을 넘어와 호연에게로 기울어졌다. 공기의 빽빽한 밀도감을 느꼈다.
그런 남자였다. 태초부터 타고난 여유로움으로 시선 한 줌에, 손짓 한 번에 둘러싼 공기를 바꾸는 지배적인 남자.
막연한 감상에 잠긴 호연의 턱을 남자의 검지가 밀어 올렸다.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비트는 움직임은 잠시였다. 호연은 남자가 손을 댄 부분마다 데는 것 같은 열감을 느꼈다.
네, 대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묘한 눈길로 호연의 눈을 빤히 보았다. 꿰뚫리는 느낌. 호연이 고개를 돌려 세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고작 손가락 하나로도 저를 흔드는 남자였다. 세정이 손을 고쳐 뺨을 누르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아, 호연의 입술이 벌어졌다. 야트막한 신음이 나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의 붉은 혀를 눈에 담던 남자가 호연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빨고 잘근거리는 세정에 호연이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손목을 걸어 잡았다.
문제는 다분히 고압적인 입맞춤인데도 도통 그렇게 느껴지질 않는 것이다. 혀를 겹치고 문지르는 동안에는 마치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입 안쪽 여린 살에 스치는 혓몸이 미치도록 감각적이었다. 호연은 뼈마디를 타고 흐르는 전류를 느끼면서 세정에게 매달렸다. 도리어 입을 맞추어 달라 사정하는 여자처럼…….
혀가 얽히는 소리가 색정적이었다. 호연은 태어나 느껴본 적 없는 낯선 쾌감에 몸을 떨었다. 남자의 혀가 제 입속을 누비는 족족 허벅지 깊은 곳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늘한 세정과 달리 그가 내어주는 모든 것은 뜨겁고 녹신녹신했다. 정신이 없었다. 간간이 남자가 숨 쉴 틈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몹시 저돌적이었다.
세정 씨……. 입속말로 부수어지는 호칭을 세정이 그대로 삼켰다. 만류의 어투 따위는 전해질 리 없었다.
그러므로 호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세정의 검정 셔츠 소매를 구기면서 형편없이 흐트러지는 것뿐이었다.
더는 남은 숨이 없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촘촘한 입맞춤에 남자의 호흡이 몸 안에 쌓이고, 그로 말미암아 숨이 막힌 듯할 때 뺨을 그러쥔 손에서 악력이 빠졌다.
“하아, 하아…….”
달뜬 숨이 느껴지는, 고개를 살짝만 기울여도 콧잔등이 부딪치는 간격을 두었다. 살짝 부풀어 도톰해진 호연의 입술을 응시하던 세정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남자의 시선을 좇는 호연의 눈도 자연스럽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팍을 보게 되었다. 미친 듯이 자맥질하는 저와는 다른 심장 박동이었다.
내내 제 입술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호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제 벅찬 심장 박동이 들릴 것만 같았다. 호연은 턱을 당겨 목에 가깝게 붙이는 것으로 최대한 세정에게서 멀어졌다.
피식.
웃는 소리.
호연이 슬그머니 뒤로 빼던 몸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고개를 사선으로 내린 세정의 옆얼굴에 입꼬리가 솟아 있었다.
나를 비웃고 있다.
이로써 흐트러지던 마음이 다시 우뚝 올곧게 섰다. 아니, 속절없이 흔들렸다. 불안하다. 남자는 내 마음이 진심일 리 없다고 판단했고 방금 확신한 것 같았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 여전히 어린 호연은 완벽하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흥분이 뇌를 뒤덮어 판단력이 흐려졌다.
“……왜 웃으세요?”
호흡도 정리하지 못해 들쭉날쭉한 음조로 물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세정은 손을 살짝 내저었다. 솟아 있던 입꼬리가 다시 내려가고, 예의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어지는 것은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어투였다. 사과 또한 같은 성질이었다.
그걸 듣는데 문득, 호연은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받았던 취급, 의례적이던 사과. 어쩐지 사람이 작아지는 것 같은 분위기.
“열 살 많은 남자랑 섹스하는 건 괜찮겠어요?”
“…….”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
“어린애라 이런 대화는 어렵겠네.”
남자가 와인 잔의 스템을 잡고서 빙그르르 돌리던 첫 만남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