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앉아.”
한규의 명령에 세정은 도로 앉았다. 호연은 핸드백의 핸들을 아프게 쥐었다. 한규의 시선이 내내 제게 꽂혀 있는 까닭이었다. 세정에게 명령하는 지금까지도.
“결혼을, 하겠다고?”
“아버지는 백호연 씨를 싫어해요. 반대하시겠지.”
말하던 세정의 음성이 겹쳤다. 처음 보는 사람을 싫어할 수 있다고, 놀라면서도 인간 대 인간으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대 조건으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한규는 제 조건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다. 세정과 같지 않은 생김새에 생각은 같았다.
어떻게 또 설득해야 할까. 세정보다 더 험하고 고단한 과정이 될까.
“네.”
차분히 대답하는 호연의 곧은 어투에는 흠잡을 것이 없었다. 화장기가 거의 없는 말갛기만 한 어린 얼굴과 긴장한 듯 아랫입술을 살짝 씹는 등의 행위로 미루어 볼 때, 그 옆에 세정의 존재가 질적으로 더 나쁘게 보였다.
“아가, 어려서 뭘 모르는 것 같은데.”
어투는 다정하되 나오는 말은 명백한 무시였다. 뒷말을 구태여 꺼내 귀로 듣지 않아도 호연은 알 것 같았다. 이미 세정에게 질리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한규는 평범한 결혼이 아니라는 경고를 시작으로 이혼이라는 낙인이 여자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인지 설파했다.
세정의 선택을 돌릴 방도는 없으니 호연을 구슬렸다. 걱정인 척하지만, 실은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규가 나긋이 현실을 알려주었다.
관망자가 된 듯하다. 세정은 대놓고 호연을 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깜박거리며 귀담아듣는 것 같기도, 그대로 지나쳐 흘려버리는 것 같기도 한 고요한 모습이었다.
종내 한규가 세정의 결격 사유까지 쏟아내는데, 세정은 그게 조금 웃겼다. 스무 살짜리를 눈앞에 데려다 놓을 때도 이러한 말을 할 생각이었던가.
스무 살짜리 애는 올바른 선택이고, 백호연이 하는 선택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인가. 무슨 기준에서? 이 년짜리 결혼에 혈통을 따지는 건 못난 짓이라는 호연의 비판을 듣고 난 뒤에야 멈출 텐가.
호연에게 한 번 맹점을 찔린 이후인지라, 저와 똑같은 허점을 보이는 한규를 보자 세정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호연은 같은 대답을 하겠지. 그게 정답이지. 아무도 반박하지 못할.
마침표로 찍힐 호연의 대답을 기다리던 때였다.
“좋아해요.”
마침표 한번 제대로 찍네.
“제가 세정 씨를 많이 좋아해요.”
* * *
해장했어요? 물음에 아직이요, 대답이 돌아왔다. 아는 집 있어요? 또 다른 물음에 대답은 한참 느리게 돌아왔다.
도착한 곳은 대헌예술대학교 인근의 해장국 집이었다. 협소한 주차 공간에 능란하게 주차한 세정은 운전하는 내내 호연의 마지막 말이 생각할수록 황당했다.
“좋아해요. ……제가 세정 씨를 많이 좋아해요.”
한규가 순식간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저를 쳐다보는데, 세정도 꺼내 붙일 말이 없었다.
좋아한다고. 그것도 많이.
이 여자는 제가 무슨 실언을 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그 말에 무슨 책임이 따르는지도 알고 있냐고.
“메뉴가 조금…….”
호연은 콩나물해장국, 뼈해장국, 선지해장국 그리고 소주와 맥주가 있는 메뉴판이 제 것인 양 머쓱했다.
세정과 같은 사람들은 무엇으로 해장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놓은 대답의 방향이 이곳이었다.
동기들과 몇 번 왔었던, 어정쩡한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주변 테이블들에 안색이 좋지 않은 대학생들이 널려 앉아 왁자한.
“어떤 게 괜찮아요?”
“콩나물해장국이 맛있어요.”
“그럼 그거로 합시다.”
“네, 이모!”
