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23화 (23/98)

제23화

“그렇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죠.”

“…….”

“그래요, 그렇게 정리합시다.”

그리하는 게 제게도 손해가 없다는 판단이 섰겠지.

호연은 입술에서 힘을 뺐다.

“촬영 마치고 서 비서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때 혼전 계약서 확인하시고, 서명도 하시고.”

고저가 있던 음성에서 단조로운 어투로 돌아갔다. 사적인 상대가 아니라 공적인 상대를 대하듯. 호연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세정은 호연에게 고개를 까딱, 다가오라 턱짓했다.

저를 볼 때는 이런 표정, 이런 어투가 호연은 차라리 나았다. 모든 게 맞게 돌아가고 있다.

호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세정의 앞에 섰다.

“왼손.”

그 말에 손을 올리면 남자가 손등이 보이도록 뒤집었다. 호연이 놀라 살짝 손을 비틀어 빼려는데 보이는 것은 남자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두 개의 반지였다.

정교하게 세공된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맺힌 웨딩 밴드.

세정은 다섯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돌려 뺐다. 그러곤 호연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온기를 가진 반지가, 그게 꼭 맞았다.

“잘 맞네요.”

호연은 왜인지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준비할 거 있으면 마저 하시고.”

가볍게 발을 돌리고 등을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에 왜인지 마음이 썼다.

호연은 가느다란 한숨을 오래 뱉었다. 시선 한 줌에 저릿저릿해지는 손가락을 모아 잡고 꾹꾹, 눌렀다.

도통 적성에 맞지 않는 뻔뻔함이었다.

* * *

“백호연 씨가 최종 날인 마친 혼전 계약서입니다. 상무님 확인하시면 사본 전달 후 마무리 짓겠습니다.”

신원이 세정의 책상 위로 혼전 계약서를 올려두었다. 세정은 보고 있던 글로벌 푸드 스타트업, ‘히얼’ 인수 추진안에서 시선을 떼었다.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꺾어가며 목을 주물렀다. 피곤한 움직임이었다.

가까워진 파리 전근 때문에 온갖 일들이 난리였다. 파라스 호텔의 해외사업팀장인 오경준은 이러다가 상무님 결혼식에 상무님이 불참하는 것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했을 정도니 말은 다 한 것 아닐까.

그렇다고 파리로 떠난 뒤에는 이와 관련된 업무에서 손을 털게 되냐, 그것도 아니었다.

북두 홈푸드에서 추진 중인 푸드테크 사업들이 연달아 올라왔다. 배달앱을 인수한다고, 가공육과 같은 대체 식품의 개발비와 푸드 업사이클링을 위한 전문가를 더 지원해 달라고, 오늘은 글로벌 푸드 스타트업인 ‘히얼’을 인수하자고.

아마 파리로 가서는 더 바빠질 예정이었다.

세정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내가 제일 졸병이죠?”

자정에 가까운 시간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다니. 세정은 픽, 웃음이 났다.

신원은 대답을 아끼면서 웃었다. 이럴 땐 웃음만이 상책이었다.

리테일 산하 계열사에서 하는 일은 모두 세정의 손을 거쳐 걸러지고 윗선으로 올라갔다.

언젠가는 세정이 리테일을 떠나 북두 그룹의 총수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늘 일이 많았다.

물론 리테일이 잡무가 많고 그에 비해서는 실익을 크게 얻지 못하기는 해도 소비자의 피드백이 빠르게 온다는 점은 매력적이었다.

사실 장점을 찾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곳이라.

“읽어보던가요?”

세정은 혼전 계약서를 쓱, 넘겨 호연의 날인을 확인했다.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하게 보셨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결혼이니 꼼꼼하게 봤겠지.

여자의 집중하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신부님 팔다리가 되게 길쭉길쭉하세요.”

스튜디오 직원의 말을 들으며 아니라고 생각했다.

작고 짧던데. 품에 안고도 남던데.

긴장으로 땀이 배어 나왔었는지 종이 끝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세정은 호연의 손길이 남은 지점을 매만졌다.

하얀 종이 위에 구겨진 자국은 그날을 떠오르게 한다.

