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기 상무 회사에 복귀하는 대로 다시 올려 보내라.
한규의 명령을 신원이 전언했다.
세정은 상무실에 딸린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걷어 올린 셔츠를 내렸다. 커프스 링크를 고정하고 넥타이핀을 점검하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넓은 거울이 액자라도 된 양 그림이 나타났다.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호연과 잠시간 호응 없는 거대한 침묵. 한규의 눈을 피하지 않던 하룻강아지 같은 눈동자.
두려움은 숨기지 못해서 눈 밑이 자르르, 떨리는 게 보일 때쯤에야 세정은 호연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웃음이 나왔다.
말문이 막힌 부친의 모습은 처음 봐 그랬나.
어떡해요? 하고 묻듯이 잔뜩 내려간 여자의 눈꼬리를 봐서 그랬나.
아무래도.
세정의 눈이 거울을 쓱 훑었다. 그림이 쉭, 뱀의 혀처럼 바뀌었다.
의외로운 눈초리가 떠다니던 해장국집.
호연은 세정과 눈이 마주치자 금세 눈을 깔았다. 안다. 여자가 저를 불편해하는 것. 어려운 상사처럼 대하는 것. 익숙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익숙한 일이 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까.
답을 구하고 싶은 문제는 아니다. 세정이 고개를 까딱였다. 또 한 번 그림이 지워지고 새로이 그려졌다.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는 여자를 두고 핸들을 쥐었을 때 문득,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오의 햇살을 고스란히 내려받은 여자가 웃는다.
……제 앞에서 웃은 적이 있던가. 슬쩍 미소라도. 거짓된 웃음이라도.
그게 중요한가.
그러면서도 차창을 내렸다. 여자의 입꼬리는 금세 주저앉아서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래, 이런 표정이 익숙하다. 할 말 있으세요? 묻듯이 가만가만.
차창 밖을 내다본 것은 엉겁결, 내린 것은 무심결이었다.
이유를 찾고자 하면 많았다. 저녁도 같이 먹자고. 주요하게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예컨대 혼전 계약서를 협의하는 가장 큰 숙제가 남았지.
긍정하지 않아도, 강제로 긍정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은 적은 없으니까. 그런데 대답과 대답 사이에 낯선 음성이 끼어들어 잠시 흐름이 끊겼다.
급히 뒤를 돌아보고 다시 저를 보는 호연의 얼굴로 난감함이 움트는 것을 보면서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감추고 싶나, 나를.
속이고 싶나, 모두를.
그렇다고 아빠로 둘러대는 건, 좀.
세정은 제가 웃는 줄도 모르고 웃었다.
그러다가 화장실을 나와서는 식식, 나오던 웃음소리가 말랐고 상무실을 나와서는 예의 무기질적인 얼굴이 되어 바닥을 스치는 구두 소리마저 차가웠다.
* * *
한규는 세정을 세워두었다.
세정이 어리던 날, 폭력 한번 없이 서열을 정립하던 그때처럼 사물인 양 세워두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교정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다.
어린 세정은 부친의 업무를, 걸음을 지켜보고 그가 사라져 불이 꺼진 집무실을 지키는 걸 사흘간 한 적도 있었다. 죄송하다, 그 한마디를 하지 않아서.
문밖에서 소희가 잠긴 문을 긁고 애타게 부르고 벽이 허물어질 듯 남편을 붙잡아 오열해도 부자가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므로.
그 이후로는 소희가 죽고 은선이 집안에 들 적에 한 번, 소라가 죽고 한규가 사정을 덮은 것을 알게 되자 또 한 번, 손가락이 박살 난 뒤 마지막으로. 총 세 번, 삶의 고비마다 이리 세워졌었다.
백호연이 내 인생의 고비인가. 기필코 넘어야 하는 산 같은 것인가.
이전 세 번의 벌은 모두 세정이 잘못을 빔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잘못을 빌고 싶은가?
무엇을.
부친이 추천하는 기업인의 딸과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잘못을 빌어야 하나.
부친은 아직도 저를 찍어 눌러야 하는 어린 자식으로 인식하기에? 제 곁에 감시하는 사람을 붙인 것처럼 경계하고 두려워하기에?
