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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15화 (15/98)

제15화

“내 마음대로 시키려다가, 먹고 싶은 게 따로 있을까 봐.”

봐요. 하고 눈짓하는 탓에 호연은 메뉴판을 내려다보았다. 메뉴판 모서리에 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객 하나하나에 맞추어 메뉴판을 새로 제작하는 모양이었다.

코스명이 낯설지는 않았다. 여진이 몇 번이나 달채 예약에 실패하고 제게 하소연한 덕이었다.

호연은 여진이 먹고 싶다던 코스를 기억해내려고 노력했다. 아마……. ‘하늘’이었던 거 같은데.

찾았다.

“하늘이요.”

“그럽시다.”

때를 맞추어 곧은 음성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세정은 하늘로 두 명 몫을 주문했다. 그 뒤가 허전했다.

“술은 안 시키세요?”

“차.”

간결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호연은 쉽게 수긍했다. 그치, 신원이 저를 데려다주고 퇴근이라고 했으니, 남자는 직접 운전을 해서 돌아가야 하는구나.

“그리고 백호연 씨는 내 앞에서 술 안 마셨으면 해요.”

“……네?”

“술버릇이 나빠. 기대고, 치대고. 원래 그래요?”

볼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덩이 진 불꽃이 일순 튀어 오르는 듯했다.

“그건……! 허리를 감싸 안으시니까!”

“기대고 치대니까 안은 거지.”

“술 취한 여자가 기대고 치대면 다 허리 감싸서 안아주세요?”

“…….”

세정이 무언으로 대답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냐는 눈빛이었다. 제가 잘난 것을 뻔히 알고 저를 유혹해오는 행위를 부러 거절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입맞춤도 그랬어. 능숙했잖아.

호연은 허, 한숨을 터트리며 할 말을 잃었다. 순식간에 열이 내렸다. 세정은 찻잔을 들어 녹차를 입안에 머금었다. 일련의 행위가 모두 정해진 것처럼 자연스럽기만 했다.

호연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면서 요요하기만 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정의 눈길도 머물렀을 공간에는 달빛을 받는 연못이 있었다. 바람 한 번에 연못이 얼룩지며 달무리처럼 좌르르, 번졌다.

물고기도 있을까? 고개만 살짝 빼 들여다보았다. 고작 그 정도로는 검은 물이 된 연못 깊은 곳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물고기 밥을 받아다 줄까요.”

바람 때문에 물결이 치는 건지, 물고기의 헤엄 때문에 수면이 울렁거리는 건지 한참을 집중하며 바라다볼 때였다.

“아니요. 괜찮아요.”

말을 마치자 문밖으로 실례하겠습니다, 하는 말이 들어왔다. 세정은 손을 뻗어 창을 닫았다.

코스는 차분히 진행되었다. 입은 열심히 저작 운동을 하되 맛이 있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고, 쫑긋거리는 귀로 식기 스치는 소리만을 담았다.

조금도 남기지 않고 싹, 먹은 뒤에야 직원이 테이블을 정리했다. 이제는 추가로 주문한 진하고 뜨거운 아메리카노 두 잔만이 테이블에 남았다.

뒤이어 태블릿 하나도 같이 놓였다.

“할 얘기가 있죠, 우리.”

배불리 먹여 살찌웠으니 잡아먹어야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호연은 채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들이 목구멍을 꽉 막은 채 정지한 것 같았다. 태블릿 화면에 띄워진 ‘혼전 계약서’ 다섯 글자를 보는데 침을 삼키는 법도 잠시 까먹었다.

결혼의 첫 페이지가 될 계약서였다.

“확인해봐요.”

태블릿을 돌려주기까지 하는 친절 끝으로 보이는 남자의 손가락이 무심결에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제가 제시하는 조건에 자신이 있어 보였다. 그도 그랬다. 이혼의 귀책사유를 모두 본인에게 있는 것으로 하고, 재산 분할을 하지는 않지만, 위자료로 주어지는 금액이…….

호연은 동그라미의 숫자를 세어보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많다고도 말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게 나의 가치라는 말이기에. 엔마트를 대표해서 나온 나의 가치가 이 정도. 내 평생 중 이 년의 가치가 이 정도. 너무 많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후려치는 행위에 불과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마저 읽어나갔다.

비밀 유지 조항이 있었다.

대놓고 적히지는 않았으나 갑과 을이 분명하게 보였다.

