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차가운 물줄기를 가득 내려 온몸을 흠씬 적셨다. 무용한 생각마저도, 발정했던 머저리 같은 순간마저도 떨쳐낼 수 있을 정도로 들이부었다.
몸이 달대로 달았는지, 그마저도 춥질 않아 젖은 얼굴을 쓸어 올리며 한참 자조했다. 미친놈…….
그러면서도 정신은 점점 깨서 은근히 몸을 잡아 누르던 취기가 완전히 가셨다.
느리게 머리칼을 닦고 가운을 입고 매듭을 묶었다.
그런데,
“뭐 해요?”
이건 뭘까.
눈매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떨리는 동공은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까.
세정은 머리칼을 닦아내던 수건을 툭, 내렸다.
고요히 서 있는 여자는 장식품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말이 없었다. 무언가가 닿아야만 소리를 내듯이 살갗이 맞닿아야 소리를 낼 것처럼 입술을 곧게 붙이고 있었다.
“뭐 하냐고.”
세정이 조금 짜증스레 묻자, 호연은 흠칫, 깊은 상념에라도 빠져 있었던 양 눈매를 풀어냈다.
그게 연기 같았다. 손으로 휘저으면 순식간에 흩어지는 연기(煙氣).
“확실하게 하고 가는 게 좋다고 하셨죠.”
갑자기 뭐라는 거야.
세정은 고개를 내렸다. 여자가 내쉰 숨을 들이마셨다. 이상하게도 흡연을 한 것 같은 감상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자욱함은 없는데, 도리어 상쾌한 향인데. 왜 흡연을 갈구하는 욕구가 채워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도…… 확실히 하고 싶어요.”
여자가 막막한 안개 같아서 얽히면 좆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가. 세정은 무언가 발목으로 고이는 듯한 감각에 아래를 살폈다.
모든 것은 착각이다. 안개가 발목을 휘돌아 묶는 것 같은 것도, 흡연을 대신하는 향에 숨통이 트이는 것도…….
제 사이즈에 맞춘 실내화가 여자의 작은 발을 삼킨 채 가까이 다가왔다.
왜인지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은 무게감을 느끼며 반쯤 고개를 들었을 땐,
“그러니까…….”
작은 입술을 형편없이 씹어대는 어린 여자가 있었다.
“자요.”
하, 노골적인 웃음 끝으로 실내화 사이에 떨어진 물방울이 잘게 깨졌다. 세정은 머리칼을 한 번에 뒤로 젖히며 자세를 비스듬히 바꾸었다.
“섹스를.”
여자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까?
“하자고.”
알겠지. 모르겠는 건 씨발, 난데.
“네.”
여자는 말을 내뱉은 후에 오히려 침착해졌다. 그에 반해 세정은 기가 차서 연신 잔웃음이 터졌다. 더 기가 찬 것은 가운 속에서 크게 기립한 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침착을 되찾았다. 풀지 못한 욕구는 짜증이 된다.
“……전에도 내가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세정은 담배를 태우듯 볼의 살이 움푹 패게끔 당겼다.
“백호연 씨는 나를 무서워할 필요가 있다고.”
“…….”
“백호연 씨는 사실 내가 좀 우습나?”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면 뭔데요.”
세정은 한 걸음씩 크게 다가가고, 호연은 구부러지려는 다리를 애써 고정했다. 그런데도 뒷걸음질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열린 옷장에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문득, 잡아먹히기를 기다리는 토끼 같은 작은 몸집에 세정은 고개를 꺾어…….
“씨발.”
숨기지 않는 크기의 음성에 호연은 눈을 크게 떴다가 금방 내렸다. 아릿한 통증을 참으며 가슴을 부풀렸다. 다시 눈빛을 죽이고 멍하니 올려다봤다.
네가 왔으면서 왜 싫어 죽을 것 같은 얼굴이야.
세정은 여자를 일으켜 세워주지 않았다. 본래 그것이 맞는 눈높이라는 것처럼 그저 삐딱한 자세로 서서 오만하게 혀를 굴렸다.