세정은 언젠가 기꺼이 목을 내줄 것이다, 하는 한규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세정은 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으려고, 귀찮고 멍청한 짓을 하지 않으려고 백호연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리 세워진 게 시간 낭비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버릴 수 있는 건,
“잘못했습니다.”
자존심.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나 신념 같은 건 없었다.
어린 날에는 있었나. 절대 잃고 싶지 않은 것이.
그러나 피아노가 그러했듯, 영원토록 지킬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자존심이든, 신념이든 언제든 버릴 수 있었다.
또 모든 선택에 수만 명의 밥그릇이 달려 있으면 사사로운 것들은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된다. 이 자리가 그런 자리였다.
지극히 공적인 사과를 알아차린 한규는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세정을 보았다. 침을 뱉듯이 툭, 말을 던졌다.
“뭐가.”
“다요.”
한규는 맹랑한 구석이 있던 호연을 떠올렸다. 두 눈을 맞추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짓 고백을 하던 모습. 껌뻑 속아 넘어가리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 상황만 모면하자 생각했을까. 어떤 것이든 당돌하다. 당돌해.
고압적인 대치가 이어졌다. 누구도 시선을 거두지 않으므로 탁탁, 스파크가 튀었다.
대치는 세정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끝이 났다. 세정은 가볍게 바닥을 걷어찼다.
“의미 없는 시간 낭비, 그만하셨으면 합니다.”
“시간 낭비?”
“이런 게 시간 낭비가 아니면 또 뭡니까. 저도 북두 리테일 상무직을 달고 있는 임원인데요.”
해야 할 일이 밀려 있다는 말이다. 여기엔 반박할 여지가 없다.
애초에 명분도, 구실도 확실하지 않은 반대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한규는 세정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게 열이 챘다.
정곡을 찔린 한규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어쩔 셈이야.”
“결혼합니다. 고원 건설 둘째 딸이랑은 못합니다. 그 여자애는 스무 살이에요. 거기다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높던 여자의 물음들이 세정의 귓가로 쏟아졌다. 사실 그 애가 스무 살이고, 서른 살이고. 너무,
“시끄러워요.”
“그 나이대 애들은 다 시끄러워. 그리고 네가 데려온 애는 스물둘이야. 크게 달라?”
“다르죠. 이 년 뒤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갈 수도 있겠네요. 취직을 할 수도 있겠고. 그 시기에 한 살은 커요.”
“내 눈에는 별반 다르지도 않아.”
“……사회적 체면을, 좀. 생각하세요.”
사회적 체면……. 한규의 손가락이 우뚝 굳었다. 문득, 세정이 제 말을 어긴 횟수를 셌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세정을 직시했다. 여전히 눈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돌아가신 조부님과의 약속.”
마지막 한 발.
1대 회장, 기혁중의 북두 상회를 이어받아 북두 물산으로 개칭하고 영남권에만 국한되어 있던 영향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린 기명균.
한규의 부친이자 세정에게는 조부. 그의 유언은 소비재를 기반으로 하는 리테일을 사업 규모에 상관없이 1순위로 하라는 거였다. 하여 한규도, 세정도 시작은 리테일이었다.
그러니 한규는 북두 그룹의 근간이 되는 리테일을 망하게 두지 않을 것이고 끝내는 호연을, 엔마트를 반대할 수 없다는 걸 세정은 알았다.
“어기십니까?”
세정은 한규의 구둣발부터 머리꼭지까지 천천히 쓸어 살폈다. 상대적으로 노쇠한 남성을 보았다. 흰자위가 노래지고 실핏줄이 도드라졌어도 깨끗한 검은자위의 매서움은 세정이 어리던 날의 것과 흡사했다.
세정은 깊이 생각했다. 분명 소라의 어릴 적 초상화를 그렸던 아이가 백호연이라고 말하면 반응은 호의적으로 바뀌었을 테다.
그러나 세정은 그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소라를 그리워하는 한규의 마음이 병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병의 원인을 알아야 약을 내어줄 거 아냐.
“반대하실 이유 없는 거로 압니다.”