지금도 돈이 없어 휘청거리는 엔마트가 피해 추산 금액의 3배를 위약금으로 갚아야 한다니. 갚을 수나 있을까. 놀란 마음에 잠시 심장이 두근거리다가도 가만히 비참했다.

어차피 이 결혼 생활은 내내 비참할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너무 작은 것에도 마음을 쓰지 말자.

섬세하고 예민한 천성을 애써 억눌렀다.

마지막은 서명란이었다. 위아래로 쓰인 기세정, 백호연. 호연은 그 두 이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세정과 눈을 맞추었다. 곰곰이 호연의 뺨 따위를 살펴보던 세정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사업적인 건 백 대표님과 이야기 나눌 건데, 차인영 화백 건은 백호연 씨가 책임을 집시다.”

“네,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백호연 씨가 기소라 초상화를 그렸던 거, 그건 숨깁시다.”

“……왜요?”

“귀찮을 일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백호연 씨도 요구 사항 있으면 말해요.”

더 묻지 말라는 식으로 유연하게 꺾는다. 살짝 좁아졌던 눈썹 사이가 금세 매끈해졌다. 호연은 남자가 구두로 내놓은 요구 사항까지도 다시 되짚었다.

군더더기 없다. 오히려 과분한 계약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좋다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늘 저를 시험하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더욱.

양부모와 민형. 그리고 천사보육원을 위한 돈을 제하고, 제게 필요한 것.

……완전한 독립.

“학업을 이어가고 싶어요.”

문득, 남자의 손목 위로 반짝이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낯설지 않았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학교 아래 해장국집 앞.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웃던 남자.

“뭐 어려운 거라고.”

그때처럼 웃는다.

“그래서 제가 저인 게 밝혀지지 않았으면 해요.”

“정확히?”

“저희 동기들이 제가 결혼하는 걸 몰랐으면 해요.”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의 살과 가시를 발라내는 것처럼 잠시간 헤아림의 시간을 가졌다. 이내 눈만큼이나 가늘게 웃곤 한쪽 팔을 뒤로하여 몸을 젖혔다.

단정한 기색은 순식간에 흩어지고 난폭한 기질을 숨긴 위태로움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 들키면 아빠랑 결혼했다고 하게?”

“아……빠요?”

호연은 세정이 툭, 던진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라는 호칭은 아주 어릴 적 이후에 제대로 사용해본 적 없고 석훈도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아빠?

아.

“아, 아빠가 사주신 거…….”

등 뒤에서 듣고 있었지.

“기분 나쁘셨어요?”

남자가 찡그리듯 눈썹을 모았다가 풀어내고 고개를 저었다.

“기분 나쁠 게 뭐 있나.”

그러면 왜 잊지 않고 지금 꺼내는 건데.

“아.”

왜?

“딸을 본인 여자 취향으로 입히는 싸이코 아빠가 된 기분.”

“…….”

“그게 좀 별로.”

목이 졸아붙는 것 같았다.

무슨 옷을 입었는지 잊었다. 커피 잔의 손잡이를 쥐고 있다가 떨어진 손의 소매는 검정인데, 상상이 되질 않았다.

호연은 떠듬떠듬 물었다.

“……직접, 고르셨어요?”

남자는 여태껏 무얼 들었냐는 듯이 고개를 까딱, 했다.

“그래서 지금…… 제가 기세정 씨 취향이에요?”

“완벽히.”

세정이 고개를 기울이며 느슨하게 웃는다.

남자의 확인했을 제 스타일링 서류.

순서를 매겨 몇 번째로 두고 고민했을까.

혼란스러운 호연의 표정을 훑은 세정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싫어하지 말아요. 백호연 씨가 내 취향대로 입을 일은 얼마 없을 거니까.”

“……네?”

세정의 동공에서 찰랑거리던 호연은 반 박자 느리게 되물었다. 세정은 허리를 세워 앉으며 잠시간 눈을 내리까는 것으로 호연을 동공 속에서 비워냈다.

“파리에 갑니다.”

“혼자서요?”

호연은 놀라 되물었다. 그러곤 제게서 나간 음성이 너무 새된 것 같아 숨을 섞었다. 세정은 테이블에서 태블릿을 내리며 당연하다는 듯 반응했다.

“그럼요.”

“…….”

“같이 가고 싶어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됐습니다.”

세정은 시기를 가늠했다.

“이혼 서류도 얼굴 보고 주고받기가 어려울 수 있겠네요.”

“안 돌아오세요?”

“설마.”

“언제 가시는 건데요?”