저와 세정의 차림도 해장국집에는 어울리지 않아서 호연은 주변을 둘러볼 때마다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더한 후회가 드는 것은…….
무턱대고 세정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일.
제 말을 끝으로 더 가라앉을 것도 없던 분위기가 심해로 끌려 내려가는 것을 체감했다.
처음에는 잘 알아들었으나 회장님의 뜻대로는 어렵겠다.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저 어리지 않고, 이 부부관계가 어떤 것인지 인지하고 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도 저들의 앞에서는 늘 어린애고 어린 생각 취급을 당하겠지. 그럴 바에야, 그럴 바에야…….
정말 사랑에 빠져버린 애처럼 굴자. 철도, 대책도 없는 애라고, 내가.
뜻대로 한규의 입이 다물렸지만, 문제는 뒤늦게 이성이 돌아와 본인조차 후회하는 데 있었다. 도통 세정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분명 가짜 고백인데, 분명 거짓된 마음인데……. 그걸 세정도 모를 리 없을 텐데……. 고작 그런 대답을 뱉어낸 것과 작은 자극을 참지 못했단 사실이 부끄러웠다.
금세 해장국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밑반찬과 달걀도 하나씩, 정갈한 차림이었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알려줘야 할까.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데, 고개를 들자 세정은 혼자서도 잘 먹고 있었다. 오히려 들지 않는 호연을 왜, 하는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호연은 여전히 눈을 맞추지 못한 채로 느리게 수저를 움직이며 물었다.
“드셔 보셨어요?”
세정은 입안에 든 음식물을 잘 씹어 삼키고 물로 비워낸 후에야 되물었다.
“왜, 이런 거 안 먹을 거 같아요?”
“아니, 뭐……. 솔직히는.”
호연은 수저로 해장국을 뒤적였다. 입맛이 없었다.
“입맛에는 맞으세요?”
다소 긴장되었다.
세정은 물끄러미 호연을 들여다보았다. 재빨리 눈을 내리까는 게 제 실언의 무게는 몰라도, 잘못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답이 고민되었다.
여자의 표정이 무너지도록 짓궂은 장난을 해볼까.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별 경험을 다 해본다고. 무안을 줘볼까.
됐다.
“맛있어요.”
“……아, 다행이에요.”
약하게 호응하며 후, 한숨을 내쉬는 호연을 눈에 담은 세정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백호연 씨가 참 궁금해.”
“…….”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
“다 잘 먹어요. 직원들이랑은 구내식당도 제법 이용하고.”
아……. 호연도 국물을 떠먹었다. 김이 펄펄 끓어오르는 얼큰한 국물이 입안으로 번졌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온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듯했다.
감칠맛이 돌며 조금 더 먹고 싶어졌다. 아삭아삭함이 살아 있는 콩나물과 송송 썰려 떠다니는 파를 국물과 함께 한입에 넣고 씹었다. 살 것 같은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이후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세정도, 호연도 잠자코 해장국을 먹었다. 그러다가 비슷하게 수저를 내려놓았다.
세정이 계산을 했고, 호연은 먼저 해장국집에서 나왔다. 세정의 차 앞에 서서 기다리며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별다를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데려올 생각을 해. 동기들 마주치면 어쩌려고.
그래도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할 즈음에 남자가 차 보닛을 돌아 운전석의 문을 열며 물었다.
“데려다줄게요. 집으로 가요?”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등교할 예정이었다. 호연이 생각하기에 이 옷은 너무 과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회사로 가시는 거죠?”
“네, 회사. 타요. 데려다줄게요.”
“아뇨, 아뇨. 정말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두 번의 거절을 깔끔하게 받아들인 세정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호연은 서서히 걸음을 뒤로 물렸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오늘은 정말 안녕인 타이밍.
해방감에 절로 웃음이 지어지던 무렵이었다. 조수석 차창이 내려갔다. 액자 속에 가두어진 사람처럼 웃는 얼굴을 고스란히 세정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잠시간 눈을 맞추고 있던 세정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저녁도 같이 먹죠.”
호연이 눈썹 앞머리를 구기며 되물었다.
“……저녁도요?”
“싫은가.”
“아니…….”
“호연아!”
