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19화 (19/98)

제19화

“아빠가! 안 알려 줬잖아아―!”

악을 쓰는 소리에 앞서던 남자의 걸음이 먼저 멎었다.

세정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소리가 나는 곳을 힐긋 쳐다봤다.

그곳에는 크게 휘청이며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여진과 그녀의 양팔을 붙잡은 석훈이 있었다.

“백여진 씨는 백호연 씨보다 술이 더 약해요?”

문득 세정이 돌아 물었다. 호연은 글쎄요……. 대답하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봤다. 긴장으로 잠시 물러나 있던 술기운이 고르게 펴졌다가 눈 깜빡임과 함께 다시 갰다.

“여진아, 너는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지, 응?”

구부러지는 여진의 고개를 따라 시선을 맞추려고 애쓰는 석훈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 모습을 보는데 마음 어딘가, 금이 쩍, 갔다.

딸각딸각.

여기에서, 굳이 이곳에서, 이럴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별관의 뒤편이라고는 하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하필 여기에서, 굳이 이곳에서.

남자의 앞에서 자존심이 상하거니와 창피했다. 나를 팔 수밖에 없는 처지는 이미 들통났지만, 서로 팔려 가겠다며 아우성치는 것을 대놓고 보여준다는 게.

애당초 여진에게 하고팠던 말은 석훈의 자존심을 지켜주라는 거였다. 사업에 제 친딸은 팔 수 없다는 그 마지막 자존심 하나는 지켜주라고. 나는 언젠가 은혜를 갚고자 했으니 상관없지만, 언니는 아니지 않냐고.

딸각딸각.

그래서 늦지 않게 말하고 싶던 것이다.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이 소용이나 있었겠냐만.

“내 자리잖아! 내 자리이……!”

여진이 발을 동동 구르며 팔을 떨쳤다. 두 사람은 마치 달밤에 춤을 추는 것처럼 크게 흔들거렸다.

“그냥…… 사진이 나라고 하면 되잖아……. 내가 좋아해, 아빠. 내가 좋아한다구! 둘이 안 좋아해. 내가 더 좋을 거야. 내가 더어……! 왜 맨날 걔가 나보다 더 좋은 거 가져가냐고오!”

여진은 주저앉아 양다리를 뻗어보고 어엉―,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석훈은 속이 타면서도 차마 말을 내뱉을 수가 없다.

네가 가진 능력이 그것뿐이라 어쩌겠냐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늘 네게 최고로 좋은 것을 지원해주고 싶었는데. 대체 왜.

이제 참을 수가 없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런 게 뭐가 부럽니? 세 번째 아내다, 세 번째! 이 년 만에 이혼당한다고! 그렇게 평생을 이혼녀 딱지 달고 살아도 좋아? 그게 좋으면 아빠가 여진이, 너를 추천해보마. 어? 이 못난 놈아……. 못난 놈아!”

생떼를 부리느라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여진의 눈이 이내 설움으로 변했다. 석훈은 다 큰 딸의 허리를 후려치지도 못해 욕을 곱씹었다.

“참…….”

그 기막힌 모습에 호연은 삼킨 말이 많고,

“쓰레기 더미네.”

세정은 거침없이 내뱉었다.

딸각딸각.

여전한 소란 속에 이상스럽게도 규칙적인 소리만이 호연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가스라이터였다.

그를 보는데 호연은 눈앞이 자꾸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샌가 스르륵, 잠이 든 것 같은 몽연한 기분.

후, 하. 후, 하……. 짧게 호흡해도 깊이 취했다.

그에 이상한 용기를 가지는 시점이었다.

“돌아갈까요.”

인상을 찌푸린 세정이 호연을 내려다보던 때였다.

“아니요.”

호연의 뒤꿈치가 들리고 무게 중심이 앞으로 기울었다. 한쪽 손이 세정의 목덜미를 감싸 안더니 끌어내렸다.

턱에 닿지도 않는 입술을, 가물거리며 감긴 눈꺼풀을 빤히 보던 세정이 기꺼이 몸을 숙여주었다.

“읏…….”

이미 벌어진 입술 위로 또 다른 입술이 가벼이 포개졌다. 곧 제 손목을 더듬거리는 호연의 뜻을 세정은 모르지 않았다.

