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석훈을 통해 전달받은 상견례 장소는 북두 그룹의 저택이었다. 일전에 세정이 초대받았던 것을 이유로 삼아 대접을 하겠다고 그랬다.
이에 석훈은 좋아하면서도 난감해했다. 제가 아무리 미식을 선호한다고 한들, 북두 그룹에 비할 것이나 되겠냐고. 집밥이 거기서 거기라고 하는 연실에게 호통을 치며 가서 창피하게 놀란 얼굴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정원이 운동장 수준이네.”
그러는 본인이 가장 크게 경탄하면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모두가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에토프색의 벽으로 휘감긴 거대한 저택이었다. 그 주변으로도 기한규 회장의 직계 가족들이 살고 있어 북두 그룹타운이라고 불리는 동네였다.
북두 그룹에서 보내준 차량이었음에도 경비원들에게 신원을 확인받고 한참 올라가야 했다. 차창 너머로 잘 관리된 정원수나 아름다운 불빛을 내는 조명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백여진.”
석훈은 차창을 내려 정원수를 향해 손을 뻗어보는 여진을 엄하게 불렀다.
원하던 대로 결혼이 성사되었는데도 석훈은 나날이 과민해져 갔다. 가끔은 연실이 거실에 나와 펑펑 울어버릴 정도로 날카롭게 굴어서 식사라도 함께하는 날에는 살얼음을 걷는 듯 분위기가 위태로웠다.
호연은 사탕 껍질 같은 치맛자락을 손으로 말아 쥐었다. 화사한 아이보리색 코트까지 차려입었건만 마음은 밝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을 잘 흡수하는 색감인 것만 같았다.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차가 부드러이 정차하는 감각이 있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공손한 기사의 음성을 들으며 호연은 고개를 들었다. 문의 손잡이를 쥐자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순간 손이 쓱, 딸려가면서 몸이 기울었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호연에게로 눈을 맞추려 비스듬히 고개를 둔 세정이 손을 내밀었다.
차가 진입할 수 있는 길에서 내려 본관을 지나고 별관까지는 걸어야 했다.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세정이 찬찬히 인사를 건네곤 앞섰고 석훈과 연실, 호연과 여진이 뒤섰다. 세정은 간간이 뒤를 돌아보면서 무심한 듯 다정하게 말했다.
담장으로 구분하던 본관과 별관은 그를 허물어 가운데 연못을 파고 다리를 두었으며 5월이면 그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싼 빨간 장미가 피어 절경이라고, 그 늦봄에 다시 초대하겠다고. 지금은 초라하다고.
이에 다소 긴장해 있던 석훈이 아니라며 손사래 치며 웃고 석훈이 웃으니 연실이 따라 웃었다.
호연은 세정의 말에 다리를 지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달빛을 닮은 조명만이 흐리게 연못을 비췄다. 그런데도 본 적 없는 풍경이 두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새빨간 장미꽃이 하늘을 머금어 푸르스름한 연못 주변으로 만발하는 풍경은 두 눈으로 보지 않아도 완벽히 아름다웠다.
그렇게 잠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첨벙―
눈앞으로 그려졌던 풍경이 찢어졌다.
검은 연못에 빠진 여진이 두 팔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연못의 물결이 커져 꽤 위태롭고 위급한 상황처럼 보였다.
“엄마아!”
미끄러운 돌을 밟은 것인지 한번 푹, 바닥으로 꺼졌던 여진은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연실을 불렀다.
“어머, 여진아!”
너무 놀라면 순간적으로 모든 사고가 정지한다고 하던가.
저만치 갔던 연실이 부름에 딱, 멈춰 섰다. 그 옆에 선 석훈은 아연한 표정으로 그 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아!”
찰박찰박, 수면을 때리는 거친 허우적거림이 적막을 갈랐다.
잠시간 굳어 있던 호연도 다시 한번 들리는 음성에 정신이 들었다. 모든 게 멈춘 순간 속에 저 홀로 움직이는 세정이 보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를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호연은 급히 움직였다. 연못 위로 이어진 다리를 지나 그를 둘러싼 돌 위로 무릎을 꿇었다. 짜릿한 통증이 일 정도로 아픈 것을 이를 사리무는 것으로 참았다. 원피스가 젖건 말건 상체를 가능한 한 깊이 숙였다. 손을 바싹 내밀었다.
“언니, 언니! 손! 손, 잡아!”
분명 손이 닿을 듯했다.
그런데,
“어……?”
쳐낸다.
내민 손을 잡는 듯하다가 멀리 밀어낸다. 손가락 끝이라도 잡아보려는 호연의 빈손이 애처로웠다.
아찔한 상황이 분명한 가운데, 호연은 노골적으로 제 눈을 피하는 여진이 의식됐다. 이게…… 뭐지? 이해하지 못한 호연의 손이 차마 거둬지질 못하고 허공에 매달렸다.
그때 호연의 손 옆으로 것보다 더 긴 팔이 이어졌다. 그 손을 여진이 주저 없이 잡았다. 당기는 대로 쉽게 끌려왔다.
눈치를 챘을까? 간을 보듯 초조한 여진의 눈을 마주하자 호연은 설핏 웃음이 샜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순간, 바람이 휙 불었다. 그 작은 충격에 호연의 몸 또한 중심을 잃었다.
아.
