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수술 잘 끝났대.]
빠드득빠드득, 가죽 의자를 가득 쥐고 있던 손에 한순간 힘이 빠졌다.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미국에서 치료받는 민형의 수술 날짜가 어제였다. 시차가 있으므로 새벽이 지나면 당연히 수술 경과를 알게 될 줄 알고 호연은 밤을 새웠다. 그러나 그러고도 꼬박 열두 시간이 더 지나 연락을 받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빠는 깨어났어요?]
민형이 아니라 석훈에게로 가는 메시지였다.
어떤 날은 민형의 사진을 받아보았는데, 울고 말았다.
너무 말랐잖아.
아직도 어린 날, 젖살이 내리지 않은 그 얼굴이 아른거리는데 지금 민형의 얼굴은 병색이 짙었다. 희미하게나마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은 동생에게 찍어 보내는 것이라고 애써 웃은 것이 확실했다.
호연은 그 사진을 보고 울고 또 울었다. 그러라고 보내준 사진이 아님을 알지만, 복잡하고 막막하고 또 미안하며 속상한 감정이 심장을 휘도는 순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호연은 민형을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실제로 보고 싶었다. 뼈에 딱 달라붙은 듯 뱀 가죽 같은 피부를 쓸어 만져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 결혼이 무사히 성사되어야 한다.
무거운 마음이었다.
그와 반대로 가벼운 진동에 호연이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아직이구나.
뒤이어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자리자리한 울림이 번졌다.
[북두 그룹에서 상견례 얘기가 나왔어.]
드디어. 지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예고한 바였으니 놀랄 건 아니었다.
그저 기쁘게 콧김을 내뿜으며 흥분하는 석훈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세 개의 날짜를 정해줬는데 어느 날이 괜찮니.]
고만고만한 날짜 세 개가 이어졌다. 호연은 가장 이른 날짜를 골라 답장을 보냈다.
석훈이 원하는 것이 신속한 결혼일 테니까. 한시가 급한 엔마트 사정을 모르는 게 아니니까. 이미 증권가 지라시를 통해 유포된 결혼 임박 소식은 마음이 들뜬 석훈의 작품이었으니까.
토끼가 환하게 웃으며 달리는 이모티콘이 답장으로 돌아왔다.
호연은 지금이 태어나 가장 마음 편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마음을 놓고 살아본 일이 없었다. 천사보육원을 오기 전도 당연하거니와 천사보육원에 와서도, 입양되어서도 늘 부채감에 시달렸다.
민형의 생사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심장을 푹. 누군가의 기회를 뺏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푹.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일방적인 도움을 받고 살 수 없는 속성이었다. 그런데 생애 전체가 갚아야 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으니 늘 조마조마한 가슴이었다.
그래서 지금이 오히려 좋았다. 제가 도움을 갚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 * *
세정은 엘리베이터 특유의 격자무늬를 눈으로 쓱 그었다.
유독 피곤한 날이었다.
최근 불이 났던 북두 홈푸드의 파주 공장을 둘러보고 생산 지연에 따른 악재들을 살피며 화재를 진압하려다 경미한 부상을 당한 공장 직원들의 병문안을 통해 쾌유를 바라는 하루였다.
종일 현장을 둘러보고 쉴 틈도 없이 다시 본사로 돌아와 곧장 보고를 마쳤다. 또 제가 아니고서는 대신 해결할 사람이 없는 업무를 쳐내니 쉽게 자정을 넘겼다.
따라서 퇴근하지 못한 신원이 제 상사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틈 미술관의 소장품전이 될 1층에 전시할 작품들은 전부 확정이 되었고요. 섹션은 세 개, ‘피상’, ‘내막’, ‘시선’입니다. 기윤진 관장님께서 도움을 정말 많이 주셨습니다. 특히 문형준 작가의 ‘산 자 애도’까지 허락해 주셨으니까요.”
기한규의 누나이자, 기세정의 고모인 기윤진은 북두 문화재단의 사립 미술관, 이틈의 관장이었다.
또 기명균의 사망 이후 계열사를 두고 싸우는 남매들 사이에서 북두 문화 재단만을 위해 숨을 죽인 사람이었다.
