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탁, 거실에서 딸기를 먹던 여진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여진은 아무 말 없이 호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빙긋 웃으며 왔어? 물었다.
“그분이 데려다주셨어?”
여진은 살짝 엉덩이를 들어 어차피 보이지 않는 작은 정원을, 그 너머를 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는 얼굴엔 악의가 없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옷을 꺼내주고, 언젠가 꾸며주고 싶었다며 손수 메이크업을 봐주던 친절한 언니가 있었다.
“옷은 왜 그렇게 구겨졌어?”
여진은 호연에게 쪼르르, 다가가 몸을 낮추었다.
“몸이 얼음장이야. 목욕해야겠다. 목욕물 받아…….”
호들갑을 떨며 구겨진 옷감을 손으로 펴보다가 핏자국이 남은 치마를 보고는 손을 멈췄다.
“비켜줘.”
호연이 내는 목소리가 사늘했다. 얼굴이 무표정했다. 여진은 시선을 내리다가 목덜미에 남은 울혈을 보고는 심장이 덜컥했다.
“나오라니까.”
“어, 어, 응.”
여진이 급히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밤, 여진은 유성채로 다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벌떡 일어나 쫓았다. 결국 석훈에게 잡혀서 집으로 질질, 끌려오는 동안 두 다리를 쭉 뻗대며 악을 썼다.
그리고 방에 내던져진 여진은 그토록 형형한 석훈의 눈을 처음 봤다. 벽에 부딪혀 뺨이 짓눌린 채 있는데, 곧이라도 목을 조를 것 같은 석훈의 눈을 피했다. 석훈이 폭력성을 띠는 것은 태어나 본 일이 없어 면역 또한 없었다.
“너 어떡하려고 이래……. 둘이 좋아서 저 난리가 났는데, 호연이가 결혼하고 아예 연 끊으면 어떡하려고 이래! 다 죽는 거야. 아빠도 죽고, 네 엄마도 죽고, 너도 죽어. 다 죽어!”
석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라고 했다. 상글상글, 연하게 웃으면서 언니가 된 도리로 동생의 결혼식을 챙기는 애틋함이나 연기하라고 했다.
그래서 여진은 호연이 저를 무시하고 계단을 오르는 중에도, 애써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 * *
-나는 요즘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니……. 어, 유민아. 갈게, 갈게.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짧은 정적. 그리고 살짝 멀어진 통화감.
으아앙, 누군가 울음을 터트렸다. 정자로 길게 다물려 있던 호연의 입술에 미미한 웃음이 번졌다.
“유민이랑 정서죠?”
-응. 올라오면 안 되지. 얘들아! ……똑같아, 여기는.
“유민이 우는 소리 들려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곧 찾아뵐게요.”
-무리하지 말고, 시간 되면.
“원장님도 무리하지 마세요. 힘에 부치면 언제든 전화 주시고요. 네, 네. 끊을게요.”
누나예요? 하는 소리가 멀찍이서 들렸다. 통화를 하는 걸 들켰다가는 저녁 시간까지도 돌아가면서 핸드폰을 쥐니, 교은은 호연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면 늘 2층으로 올라와 받았다.
마침 애들이 이 수법을 좀 눈치챈 것 같다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웃으며 대화했는데.
통화 종료음이 들렸다.
호연은 테이블 위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가늘게 입꼬리를 올려주던 웃음마저도 지우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녹지 않을 것만 같던 눈이 어느새 다 녹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길 위로 수많은 발자국이 떨어졌다.
그게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한 번도 신경 써본 적 없던 것들이 보였다.
이렇게나 연인이 많았나.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손잡고 거리를 걸었나.
호연은 연습장 위로 굴리던 연필을 내려놓고 카페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도 연인이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사랑이 헤픈 세상이었나.
저, 결혼해요.
사실 교은에게는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교은의 음성을 듣자마자 관두었다.
보육원에서의 날들은 오롯이 내 것을 가질 수가 없던 날들이었다. 교은은, 선생님들은, 봉사자들은 한정되어 있는데 딸린 애들은 많았으니까.
그러므로 차례를 기다려야만 받을 수 있는 애정이었다. 기약 없이 기다리기만 했고 그러다가 뒷전이 되기도 했다. 손길 없이 눈빛으로만 가만가만 달래지던 순간도 있었다.
그때도 호연은 잘 참았다. 얘기하면 터질 것 같은 설움을 억눌러가며.
그 기질은 변하지 않아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혼한다고 말하면……. 그다음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말을 하게 될까.