“뭘 확실하게 하고 싶을까.”
눈매를 찌푸렸다. 세정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호연의 눈썹 산이 일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이, 아니면 준비해온 대답을 꺼내기까지 다듬듯이.
그 작은 입술이 열리길 기다리는데, 알 수 없는 향이 자꾸 머리를 비웠다.
틀어 올린 여자의 머리칼 아래로 코를 처박고 싶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세정 씨와 제 관계를요.”
“도대체, 뭘, 얼마나 더.”
세정은 제가 여자와의 관계를 두루뭉술하게 둔 적 있던가, 생각했다.
혼전 계약서의 초안을 작성했고 최종본은 변호사의 검토를 마치고 제게 있다. 세정은 이마를 짚으며 대답을 듣는 대신 여자를 다시 한번 뒤로 두었다.
다소 거칠게 서재를 열고 들어가 책상 위에 놓인 서류 중 가장 아래, 가장 뒷전으로 두었던 혼전 계약서를 꺼냈다.
그를 따라온 호연의 앞으로 내어주었다. 호연은 제 가슴 바로 앞으로 내어진 종이를 시선으로 더듬었다.
“서명합시다.”
“…….”
“추가해 달라던 조항, 확인해 보시고.”
여전히 어린애의 다리를 벌리는 상상은 불쾌했다. 열 살이나 어린 애한테 발정하는 자신도 불결하고.
그런데 여자는 이따위 건 다 필요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거 한 장 받겠다고 회사 로비에서 그 창피를 당하고, 목을 긋고, 입맞춤을 감수했으면서.
“이렇게 종이에 새겨진 말은……. 뒤집을 수 있는 분이시잖아요.”
아, 그렇지.
“위약금 같은 거, 그게 얼마든 상관없으시잖아요. 그것까지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으시고.”
내가 그렇지.
“저보다 더 좋은 조건의 여자가 나타나면 쉽게 파기하실 거잖아요.”
“그래서 몸을 팔겠다?”
여자가 잘게 떨리는 턱을 뼈가 도드라지게 사리물었다. 그러곤 간신히 내뱉었다.
“기세정 씨 몸에 새기려는 거예요.”
“내 몸이요.”
“네.”
세정은 그냥 고개 돌려 웃음을 터트렸다.
거추장스러운 거 다 빼고.
호연의 발을 제 슬리퍼 위에 올려 침실까지 느린 입맞춤으로 걷던 세정은 돌연, 입술을 떼었다. 그러곤 무엇을 생각하더니 호연의 동그란 뒤통수 아래로 이어지는 원피스의 지퍼를 잡아 내렸다.
키에 비해 몸집이 작은 호연을 위해 일시적으로 수선을 해두었던 원피스가 후드득, 뜯겨나갔다.
호연은 한순간에 서늘해진 제 몸에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흐으……. 정제되지 않은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느껴지는 남자의 시선에 한 번 더 발가벗겨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세정은 호연의 가는 허리를 틀어쥐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씹, 뭐 이렇게 얇아.
혀를 비볐다. 이에 맥없이 휘청이는 여자를 가볍게 들어 올려 침대 위에 내렸다.
“씻고…… 하고 싶어요…….”
등에 닿는 푹신한 감각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호연이 말했다.
“그럴 시간이 어딨어.”
세정은 호연이 붉은 생채기를 냈던 목의 살을 빨았다. 아……. 호연은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잊었다.
남자의 숨결이 닿은 곳마다 열꽃이 피는 것 같았다. 근육이 수축했다가 이완되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호연은 몸을 움츠리다 못해 고개를 젖혔다.
“아응…….”
자연히 벌어진 입술로 흐릿한 신음이 샜다. 그 입술 안으로 세정의 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너무 깊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건 너무 깊다고.