이쯤 했으면 좋겠는데. 고질적인 두통이 일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기분이 급격히 저조해진다. 그러나 한규에게서는 좀처럼 이만 가보라는 소리가 나오질 않아, 세정은 까만 동공에 갇힌 채로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너도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해야지.”
긴 시간의 침묵 끝에 내어진 문장. 세정은 피식, 웃었다.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이나 해본 적이 있는 분이 말해야 와닿지, 참.
“해주는 여자도 없습니다.”
게다가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의 근간은 사랑을 전제하는 일일 터.
그러나 세정은,
“하고 싶지도 않고.”
이 소란한 삶에서 사랑까지도 묵음 처리한다.
* * *
약속 장소에는 세정이 아니라, 신원이 있었다.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온 목적은 ‘기다리지 않도록 하는 일’에 불과했는데……. ‘누군가’가 중요했던 건 아니었는데, 왜.
왜.
상가가 즐비한 골목 끄트머리, 오르막길 끝에 ‘달채’가 있었다. 일식집이라 일본식 건물을 상상했는데 한옥인 것이 의외로웠다.
호연은 ‘달채’ 한글로 쓰인 간판을 보았다. 돌담 사이에 놓인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고 아기자기한 크기의 한옥은 작은 정원을 품에 끼고 있었다. 잘 다듬어지고 청소된 돌길을 걷자니, 청명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흩트렸다. 춥기는 해도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돌길 끝에 있는 한옥의 세살문 사이로 내부가 슬쩍슬쩍 보였다. 문에 설치된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이 안내를 도왔다.
모든 인테리어가 우드 톤과 화이트 톤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옥의 외관과 잘 어울렸다.
세살문 사이로 보이던 주방과 그를 둘러싼 세 개의 테이블. 셰프의 동선에 맞춘 ‘L’자 바. 그 안에 셰프 둘. 모두 여자였다.
호연은 제게로 닿는 빤한 시선이 느껴지자 주변을 살폈다. 주방 쪽 메인 셰프로 보이는 여자는 눈이 마주치자 선하게 웃으면서 묵례로 인사했다.
호연은 엉겁결에 고개를 내려보지만, 여자의 시선은 이미 다른 쪽으로 흐른 채였다.
기다란 복도로 진입한 호연은 빨려 들어간다는 감상을 받으며 룸을 안내받았다.
“먼저 와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당연히 남자보다 일찍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지런하게 놓인 구두가 남자의 존재를 확실히 드러내었다. 열어주는 문을 따라 호연도 천천히 구두를 벗고 섬돌을 올랐다.
문틈이 벌어지면서 창밖을 내다보는 남자의 옆얼굴이 보였다. 창문을 열어두어 겨울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남자의 정돈된 머리칼이, 테이블에 놓인 뜨거운 녹차에서 올라오는 김이 흔들렸다. 내리감았다가 다시 뜨는, 느린 눈꺼풀 운동의 연쇄였다.
문득 남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궁금했다.
사실 ‘늘’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게 자꾸 거절을 놓을 때도 몇 번의 기회가 남았는지 알려 주었으면 했다. 또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는지. 이 방법이 통하기는 하는지.
지금은 제 인기척이 났을 텐데 왜 아는 척도 하지 않는지.
호연은 세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봐, 다 들리는데. 호연은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바로 뺨에 닿는 겨울바람이 차갑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남자가 돌아봤다.
“늦었네요.”
친절하게도 웃으며 지각을 꼬집는다. 호연은 강의가 늦게 끝나서…….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또 어린애 같다는 대답을 받을까 봐, 조마조마한데 세정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데리러 오신다길래 그런 줄 알았어요.”
“아, 갑자기 붙잡혀서. 강의는 잘 들었고?”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는 속수무책으로 네, 하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호연은 자책하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세정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배고프겠네.”
“아니요. 배 안 고파요.”
그 모습에 호연은 조금 심통이 나고,
“안 고파요? 백호연 씨는 공부 열심히 안 하나 보다.”
세정은 장난치듯 말을 내뱉으며,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배가 고플 텐데.”
분위기는 다소 물기를 머금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