좋은 집이라고, 좋은 분이라고 이마를 쓸어주며 다정하게 입양을 설득하던 날과 석훈 앞에 저를 소개하던 날까지도 교은이 후회할 것 같아서. 그럴 바에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차라리 혼자 감내하는 게.
그래서 말한 건 이런 것들뿐이다.
오빠를 찾았다고. 요즘 자주 찾아가지 못해 죄송하다고. 바빠서 그런다고. 집도 못 간다고. 한동안은 계속 그럴 것 같다고. 지난번에 도와달라고 말씀하셨던 거 아저씨 편으로 보내 드리겠다고.
씁쓸한 대화 내용을 곱씹던 호연은 메시지 알림으로 밝아진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동기들이 떠들기 시작한 듯 쉴 새 없이 메시지 알림이 쌓였다.
[언제 들어오니? 닭칼국수 좋아하지? 일찍 들어와. 같이 저녁 하자.]
석훈의 메시지도 있었다.
[호연아, 우리 같이 K 백화점 갈까?]
여진의 메시지는 오래도록 읽을 생각이 없다.
하나씩 손가락으로 스와이프해 정리했다.
그리고 그 위에 메시지 알림으로도 가라앉지 않는 고정 알림, 스와이프해도 밀리지 않는,
D-1
웨딩 사진 촬영 날짜가 내일이었다.
* * *
“신랑님은 먼저 와 계세요.”
웃음을 지우는 법 없는 상냥한 직원이 앞서 걷다 말고 두 손으로 대기실 하나를 가리켰다.
신랑. 그 단어가 조금 낯설었다.
굳게 닫힌 문 안쪽에는 사람이 없는 듯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나 그 남자라면 와중에도 업무를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신부님은 이쪽으로 모실게요.”
신부라는 단어는 그보다 덜 낯설었다.
“여기 앉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호연이 대기실에 들어와 거울 앞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다가왔다. 오는 동안 흐트러진 머리와 화장을 점검해 주었다.
호연은 지난날, 제가 찾아보았던 결혼 준비 과정과 지금이 얼마나 큰 괴리를 낳는지 체감하는 중이었다.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보통의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것도 예상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줄이야.
애초에 모든 일정이 남자에게 맞춰져 있었다. 호연은 통보받는 식이었다.
웨딩드레스, 웨딩 베뉴, 스튜디오, 숍, 신혼여행과 그 외 자잘한 것들. 그 모든 것들의 선택지가 없거나 몹시 폭이 좁았다. 최소한의 시간을 쓰면서 바닥없이 돈을 퍼붓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호연은 이 결혼에 대한 세정의 관심도를 알려주듯 서류 가장 아래쪽에 있던 혼전 계약서를 떠올렸다. 웨딩드레스를 골랐던 것까지만 알고 어떤 것을 골랐는지는 모르던 세정의 건조한 말씨를 되짚었다.
그는 모든 결혼을 이렇게 했을까.
몸을 섞으며 기대했던 게 전과 다른 대우도 아니면서 괜히 마음이 이상했다. 남자에게 제 번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하고자 하면 쉽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음 날은 종일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이렇게나마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결혼에 안도하면서.
……방금 제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결혼이라고 생각했나.
이러한 과정을 겪다 보니 저도 미쳐가나 보다. 호연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때 웨딩드레스가 걸린 행거를 끌고 오던 직원이 거울 속 호연을 보고는 더 환히 웃었다.
“신부님, 웃으시니까 너무 예쁘세요!”
“…….”
“촬영 때 이렇게 웃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촬영 때 점점 미쳐간다고 생각하며 웃으라니.
“노력해 볼게요.”
타들어 가는 속을 무시한 채 호연은 나붓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님 이쪽으로.”
몸을 일으켰다. 살아 있는 구체 관절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다루어졌다.
촬영용 웨딩드레스는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게 인상적이었다.
모두가 그녀의 모습에 홀린 듯 작게 입을 벌리는데, 호연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봤자 몇 컷. 그중에서도 남에게 보일 건 겨우 한 컷뿐인 촬영이었다.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어차피 목적이 정해진 결혼, 이런 귀찮은 일까지 벌여야 하는 걸까.
“스튜디오 상황 여쭙고 올게요.”
그런 무력감에 하염없이 좀먹힐 때였다.
“똑똑.”