탁―!

세정이 유성채의 벽면으로 라이터를 던졌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 여진과 석훈이 동시에 어깨를 떨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혀가 파고들지 않는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애틋하게 빨고 다소 진득한 듯하면서도 겨우 체온만을 나누는, 예컨대 포옹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수위의 스킨십.

그러나 세정이 호연의 두 뺨을 가득 그러쥔 탓에 조금만 입술을 빨아도 미친 듯이 자극적으로 보였다.

세정은 천천히 호연의 몸을 돌려주었다. 엄지로 젖은 볼을 닦았다. 그러곤 입술에서 입술 끝으로, 입술 끝에서 볼 아래로, 잔 입맞춤을 끝마칠 즈음에는 호연의 뒤통수를 부드러이 쓸어주었다.

호연은 세정의 셔츠 소매 끝을 꽉 붙잡고 거친 숨을 골랐다. 자맥질하는 심박이 좀체 진정되지 않았는데…….

남자의 가슴팍 가까운 곳에서는 옅은 담배 냄새가 난다.

그를 가만히 들이마시고 있으니 흐으……. 하고 몸이 무너졌다.

어디선가 밤새가 울었다.

호연은 그처럼 꼭 울고 싶었다.

아니, 이미 울고 있었다.

남자의 넓은 어깨가 저를 가려주어서,

고마웠다.

* * *

침대에 앉은 여자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 모습을 문가에 서서 가만히 보자니……. 우는 여자를 보고 꼴렸던 적은 없는데.

세정은 하복부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며 돌아 나왔다. 부러 최소한의 등만 켠 거실을 가로질러 담배를 태우려다 라이터가 없음을 자각하고 욕을 내뱉었다. 이내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문제는 보지 못한 회색 연기에도, 흰 벽에도 처연하게 울던 그 옆얼굴이 보여서.

소파 등받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어 아득한 숨을 토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쓱, 닦아내는데 아직 울음의 짠맛이 남아 있었다.

“별…….”

싱겁게만 먹더니 짠맛에 미쳤나.

동시에 뻣뻣하던 여자의 몸이 아직 안겨 있는 양 그랬다. 입을 맞추는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반사적으로 혀를 내어 진입을 막던 감각이 살아 있었다. 숨과 숨 사이로 넘어오던 와인의 단 향이 기어코 머리를 어지럽혔다.

또다시 몰리는 열감에 세정은 괴던 팔을 풀어버렸다. 이내 아래를 쓱 내려다보곤 이마에 손을 얹고 허탈하게 웃었다.

우는 여자에게 발정하고 짠맛에 발정하는 놈이면 잘못 산 게 아닌가, 싶어지는데.

“저…… 죄송했습니다.”

세정이 이마를 덮었던 손을 스륵 떨어트렸다.

호연은 혼곤한 와중에도 또렷하게 보이는 눈매의 서늘함에 문틀을 움켜쥐었다.

세정은 울어 퉁퉁 부은 호연의 눈매나 빨려 부푼 입술 따위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계를 풀었다.

호연은 곧 제게서 지나가는 시선을 보며 손에서 힘을 뺐다.

“어떤 게요.”

이 남자는 늘 다 알면서 묻는 버릇이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잔꾀를 다 아는 부모처럼, 그리하여 벌을 주기 전에 네 잘못을 묻는 어른처럼.

호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가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갑자기 키스한 게…….”

“나도 했는데, 뭘.”

그러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정말 아무 일이 아닌 게 맞나. 나는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니었는데.

호연은 치맛자락을 쥐었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들릴까 봐, 급히 풀어주었다.

키스는 온몸의 뼈가 빠개질 듯 심장이 울렸다. 태어나 이리 벅찬 마음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번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마셨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남자의 라이터가 벽에 처박히면서 불이 나는 상상까지 들었으나 흐려졌다.

진정하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철렁거리는 마음으로 남자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남자는 경험이 많아 보였고, 그러니까 이까짓 입맞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처음이 남자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집에 가보려고요.”

그런데도 동시에 비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가요.”

“네?”

“백호연 씨 가족들 다 먼저 갔는데.”

호연이 놀란 눈을 들어 세정을 보았다.

“……언제요?”