눈 덮인 정원에 가만히 서 있던 여자. 그게 또 창의 귀서리에 맺혀 있어 의도하고 그린 그림 같았지.

눈발에 날리는 긴 머리카락과 얼마간 하늘을 올려다보고 손을 뻗던 게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이 나서 기억이 난다.

여자의 텅 빈 자취를 눈으로 더듬다가 침대에 걸터앉았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다가 불도 안 붙은 걸 빨기만 빨았었지.

아래에서 흐트러지던 여자 생각에 브리프 안으로 손을 넣었다가 욕과 함께 다시 꺼냈었고.

별 더러운 짓을 다 하네, 싶어 담배를 분지르고 다시 밖을 내다봤을 땐, 창밖에 여자가 없었다.

그게 왜 갑자기 다 짜증으로 번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배를 맞춰놓고도 파렴치하게 결혼을 엎는다고 해볼까. 그럼 너는 어떤 표정으로, 이번에는 어떤 수를 쥐어짜 낼까. 궁금하면서 또 별로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냥 여러 가지가 짜증에서 터져 나왔고 궁금했다.

미역, 소고기, 한약 따위를 선물이랍시고 받고서 지을 표정과 그날 일을 입에 올리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뿐.

그러고 보니 담배를 피운 게 오래전 일이었다. 세정은 서랍 안쪽에 넣어두었던 담뱃갑을 꺼내며 물었다.

“라이터 있어요?”

“라이터…….”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지던 신원이 아, 하고는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끊었습니다.”

“언제요?”

얼마 전까지 피웠던 것 같은데, 생각하며 세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건강 생각해서 끊은 지 꽤 됐습니다, 상무님.”

그 말에 세정이 웃었다.

건강을 생각하면 야근을 하면 안 되지. 이게 모든 병의 근원인데.

세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혼전 계약서를 다시 신원에게 내밀었다.

“보관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만 퇴근합시다.”

* * *

“연출가님!”

호연이 장난스레 부르자, 사람들 틈에 있던 민주가 소리 난 쪽을 돌아보았다.

“아, 호연아. 잘 봤어?”

“잘 봤어요. 재미도 있고 너무 멋있어요.”

노란 프리지어 꽃다발을 건네주는 호연에게 어우, 손사래를 쳤다.

“꽃다발은 너도 받아야지.”

공연기획과의 민주에게서 연극 무대에 필요한 작품을 대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오래된 일이었다.

그때부터 드문드문 만나기 시작하여 완성작 대여가 아닌 연극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주었고 그 연극이 오늘부터 초연에 들어갔다.

“고생 많으셨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봐줘서 내가 더, 더 고맙지.”

“제가 더 고맙습니다.”

마음이 편해지는 연극이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또한 많은 사람이 고생한 손때가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했다. 그저 볼 때는 몰랐는데, 모든 곳에 민주의 손길이 닿는 것을 보고 전해 들었으니 디테일이 보였다.

“밥 살게.”

민주가 눈을 찡긋하며 능청맞게 말하기에 호연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복잡한 복도를 걸어 나왔다.

햇빛이 완전히 사위어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호연은 두 시간 가량 앉아 있어 뻐근한 몸을 두둑, 꺾었다.

“어떻게 이렇게 날이 겹치지.”

중얼거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아마 조금 촉박할 수도 있겠다.

이번에는 파라스 호텔 20주년 기념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한 인영에게 꽃다발을 전해주러 가야 했다.

* * *

호연은 인영과 잘 어울리는 붉은색 아마릴리스 꽃다발을 들고 전시를 관람했다.

언제쯤 이런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까. 언제쯤 이런 작가들과 작품의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볼까.

호연은 김산의 작품 앞에서 고요히 숨을 떨어트렸다. 무질서한 붓질 아래 작품이 주는 웅장한 울림이 있었다. 잠시간 사람이 멍청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 어지러운 미로 속을 내달리는 듯한 혼란스러움.

호연은 얼마간 그 작품에 사로잡혀 있다가 걸음을 떼었다.

오늘만큼은 파라스 호텔이 아티스트 레지던스가 되어 예술인의 투숙만을 받았다. 관람을 위해서는 특별 초청장이 있어야만 가능하게 하여 쾌적한 관람을 도왔다.