열린 문틈 사이, 입으로 소리 낸 세정이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남자의 등장만으로도 조용했던 공간이 행동부터 시끄러워졌다. 몇 걸음 들어왔을 뿐인데 직원, 모두가 나가주었고 문을 꽉 닫아줬다.
남자는 저를 위해 모두가 자리를 피해주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얼굴이었다. 그게 좀 갑자기 멀어 보였다. 원래도 멀게 여겨졌던 남자인데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오랜만이네요.”
여느 때처럼 몸에 딱 맞는 정장을 갖춰 입은 세정이 웃었다.
“잘 지냈어요?”
“네, 기세정 씨도 잘 지내셨어요?”
“아니요.”
네, 라고 대답한 줄 알았다.
상대를 착각하게 만드는 대답을 하곤 태연한 표정으로 눈과 코, 턱과 목선, 가슴과 배, 무릎에 시선을 오래 맺히게 두었다.
“잘 어울리네. 무릎은 다 나았어요?”
“신경 써주셔서 다 나았어요.”
“목은?”
턱짓했다.
이미 깨끗한 목이었다. 그런데 거기 내가 물어뜯은 자국이 있지 않냐고 피식, 웃으며 눈빛으로 물었다.
호연은 발개진 귓불을 하고서 동요하지 않았다. 얌전히 긍정했다.
“목은 진작 괜찮아졌어요. 이것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정 또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살살 웃음 지으며 비스듬한 자세를 취했다.
그 시선이 난데없이 호전적이었다.
오늘은 무엇 때문에 저를 곤란하게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부러 지난날을 상기시킨다는 건 그날에 뒤틀린 심사가 있다는 말이니까.
새벽녘 몰래 유성채를 나가 그러는 게 아닐까. 아니면……. 그 밤의 행위가 서툴러서 만족스럽지 않았다거나.
“선물은 잘 받아봤어요?”
“선물……이요?”
호연은 학교와 집을 반복하던 삶에 변주를 주었다. 저자세를 취하는 여진이 부담스러웠고, 석훈이 불편했다.
그래서 그토록 놀러 오라던 소예의 자취방에서도 며칠을 잤고 밤새 화실에서 작업을 하다가 그곳에서도 잤다.
집에 들어가야 하면 아주 늦게, 혹은 아주 일찍 들어가곤 했으니 무엇이 왔는지 알 턱이 있나.
“미역이랑 소고기. 아, 한약도 보냈어요. 기력 회복에 좋댔나.”
노골적인 선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에 보냈는데 인사말도 없길래 먹튀가 취향인가, 했지.”
이런 말을 하기 위한.
얼마 전, 미역국 해둔 게 있다며 얼른 차려 주겠다던 아주머니의 말을 거절하고 나왔었다.
결국 호연의 목덜미부터 드러난 가슴 위까지 홧홧한 무늬가 번졌다.
“그날은 제가 정신이 없었어요. 죄송해요.”
호연은 입 안쪽의 살을 아프게 씹었다.
“기억은 합니까?”
“네. 안 잊었어요.”
듣고자 했던 대답을 들었을진대 세정은 혀로 볼을 밀었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눈썹 앞을 구기고 끝을 문지르려다 관두었다.
“사과 들으면 나아질 기분인가 했는데 막상 들으니까 그렇지도 않네요.”
미친 걸까.
“나도 미안합니다.”
남자와 사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호연의 마음도 남자의 마음처럼, 사과를 들었으나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는 상태가 되었다. 진심이 없는 의례적인 사과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사과가 아니라 다른 걸 요구하는 마음을 알아내지 못해서 그런 걸까. 저도 한번 느껴보라고 저리 사과하는 걸까.
호연은 그간 고민했던 문장을 꺼내었다.
“저는 그날 일을 묻어 두었으면 해요.”
잊자는 의미가 아니다. 문신을 계속 들여다보며 사는 게 아니듯 있는 듯 없는 듯 굳이 꺼내지 않을 정도로만 묻자는 의미였다.
이에 세정이 실소했다.
“백호연 씨 이기적이네.”
침을 뱉듯이 툭.
“나는 백호연 씨가 자자고 하면 자고, 목적 이뤘으니 묻자 그러면 묻어요?”
이런 말을 들으니 남자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여자라도 되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그러지도, 그럴 수도 없었는데. 늘 매달리고 사정한 기억밖에 없는데.
조금은 억울한 기분이 됐다.
“……이용하라고 하셨잖아요.”
아, 그랬었지.
호연이 이런 대답을 할 줄 몰랐다는 듯 세정이 잔웃음을 털어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