풀어낸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백호연 씨 울 때?”

호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다 가라앉은 줄 알았던 술기운에 불을 붙인 듯 귓불 아래부터 홧홧하게 타올랐다.

“지금은 내가 안 되고, 음주운전이라.”

“…….”

“아침에 가요. 데려다줄 테니까.”

“……출근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출근하는 길에.”

“아니, 그렇게 민폐 끼칠 생각은 없고요……. 택시 불러서 갈게요.”

민폐, 그 단어에 세정은 조금 크게 웃었다. 그에 호연의 문장이 조금 끊어졌고 제가 어떠한 말을 잘못했는지 곰곰이 되짚어야만 했다.

늘 어려운 남자였다. 입을 두 번이나 맞췄지만,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마주 서 있는 것 자체로도 곤란함이 따르고 대화를 하는 게 버거웠으며,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정답을 내뱉는 것 같지 않은 찝찝함이 들었다. 어딘가 자꾸 읽히고 있는 듯 마음이 불편했다.

그를 빤히 응시하던 세정이 부드럽게 강제했다.

“민폐는 백호연 씨가 한밤중에 혼자 집으로 돌아가서 망가지는 내 평판이 아닐까 하는데.”

물음이 없으나 이미 물었고, 대답이 없으나 대답이 되었다.

그 속에서 호연도 남자의 눈빛을 읽어 내렸다.

“평판……. 신경 안 쓰시잖아요.”

직선으로 뻗은 시선에 빼곡하게 들어 있는 뜨거움.

“들켰네.”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소매 끝을 무심하게 풀면서 한 발짝씩 다가왔다. 그 사이에 남자의 눈빛이 차게 식는다. 예의 무기질적인 것으로. 단 한 번도 무언가를 깊이 탐한 적 없는 무정한 자의 것으로.

“평판은 핑곈데. 확실하게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저를 따라 시선이 움직이는 호연을 두고 지나간다.

확실하게, 무엇을.

되묻지 못한 호연이 몸을 비스듬히 젖혔다. 한참을 걸어간 남자는 어둠 속에 잠긴 문을 열며 그곳이 게스트 룸이라고 그랬다.

다시 이어진 남자의 걸음 끝에는 드레스 룸이 있고, 모습을 감춘 남자의 음성만이 고요하게 새어 나왔다.

“백여진 씨, 계속 그럴 거잖아.”

피차 귀찮은 일을 치워내자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섹스라도 한 듯이……. 마치 정말 사랑해서 밤을 보낸 듯이…….

굴자고 말하는 것이다.

벨트를 푸는 소리, 진열장을 여는 소리, 목재와 가죽이 부딪치는 소리.

호연은 남자의 그림자가 크게 너울지는 것이 보이는 지점에 서서 후회하고 다시 안도했다.

살아온 모든 순간을 어느 공간에, 누군가에게 빚을 지면서 지나왔다. 그러나 사랑이 없고 모든 게 계산된 결혼 생활은,

빚이 없다.

그러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빚이 없는 결혼 생활 속으로 순순히 보내주질 않는다.

호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걸음은 느리면서도 분명했다.

그러나 들어선 드레스 룸에는 남자가 없었다. 이어진 욕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곧, 쏴― 물소리가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호연은 벽면과 벽면을 따라, 낮은 조도의 등이 켜진 공간을 핥아보았다.

퍼스널 쇼퍼가 따로 골라주었을 옷이 걸린 행거와 그가 평소에 입는 수십 가지의 옷이 걸린 옷장. 그 모든 것이 미친 듯이 뿜어내는 어지러운 남자의 향. 분명히 깊이 숨을 들이마셔야만 맡아지던 옅은 그 향에 한참 고립되었다.

문득, 가운데 놓인 진열장에 시선이 머물렀다. 빼곡한 넥타이와 시계 그 아래는 커프스 링크나 넥타이핀을 보관하는 서랍장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저는 남자에게 수많은 장식품 중에 하나라는 생각을 한다.

비단 여진이 아니더라도, 비단 엔마트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천천히 다시 새겼다.

어쨌든 팔리듯이 하게 될 결혼. 싫지 않은 남자다. 내게 자유를 찾아줄 남자다.

그리고,

샤워실의 문이 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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