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18화 (18/98)

제18화

천천히 맞물리는 미닫이문 틈으로 곤란한 얼굴의 사용인들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간 정적이 늘어진 공간에 옅은 색감의 빨강 원피스로 갈아입은 여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단히 잘못한 일이 있다는 것처럼. 결국에는 제게 시선이 오래 박히도록.

“제…… 제 첫째 딸입니다. 인사드려라, 여진아.”

여진으로 인해 여러 번 당황하는 얼굴이 된 석훈이 황급히 일어나 소개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여진이 수줍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여진을 보는 한규와 윤진의 표정이 묘했다. 윤진은 호연을 힐긋, 바라보기까지 했다. 그를 호연이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여진이 인사를 마치자 석훈을 시작으로 다시 말이 이어졌다. 여진은 굳이 긴 테이블을 빙, 둘러 세정의 옆을 지나쳤다. 사락거리는 원피스로 프로럴 계열의 향이 번졌다.

이에 피식, 스푼을 내린 세정이 웃었다. 눈썹 끝을 문지르곤 다시 느리게 스푼을 쥐었다.

그 새 여진은 테이블을 완전히 돌아 호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호연은 독한 향수 내음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안녕하세요.”

세정은 고개를 까딱여 여진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다음 코스부터 같이 주세요.”

여느 때처럼 단정한 음성이 들렸다.

호연은 백자항아리 사이의 중문을 보았다. 여진은 이 자리의 주인공이 아니었으니 중문으로 안내를 받았을 터, 그런데도 구태여 정문을 택했다.

더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여진은 여전히 제 자리를 원하고 있다.

여지없이 남자에게로 쏟아지는 은근한 눈길이 마음을 밟았다.

그러나 여진이 원한다 한들, 호연도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이 가족에게서 벗어나고픈 마음을 세정에게 드러내지 않았나. 그들도 차별적인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느냐고.

이제 제가 그 집에 남게 되면 버틸 수나 있을까. 자신을 속여가며 겉돌았는데, 그 마음을 낱낱이 드러내고도 양부모와 웃으며 지낼 수 있나.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비단 양부모를 향한 은혜, 천사보육원, 민형을 떠나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저만을 위해서.

그러므로 호연은 이 결혼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 * *

“왜 이러세요…….”

가까운 데서 여진의 음성이 들리자, 호연의 걸음이 급해졌다.

상견례를 마치고 집으로 가면 여진은 얘기할 틈도 없게끔 문을 닫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호연은 계속 와인을 권하면서 그녀가 화장실을 가겠다고 하자 따라 나왔다.

그런데 겁에 질린 듯한 음성은 뭐지…….

벽이 꺾어지는 지점을 앞둔 걸음이 느려지더니 멈추었다.

“……있느냐고요.”

“……네?”

앞부분이 삭제될 정도로 어딘가 축 늘어지는,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는 느낌.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둘이라는 것. 하나는 여진이고 하나는 누구?

호연이 조심스럽게 몸을 내밀었다. 여진의 원피스 자락부터 잡힌 손. 그리고 겹친 어깨선과.

“뭐가 있나 봐요.”

쿵. 호연이 놀라 몸을 물리는데 어깨로 닿는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귓가로 훅, 떨어지는 숨결에 고개를 돌리자 비스듬히 상체를 굽힌 세정이 있었다.

“재밌는 거?”

입꼬리를 올려 묻는 말에 호연은 급히 몸을 떼었다. 휘청, 앞으로 기울어지는 호연의 몸을 세정이 별것 아니라는 듯 감싸 벽으로 붙였다. 그러곤 손을 옮겨 벽을 짚더니 호연이 보았던 곳을 제가 내어봤다.

“없는데.”

아무것도.

그럴 리가.

이번에는 호연이 벽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없다.

“있었어요.”

“뭐가요.”

“언니가요.”

“응. 소리 나네.”

쏴―

화장실이 있는 곳이라 물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한 사람 더 있었어요.”

“귀신인가 보지.”

태연히 말하는 세정의 어투에 어이가 없었다.

“귀신이 어디 있어요.”

“있는데. 이 집안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좀 많을까.”

섬찟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피식, 웃는데 뺨으로 얇은 옷자락이 닿았다.

호연은 그제야 제가 남자의 팔뚝을 손으로 짚은 채 고개를 내밀고 있단 사실을 자각했다.

“아. 죄송해요.”