이후 한규가 북두 그룹의 총수로 올라서면서 그에게 반기를 든 남매들이 모두 실각하는 한편, 몸을 낮춘 윤진만은 제법 존중해 주었다. 그 결과로 북두 문화 재단의 통솔력은 오로지 윤진만이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윤진이 한번 결정한 바는 절대적이되, 그런 그가 절대 내주지 않겠다고 하던 문형준 작가의 ‘산 자 애도’가 온 데에는 세정의 집요함이 있었다.
“고모님께 연락드립시다, 감사하다고.”
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더비우의 구두를 선호하신다고 들어 여러 후보군 준비해 두었습니다. 결재해 주시면 바로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순히 협력에 대한 감사겠나. 앞으로 가는 길에 도움이 되겠다고 공식화해준 것에 대한 감사다.
구두는 의례에 불과하고 세정이 한규의 뒤를 이어 북두 그룹의 총수가 된대도 윤진의 자리는 지켜준다는 말이다. 그런 약속이다.
“그렇게 합시다.”
세정이 한창 공을 들이는 작업은 파라스 호텔 20주년 기념 전시회였다. 공식적으로는 파리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책임지는 일이 되는 것이며, 미술에 심취한 한규가 가장 기대하는 행사기도 했다.
기혁중에서 기명균, 기명균에서 기한규로 이르는 동안 미술품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순수함에서 탈세와 비자금 조성을 위한 탁한 마음으로 오염되기는 하였으나 본질적으로 미술품을 동경하는 마음만은 여전한 법이었다.
그에 반해 세정에게 미술품은 그저 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이 층에는 김산, 김희운, 박상진, 차인영, 황라진, 헤캐넌, 플로이드…….”
아래로 푹, 꺼지던 감각이 멈추고 엘리베이터 문이 두 개로 갈라졌다. 세정은 미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머릿속이 웅―, 하고 멍해진다.
잠시 말을 끊었던 신원은 앞서가는 세정의 뒤를 따르며 차인영의 합류를 기쁘게 설명했다.
“업데이트된 소식들은 아침에 받아보실 수 있도록 정리해서 올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으슬으슬한 공기가 감도는 지하 주차장으로 또박또박한 구두 소리만 파동같이 번졌다. 그 규칙적인 소리에 현기증이 밀려났다. 세정은 피곤과 현기증이 뭉쳐 있던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이틀 전, 신원을 통해 연락이 왔다. 파라스 호텔 20주년 기념 전시회의 전시를 거절한 이유가 장 폴임을 전하던 인영의 메시지였다.
인영은 개인적인 이유로 장 폴과 같은 공간에 전시됨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장 폴보다는 차인영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므로 그리 처리했다. 인영을 제하고는 차순위가 매겨져 있어, 세정이 소장한 황석찬의 미술품을 전시하기로 결론이 난 터였다.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림자처럼 발소리마저 흉내 내던 신원은 세정의 차가 가까워지자 걸음을 달리했다. 운전기사가 일찌감치 퇴근해 세정이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게 썩 내키지 않았다.
새벽같이 파주로 향했던 세정이었고, 저녁을 챙기지 말라고 했으니 그가 먹은 건 파주에서 먹은 부실한 점심 도시락 하나가 다였다.
게다가 근래는 살인적인 격무에 시달리지 않았나. 그런 세정을 서포트하는 제 업무도 꽤 고된 편이었는데, 그 옆을 지키다 보면 엄살 따위는 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됐습니다.”
그런데 세정은 단박에 거절하며 걸음을 옮겼다.
“야식이라도 챙겨 보내 드릴까요? 삼계탕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신원은 뽀얀 국물에 통통한 영계를 푹 고아내어 야들야들한 살이 일품인 삼계탕집이 24시간 영업을 시작했다고 말이라도 꺼내 보려던 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신원과 세정의 구두 굽이 자아내는 울림보다는 한참 얇고 가벼운 울림이 바닥을 스치며 다가왔다.
동시에 맑고 차분한 음성이 인사를 건넸다. 여자는 반듯한 자세로 서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인 채였다.
세정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서 비서님.”
여자는 세정이 자신을 스쳐 지나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신원을 구태여 콕, 집었다.