며칠간 진행되는 전시지만, 일반인의 관람을 받을 때는 몇 작품을 빼고 파라스 호텔의 역사와 비전을 더 강조한다고 하니, 인영에게서 특별 초청장을 받은 호연을 동기 모두가 부러워했다.

사실 호연은 특별 초청장이 하나 더 있어, 소예와 함께 올까,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건 또 어디서 났냐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인영이 두 장을 줬다고 하려는데 그녀가 이미 표가 한 장밖에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선수 쳐서 해버린 탓이었다.

브로슈어에는 가상 전시로 관람할 수 있는 QR코드가 있었다. 호연은 그 QR코드를 좋아, 좋냐구……. 하고 귀신 이모티콘이 올라오는 단체 메시지 방에 띄워주었다.

그러자, 그걸 누가 모르냐고 눈앞에서 보는 건 어떠냐는 물음이 쏟아져 올라왔다.

어떻게 대답할까. 조금 놀려볼까. 걸어가며 이모티콘을 고민하던 때였다.

“어디 가요?”

호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젖혔다. 시선이 훅, 높아졌다. 동시에 놀란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가깝게 선 세정이 그걸 받고 살짝 흔들었다.

손을 내려 핸드폰을 호연에게 돌려준 세정은 잠시만요, 신원을 향해 말했다.

“전시 관람?”

충분한 거리가 벌어지고서야 세정은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잘 봤어요?”

묻는다.

호연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 잠시 시선 조정 시간을 갖는다.

남자는 늘 내려다보기만 해서 모르는 모양이지만, 목을 빠듯이 들어 올려 봐야 하는 호연은 이 정도 간격이면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서 넘쳤다.

“나한테 줄 꽃다발은 아닐 거고.”

세정은 애초에 제게 줄 꽃다발이 아님을 알면서 부러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호연은 고민했다. 꽃다발의 포장지를 바르작거리며 소리를 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구깃구깃, 포장지를 만졌다.

남자를 만날 줄 알았다면 꽃다발을 사 왔을 것이다. 늘 바쁜 남자이기에 앞으로 결혼식을 제하고는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하루, 그 긴 시간 중 마침 같은 시간에 관람하게 될 줄 누가, 어떻게 알았겠나.

말없이 꽃을 내려다보는데, 무심코 아마릴리스의 붉은 꽃잎이 남자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죠? 근데 너무 화려해서 다른 꽃이랑 같이 두면 그 꽃이 확, 죽어요. 안 어울린다구. 예쁘긴 한데……. 뭔가 조금 외로운 느낌?”

귓바퀴에 고여 있던 말들이 흘러들어올수록 인영이 아니라, 남자를 위해 준비했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도 본래 주인이 정해진 꽃다발…….

호연은 문득, 바투 다가와 있는 세정의 새카만 머리칼을 봤다. 나른한 눈을 지닌 얼굴.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수초의 시간이 걸렸다.

꽃 속에 파묻힌 남자는 눈길 끝으로 호연을 보고 있었다. 마치 제 가슴 언저리에 얼굴을 처박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온몸의 신경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간지러웠다.

“향이 약해서 취향은 아니네요.”

그 당혹스러운 호연의 얼굴을 보며 세정이 허리를 세웠다.

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평가할 수 있는 뻔뻔함은 기질적일까.

호연은 그 말이 제게 하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었다.

향이 약해서 취향이 아니다.

향이 약해서 취향이 아니다.

향이 약해서 취향이 아니다.

도돌이표처럼 돌아왔다.

마음에 쿡, 가시처럼 박혔다. 갑자기 숨이 답답했다.

“전시 마저 볼 거예요?”

“……교수님부터 찾아뵈려고요.”

“그래요, 그럼. 잘 보다가요.”

남자는 단조롭게 대화를 갈무리했다. 거기서 어딘가 벽이 느껴졌다. 호연은 유난히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제야 표정을 꾸며낼 수 있었다. 부드럽게 웃었다.

“22일에 봅시다.”

날짜를 더듬어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날은 결혼식 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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