세정은 호연의 손이 떠나간 부분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대답했다.

“죄송할 것까지야.”

쏴―

언제쯤 나오려나.

여전한 물소리와 구토를 하는 듯 연신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할 말은 없고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남자는 떠나지 않고.

호연은 어딜 쳐다볼지 몰라 방황하던 시선을 마지못해 올려붙였다. 고개를 기울인 남자가 물끄러미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에 턱을 당겨 넣었다.

도통 어딘가로 갈 기미가 없어 물었다.

“……어디 가시던 길 아니에요?”

“맞는데요.”

“그럼 가보시면…….”

“내 집에서 백호연 씨가 날 가라 마라 그래.”

뭐……. 어쩌라고…….

세정은 당황하여 동그래진 여자의 눈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다.

호연은 그제야 그게 남자의 장난임을 깨달았으나 여전히 얼떨떨했다.

“어디 가던 길은 맞는데, 백호연 씨랑 같이.”

이어진 말이 더 당혹스러웠다.

“네?”

“아버지가 백호연 씨한테 신혼집을 보여주라네.”

아, 신혼집. 호연이 신혼집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굴려봤다. 전에 없던 단어를 창조한 양 낯설었다.

그러다가 다시 옆을 힐긋, 바라보고 말했다.

“근데 저 언니랑 잠깐 얘기할 게 있어서요.”

“무슨 말.”

태연하게 물어오는 음성에 호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 꼴을 가만히 보던 세정이 호연의 입가를 더듬듯 제 아랫입술을 쓱, 쓸었다.

“백여진 씨의 무례에 관해서 얘기할 건가.”

시니컬한 어투였다. 드러나 보이는 얼굴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과하게 온도가 없었다.

“백호연 씨, 본인 상태는 알고?”

호연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마주 보는데 세정이 돌연 팔을 아래로 뻗었다.

몸을 물렸대도 벽이었겠지만,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판단도 서지 않게끔 빠르게,

세정의 손이 홱, 치맛자락을 들쳤다.

호연은 숨만 크게 들이쉬었다.

동시에 우두둑, 치맛자락이 뜯기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살갗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드러난 무릎은 피가 굳어 있었다. 피딱지와 치맛자락이 붙어 있었던 듯 다시 송골송골 핏방울이 맺혔다.

아픔은 상처를 자각한 후에야 밀려왔다.

그런데 그걸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내려다보지도 않는 남자의 눈이……. 어딘지 모르게 저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눈이…….

싫었다.

* * *

세정은 급하게 달려온 송 여사에게서 구급상자를 받아 들었다. 응급실을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묻기에 고개만 저었더니 송 여사는 기어코 한 걸음 다가와 상한 곳이 있나, 살폈다.

가보시라, 고개를 까딱하니 어찌나 불효자 보듯 보시는지.

문을 닫기 전, 세정은 별관 복도에 오은선이 만취한 채 돌아다닌다, 알려주었다. 그에 사색이 된 송 여사가 헐레벌떡 뒤를 돌아 별관으로 향했다.

공식적인 행사에 단 한 번도 초대받지 못한 은선은 이런 날이면 정신병이 도졌다. 공식적인 아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족 행사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설움 같은 게 울컥, 솟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제 아들인 휘영까지 대놓고 사생아 취급이니 이런 날이면 술을 마시고 저택을 배회하고 누군가를 붙잡아 묻는 것이다.

제 아들이 왔냐고. 제 아들의 자리는 있었냐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쥐새끼처럼 도망가는 삶.

사랑이라는 감정에 휩쓸려 본인이 선택한 삶이 그따위다.

세정은 송 여사가 별별 것들을 다 쑤셔 박았을 구급상자를 들고 긴 복도를 걸었다.

여자의 무릎에 상처가 나 있던 걸 알아차린 건, 여자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아이보리색 치마 위로 물감을 흩뿌린 듯 번진 핏자국들과 한 곳에 동그랗게 남은 자국.

피가 난 걸 모르고 걷다 보니 번진 것일 테고, 가만히 앉아 있었으니 동그랗게 남았을 것이다.

미련한 걸까. 둔감한 걸까.

다시 피가 흐르는데도 괜찮다고 연신 말하던 여자니까 아무래도 둘 다가 아닐까. 생각하며 거실에 닿았다. 소파에 앉아 이곳저곳을 분주히 살피던 여자의 시선이 이쪽에서 멈췄다.