반사적으로 부정하던 말이 삼켜졌다. 살래살래 저어지려던 고개가 휙, 뒤로 돌아갔다. 음성의 주인을 느리게 자각했다.
동기였다. 고진오.
동기들은 학교로 통하는 긴 오르막길 중간에 서 있었다. 꽤 거리감이 있는데도 호연을 알아보고는 큰 소리를 내어 부른 것이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호연과 진오를 번갈아 보는데, 호연은 그게 부담스러웠다.
인사받아 주기를 기다리며 손을 흔드는 진오에게 호연도 마지못해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진오는 제가 곧 가겠다는 손가락질을 하고는 뛰듯이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호연은 세정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네, 좋아요! 좋아요. 저녁에 봬요.”
호연은 급하게 턱을 당겨와 몸을 낮추었다. 세정에게 뒤늦은 대답을 전했다. 세정의 눈길은 호연의 어깨 너머에 있다가 옮겨왔다.
빨리 이 대화를 마치고 싶은데, 그만 가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속을 아는지, 부러 그러는지. 세정은 핸들에 기대듯 몸을 숙이고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강의 몇 시에 끝나요?”
“어…….”
기억이 나질 않아 호연은 핸드폰을 켜서 시간표를 확인했다.
다섯 시.
“다섯 시요.”
“다섯 시.”
맞냐는 듯, 알겠다는 듯 눌러 발음한 세정이 핸드폰을 눈짓했다.
핸드폰?
“연락은?”
“연락……?”
앵무 같은 대화가 반복되었다. 호연은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고 세정은 눈을 찌푸리듯 웃으며 핸들을 톡톡, 건드렸다. 왼손의 손목시계가 작살 같은 햇살에 반짝였다.
“어디서 만날 줄 알고.”
“아……. 비서님이 제 번호 알고 계시던데요?”
“난 모르잖아.”
단칼에 끊어내는 말에 호연은 잠시간 대답을 잃어버렸다. 불안감에 홱,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코앞이었다.
망했다.
“여기서. 여기서 다시 봬요. 다섯 시!”
세정의 대답을 듣지도 않았다. 호연은 뒷걸음질 몇 번으로 대화의 종결을 알렸다.
그러곤 야아, 뭐냐. 백호연! 하고 다가오는 동기들을 마주했다. 어색하게 웃음으로 남자와 제 사이에 맺혀 있던 유대를 지웠다.
“너 오늘 옷 뭐야.”
소예가 호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뭐야, 뭐야, 그랬다. 손가락으로 재킷을 만져보고 비싼 거 아냐? 호연의 대답보다 먼저 물음을 쌓았다. 호연은 입술 위에 침 한번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아, 아빠가 사주신 거…….”
라 입고 나왔어.
하고 말하는데 뒤통수로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버지구나. 부럽다. 하는 소예의 대답은 호연의 귀로 감기지 않았다. 전혀 의심하지 않는구나, 안심하기도 전에 진오의 시선이 어디로 흐르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정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걸까. 진오가 일방적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걸까.
“저 사람…….”
진오의 말이 채 이어지기 전에 세정의 차가 옆을 쓱, 스쳐 지나갔다. 옆으로 밀려난 공기가 바람이 되어 불었다. 머리칼이 가볍게 날아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세정만을 향하던 좁은 시야가 확 넓어지면서 차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차 저거 되게 좋은 거지?”
성유가 물었고 민겸이 물을 걸 물으라며 타박했다. 그러곤 이 근처에서 저런 차를 타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그랬다.
소예는 얼핏 본 세정의 얼굴이 황홀할 만큼 예뻤다고 중얼거렸다. 진오는 말문을 잠그고서 호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호연은 세정의 차가 사라진 텅 빈 도로를 눈길로 더듬었다.
왜인지 잠시간 비눗방울 속에 들어 있던 듯하다. 갇힌 것 같았다고 해야 할까. 도대체가 현실감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현실감이 들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저와 해장국을 먹고 대화하던 남자가 갔을 뿐인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든 게 꿈처럼…….
결혼이 너무 먼 시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일까.
호연은 치맛자락을 손끝으로 구겨보았다. 오로지 옷만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