혀뿌리에 혀끝이 문질러졌다. 이와 이가 부딪쳤다. 아, 아……. 본능적으로 입술을 더 열자, 남자의 혀가 더 성큼 들어왔다. 뒤섞이는 혀에 남자의 향이 강하게 넘나들었다. 이미 정신이 울렁였다.
“아…….”
세정이 브래지어 위로 가볍게 가슴을 쥐자, 몸을 굳힌 호연이 강하게 도리질 쳤다. 집요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던 세정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짓눌린 뺨으로 느껴졌다. 이내 살짝 떼어낸 입술로 낮은 속삭임이 번졌다.
“고작 이 정도로.”
그건 고작 이 정도로 엄살이면서 너 그렇게 결연했냐고. 비웃는 것 같았다.
“괜…… 아……!”
태연한 척 괜찮다고 대답하려던 호연은 브래지어를 끌어 내려 유두를 꼬집는 남자의 손길에 허리를 뒤틀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감각이었다.
모든 혈관이 팽팽하게 당겨진 듯 몸이 뻣뻣해졌다. 젖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은 호연의 어깨가 솟아올랐다.
세정은 도드라진 호연의 갈비뼈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그를 세듯이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동그란 가슴 위로 돋아난 유두가 조금 더 색감을 머금고 꼿꼿하게 섰다. 부러 가슴 위쪽을 베어 무는 세정의 입질이 장난스러웠다.
“아! 흐, 으…….”
자극을 주는 대로 정직하게 반응하는 몸이었다.
세정은 입술을 조금 내려 돋아난 유두를 물었다. 파드득, 전율하는 몸이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쭉, 빨아올렸다. 차마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밭은 숨을 쉬어대는 꼴이 봐줄 만했다.
아니, 봐줄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예민하게 움칠거리는 하얀 나신이 새카만 이불 위에서 흔들리며 대비되었다.
달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매끈한 몸이 있다는 것을 알았나. 이 사이에 눌리는 부드러운 살결이 끔찍할 정도로 단내가 난다는 것을 알았나. 피가 비치는 하얀 살결이 미치도록 야한 거 알았냐고.
“씨발…….”
어차피 이렇게 뒹굴 거 별 지랄을 다 했지, 내가.
입을 막은 호연의 손바닥을 떼어냈다. 어쩔 줄 모르던 손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세정은 다시 한번 호연의 가슴을 베어 물었다. 혀의 돌기가 과민하게 느껴질 때마다 호연이 흐느꼈다.
세정은 제가 쥘 때마다 핏빛이 마르고, 떼어낼 때마다 붉은 손자국이 남는 살결을 지겹게 손에 감았다. 몸이 벌써 얼룩덜룩했다.
호연은 또 한 번 힘 있게 빨리는 감각을 느끼며 무릎을 모았다. 발끝이 당겨졌다. 온몸이 저릿하게 죄어올 때마다 배 안쪽에서 지글지글, 끓던 게 흐르는 것 같아서 힘이 들어갔다.
하아, 어쩔 줄 모르고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마저도 땀으로 얼룩져 미끄러졌다. 온몸이 물기로 가득했다.
세정은 다시금 벌어져 제 허벅지 안쪽에 닿아오는 호연의 허벅지를 쓱, 내려다보았다. 드문드문, 몸을 굳히는 호연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처음이에요?”
그러면서 척척하게 젖은 아래를 손가락으로 죽, 쓸어 올렸다. 아담하게 솟은 음핵에 걸린 손가락이 그 부위를 가벼이 톡, 쳤다.
“처음, 처…… 응! 흐……. 이상, 이상해요…….”
대답을 꼭 들어야 아나.
하으윽, 호연이 골반을 빼는데도 집요한 손길이 따라붙었다.
“어디?”
여기?
세정이 다시 한번 그 위로 손가락을 둥글렸다. 호연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파들거렸다. 세정은 호연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선득한 차가움에 잠시 초점이 돌아온 호연은 등 뒤를 더듬었다. 침대 헤드 같았다. 그리고 눈을 들자, 벗은 것과 다름없는 가운 틈으로 남자의 나신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