와인 몇 잔 마신 거 가지고 눈 밑이, 볼이 발긋했다.

“앉아요.”

예의를 지키려는 것인지, 호연이 일어나려 들기에 세정은 손을 들었다. 반쯤 일어서던 호연이 다시 몸을 내렸다.

세정은 그 앞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긴 다리를 접었으나 시선은 무릎보다 높다. 그러곤 눈썹을 까딱.

“치마 올려요”

호연은 그 요구가 제법 당혹스러운 듯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이내 희고 가느다란 발목이 훤히 드러나게끔 올리고.

“더.”

말하는 세정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종아리와 무릎을 천천히 드러내 보였다.

그 하얀 살결 위에 남은 생채기. 그 위로 이어지는 허벅지와 더 깊은 안쪽.

미친놈인가. 세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이 옅게나마 입꼬리로 번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천연하게 구급상자로 눈을 돌렸다.

“언제 다친 거 같아요?”

“아까…… 언니 도와주려다가 돌에 긁힌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아니고서는 무릎을 다칠 일이 없었다.

아, 세정이 구급상자에서 소독약을 꺼내어 묻혔다.

“읏…….”

“아파요?”

“따끔, 해요.”

“좀 참아요.”

나직한 탄성을 놓치지 않고 물기에 대답하니, 참으란다. 그리고 참으라는 단어는 언젠가…….

입을 맞췄던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눈 끝, 비스듬한 시선으로 보이는 세정의 모습은 마치 제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드레스 골랐다고 들었는데.”

그 나른함을 닮은 음성이 굽이쳐 흘렀다.

“……네?”

“웨딩드레스.”

“아, 네.”

남자는 제 일정을 모두 받아보는 모양이었다.

세정의 말대로 얼마 전, 신원의 연락을 받고 웨딩드레스를 골랐다. 이미 말이 다 맞춰진 건지 신랑에 관한 것은 묻지 않았다.

그저 몸 사이즈를 재고 몇 벌 입어 보았다. 본식용 드레스, 촬영용 드레스, 2부 드레스. 각각 한 벌씩을 골랐다. 보여주기식 결혼일 뿐이니, 사진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일 거였다.

“예쁜 거 골랐어요?”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머리칼이 닿는 것 같은 건 착각일진대 묘하게 살결을 스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남자가 조금이라도 시선을 흐르게 두면 닿을 그 안쪽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네.”

일정을 받아봤으니 어떤 드레스를 골랐는지도 알 것이다.

“궁금하네.”

그런데 왜 모르는 척을 하는지.

달갑지 않은 고통이 계속 퍼졌다. 참다가, 참다가 안 되겠어, 무릎을 맞비볐다. 그런데 왜 이쪽에서 퍼진 고통이 아닌 것만 같을까. 오로지 고통만이 아닌 것 같을까.

모인 무릎의 더 깊숙한 쪽으로 찌릿한 감각이 일었다.

본능적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폐부가 조여오는 듯해 호연은 숨을 참았다. 너무 더웠다. 숨을 뱉을수록 더 취하는 기분이었다.

“안 불편해요?”

무릎 위로 커다란 밴드가 붙여진 이후에나 가느다랗게 숨을 뱉었다. 긴장으로 뭉쳐 있던 더운 숨이 공기를 이상하게 바꾸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불편하더라도 안 불편하다고 말해야 할 상황이었다.

“집 좀 둘러볼래요?”

이에 구급상자를 닫은 세정이 가벼운 어투로 제안했다.

신혼집이라고 일컬어진 곳은 별관의 뒤편으로 지금은 세정이 혼자 거주하는 곳이었다. 별관과 크기는 비슷하지만, 별관 앞에서는 그 모습이 하나도 보이질 않으며 세정의 모친인 소희가 생전 좋아하여 이름을 직접 지었는데, ‘유성채’라고 그랬다.

이 유성채가 신혼집이 된다고…….

“아니요. 괜찮아요.”

어차피 결혼하면 이 년이나 머물 집이었다. 구태여 남자의 존재감이 남은 방들을 눈으로 훑으며 지나갈 마음이 없었다. 정확히는 여유가 없었다. 아까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규칙적 심박이 거슬렸다.

호연은 그 마음이 티 나지 않도록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을 물끄러미 보던 남자는 따라서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천천히 다시 손을 올려,

“괜찮은 게.”

치맛자락을 천천히 내려주었다.

“참 많아. 백호연 씨는.”

그게 대답을 요구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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