신원의 표정으로 눈에 띄게 힘이 들어갔다. 다물린 입매는 열릴 줄 몰랐고 여자 또한 신원의 대답을 받을 생각일랑 없었는지 다시 똑바로 걸어 나갔다.
공간을 울리는 다른 달칵거림이 서서히 멀어졌다. 신원은 그제야 찡그렸던 표정을 폈다. 운전석 문을 여는 세정을 응시했다.
“한수연 팀장이죠?”
굳이 이런 건 한 번 더 확인하시지.
차에 오르기 전 확인하는 세정을 향해 신원은 네, 대답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아침에 뵙겠습니다. 상무님.”
신원은 몇 걸음 물러나 허리를 굽혔다. 세정의 차가 부드러이 지하를 빠져나갔다. 그런데도 신원은 한참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크게 숨을 뱉으며 한 지점을 쳐다보았다.
수연을 태우고 사라진 엘리베이터를.
* * *
붉은 신호 아래 차가 정지했다.
숨이 트인다. 목을 강하게 물고 있던 넥타이를 조금 끌렀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과 덤덤한 어둠 위로 잔상이 어른거렸다.
떠오르는 기억들이 그저께의 일인지, 어제의 일인지 불분명했다. 어제의 결정이 몇천 명의 밥그릇을 뺏기도, 사료를 부어주기도 하는 상황은 수많은 고민을 낳고 시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익숙한 피로감을 느끼며 세정은 목뒤를 주물렀다.
집으로 돌아가면 새벽 네 시, 씻고 나오면 다섯 시, 두 시간 남짓 잠들 수 있으려나.
근래의 과한 일정은 파리 전근 일자가 급히 잡히면서였다. 안 그래도 쉴 틈 없던 일정에 끼얹어지는 과중한 프로젝트는 이미 실패했던 파라스 호텔의 해외 진출을 재시도하는 건이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것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철수할 수밖에 없던 중국에서의 실패는 기술적인 실패가 아니라, 시기 선정의 오류라고 판단한 것이다.
파라스 호텔보다 한 수 위라고 평 받던 K그룹의 호텔 K를 세정이 앞지른 데 기대를 걸어 보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만 하면 북두 그룹의 핵심을 담당하는 북두 전자로 넘어갈 수 있겠지.
그러면 이제, 그토록 염원했던…….
빨간색 불이 꺼지고 초록색 불이 켜졌다. 세정이 가볍게 힘을 주어 액셀을 밟자 쭉― 차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플라타너스가 줄 선 도로에는 막힘이 없었다. 바람에 흔들려 사락사락, 거릴 잎들의 소리 대신 여자의 음성이 귓가로 감겨왔다.
실제로는 신원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던 메시지였다.
[안녕하세요, 백호연입니다. 파라스 호텔 20주년 기념 전시회 관련 차인영 교수님 긍정 답변 전달하고자 연락드렸습니다. 이 연락처를 교수님께 알려드려도 괜찮을까요.]
여자의 음성이 뭇 여성들의 것보다 다소 낮고 발음이 분명한 만큼 텍스트 또한 단정했다.
텍스트만 그랬나. 그림도 그랬지. 적은 물로 조금씩 눌러 그리는 세심한 터치가 여자의 얼굴을 그렸다.
문득, 궁금하다.
장 폴과 차인영은 무슨 관계일까.
차인영을 설득한 백호연의 말은 무얼까.
아니…….
다시 한번 신호등 아래 차가 정지했다. 톡, 토독, 핸들을 두드리는 소리는 여린 빗줄기 같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세정의 얼굴이 조용했다.
상견례까지는 일주일. 보낸 세 개의 날짜 중에 호연은 가장 가까운 날짜를 골랐다.
일주일. 일주일이 남았다, 이거지.
세정은 핸드폰을 쥐었다. 최근 통화 목록 가장 위, 신호음으로 최신곡이 흘렀다.
―네, 상무님.
의아한 티가 물씬 느껴지는 신원의 어투가 건너왔다.
세정은 잠시간 고민했다.
“어디예요?”
―어……. 아직 주차장입니다.
생각을 마쳤다.
“기다려요.”
―네?
“삼계탕이나 같이 먹죠.”
―네…….
차를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