호연은 아뜩한 숨을 삼켰다. 몸이 기울며 검은 연못 속에 저를 들여다봤다. 뻗어져 있던 손이 이미 성나있던 수면을 할퀴는데,
“조심.”
납작한 하복부를 바싹 당겨 안아오는 큰 몸집에 갇혔다.
호연은 허억, 숨을 들이켜면서 고개를 돌렸다.
단단한 팔뚝이 갈비뼈를 부드럽게 압박했다. 찬 공기가 넉넉하게 폐부를 채웠다. 얇은 레이스 블라우스 안으로 흐르던 식은땀이 순식간에 식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맞닿은 등줄기로 남자의 체온이 고르게 퍼졌다.
문득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아주 옅어서, 이렇게 몸을 딱 붙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정도의 미약한 내음. 그마저도 향수에 묻혀 가시를 샅샅이 발라내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는 내음.
그런 향을 맡았다, 내가.
호연은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이 오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입을? 여진이 아직 물속에서 첨벙거리고 뒤에는 연실과 석훈이 있는 곳에서?
그러면서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콩.
가볍게 이마로 충돌하는 단단한 게 있다.
“괜찮냐고.”
귓가로 나직하게 흐르는 음성에 호연은 슬쩍 눈을 떠 확인했다.
이마와 이마가 붙은 온도. 치켜 올라간 눈썹과 날카롭게 이어지는 눈매.
세정은 호연의 흔들리는 동공을 살피듯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이마를 떼어냈다.
“괜찮네.”
그렇죠? 묻듯 고개를 갸웃했다.
“여진아!”
호연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뒤늦게 달려온 연실이 여진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놔 봐, 여진아. 놔야지.”
“이게 웬 소란인지. 이렇게 덤벙거리는 애가 아닌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옷이 구겨진 건 아닙니까?”
연실이 여진을 끌어올리느라 갖은 용을 쓰는데 석훈은 세정에게 냅다 허리부터 숙였다. 이에 호연을 압박하던 묵직한 팔뚝이 풀렸다. 동시에 갑갑하게 막혀 있던 생각들이 방류됐다.
이곳과 저곳은 다른 풍경 같다.
세정은 물끄러미 그 꼴을 보더니,
“괜찮습니다.”
손을 저었다. 그러곤 일어나려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멈췄다.
세정의 소매를 꽉 그러쥔 여진의 마른 손가락이 희게 질려 있었다.
“…….”
그 손을 호연이 뜯어냈다.
그 장면을 훤히 본 석훈이 탄식했다.
“저희 애가 물 공포증이 있어서…….”
“…….”
“그래서 잡았나 봅니다. 그래서.”
“따님부터 도와주세요.”
세정이 한숨을 쉬었다. 어투가 언뜻 한심하다는 듯이 들렸다. 예, 예. 하고서 곧장 여진을 끌어올리는 석훈의 모습은 또 어떻고.
여진은 스며드는 한기에 하얀 숨을 토해내면서 벌벌 떨었다. 그 뒤로 남자의 전화 한 통에 달려온 사용인들이 있었다.
담요에 싸인 채 한 걸음 한 걸음 겨우겨우 나아가는 여진을 보며 세정은 눈썹을 갉작였다. 연실과 석훈은 눈치를 봤다. 일단 가시죠, 라는 말이 아니었더라면 얼마간 한참을 더 기다리기만 했을 거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호연에게도 시선을 한 줌 나눠준 세정은 다시 앞장섰다. 호연은 그 뒤를 따랐다. 축축한 원피스 끝에서 튄 물방울이 복사뼈를 타고 흘렀다.
* * *
도착한 별관은 가히 아름다웠다. 그래서 수치를 잠시 잊었다.
외양도 그렇거니와 내부 또한……. 아,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에만 둘러싸인 채 살 수 있지.
미술품을 위한 공간인 것만 같았다. 작은 미술관, 내지는 수장고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호연은 책으로, 인터넷으로나 봤던 작품들의 실물에 작게 황홀해하며 다이닝룸으로 들어섰다.
한규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석훈이 납작해진 채 공손히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회장님.”
그러곤 한규의 옆에 선 여자에게도 악수를 청하며 소개를 원했다.
“이쪽은 세정이 고모.”
세정의 모친이 요절하였단 사실은 공공연한 것이었으므로 상견례에 세정의 고모가 나왔다는 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 예.”
턱에 딱 끊어지는 단발을 귀 뒤로 고정한 윤진이 선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고모님이시면 혹시 이틈 미술관 기윤진 관장님?”
“맞습니다. 아시네요?”
“저도 미술에 관심 많습니다.”
석훈의 너스레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앉으세요.”
“예, 감사합니다. 아, 첫째 딸이 조금 늦는데……. 죄송하지만,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음식 바로 가져다줘요.”
“네, 회장님.”
상견례는 어른들의 이야기였고 호연이 낄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잠시간 저와 세정의 존재가 흐려진 듯한 분위기에 그제야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라봉 셔벗입니다.”
호연은 제 옆자리에 주인을 기다리는 식기들을 봤다.
……여진은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고의성이 다분한 짓이었다. 그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식을 아는 사람이기에 그만할 줄 알았다. 한동안 묻지도 않기로서니. 마주칠 일도 없었지만.
호연은 입맛을 돋워주는 상큼한 한라봉 셔벗을 앞에 두고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먹지 않을 순 없어 노란 얼음 결정들을 살짝 떴을 때였다.
다이닝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