“결혼식 다음 날?”

분명 좋은 일이었다. 마주하기 불편한 남자를 결혼 생활이 지속되는 내내 보지 않는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남자와 부대끼면서 함께 살아야 할 시간을 걱정하지 않았나. 같은 집에서, 언젠가는 한 번쯤 마주칠 넓은 집에서, 머무를 나날들을 크게 고심하지 않았나. 그러므로 참 안도가 되는 말이 아닌가.

“가족 모임은 참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끔 경조사를 제외하고.”

“……네.”

“그 외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요.”

연애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하고 싶은 건, 다.

“숨기고 싶은 남자랑 하면 되겠네요.”

네? 호연이 채 되묻기도 전이었다.

“상견례 날짜는 백 대표님 앞으로 연락할게요.”

감당하기 힘든 단어들의 연쇄였다. 이쯤에서 대답을 하려고 하면 다시 쏟아지고 머릿속이 자욱해지고.

“……아, 네.”

“그만 일어나죠.”

담백한 통보와 네 혹은 네? 따위의 대답만이 남발하는 자리였다. 첫 만남과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오히려 지금 상황이 더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세정이 몸을 일으켰다. 호연은 여전히 앉은 채로 남자의 기다란 다리부터 시선을 끌어올렸다. 목을 젖힐 수 있는 만큼 가장 빳빳하게 당긴 후에야 남자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고개를 까딱, 왜 일어나지 않냐는 것 같다. 아침보다 더 나른한 것도 같고 도리어 밤이 되니 선명해진 것도 같은 기운을 반복적으로 느꼈다.

호연이 후천적으로 배운 눈치는 늘 유용하게 쓰였다.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굴어야 할지를 잘 알려주었다. 그런데 세정의 앞에 서면, 도통 알 수 없는 기류에 놓이고는 했다.

두 가지 이상의 의도를 담는 표정, 그러므로 파악할 수 없는 감정. 따라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늘 갈피를 잃는 마음. 돛을 잃은 조각배가 된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앞으로 몇 번 마주칠 일이 없으니 조이면 조이는 대로, 풀면 풀어지며 그저 흘러가도록 두면 되는가.

속이 얹힌 듯 더부룩하게 불편하다. 이 기분을 함께인 내내 느낄 텐가.

“제가 기세정 씨를 어떻게 대하면 될까요.”

이 질문이면 될 것 같았다. 관계를 제대로 짚어주면 불편하게 움튼 감정도 정리가 될 듯했다.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아내로 충실하면 될까요. 아니면 어디서든 사업적 파트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가요.”

혼전 계약서의 내용은 사업적 파트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나 자꾸만 남자가 베푸는 친절이나 다정한 말투 따위가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그리고 일전의 입맞춤.

사업적 파트너라면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이 아닌가.

세정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곤 혀로 볼을 밀어가며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어느 쪽으로 대답하든 나한테는 불리하잖아.”

이 질문의 근원이 입맞춤에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제 실수임을 순순히 시인하는 태도였다.

“그런 잘못이 있는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아니, 빠져나가려는 술수다.

“백호연 씨도 하고 싶은 대로 합시다.”

곤란하다.

본인이야, 선 한 번 넘어도 일이 끝장나지 않지만, 호연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니. 비겁하지. 비겁하잖아.

동시에 지극히 사업적인 남자라는 생각을 했다. 허무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호연은 잠시 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 호흡했다. 어딘가 뻐근하다.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심장 뒤 깊은 속살이 묵직했다.

왜.

툭툭, 아주 커다랗고 단단한 것에 균열이 이는 것 같은 생경한 감각. 호연이 당혹스러운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던 찰나였다.

허리를 굽힌 세정이 호연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호연의 얼굴로 그림자가 얼룩졌다.

맞잡는 서늘한 손. 호연이 움찔거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작은 손을 쥔 세정은 엄지로 호연의 연한 살을 문질렀다. 호연이 간지러움을 못 견뎌 살살 몸을 비틀었다. 세정은 호연의 근육이 튀어 오르는 것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나를 많이 이용해요.”

어떤 방식으로든, 충분하게.

“아…….”

나직한 탄성.

세정이 손을 당겼다.

산산이 부서지는 빛의 파편에 더 가까워진다. 그런데도 시야는 온통 검정이다. 그 속에 고개를 숙여 저를 보는 남자의 표정은 어둠에 잠겨 흐릿하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기꺼이 이용당해주겠다는 말.

그 태도까지도 오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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