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12화 (12/98)

제12화

“왔어요?”

호연은 단정하게 웃는 세정의 얼굴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았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아……. 불렀지, 내가.”

세정은 제가 취했다고 생각했다. 후, 얕은 숨을 뱉자 입안이 뜨거웠다. 눈두덩이도 비슷한 온도인 것 같고.

“앉아요.”

그런데도 행동만큼은 군더더기가 없어서 맞은편의 자리를 턱짓하며 명령했다.

호연은 떨어질 줄 모르는 세정의 두 눈을 직시하면서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맞은 데는 다 나았고?”

흐르는 음률처럼 아무렇지 않은 물음이었다.

“네.”

“다행이네.”

그러나 딱 그 정도의 안부. 세정이 낮게 손을 들자, 호연에게는 얼음이 든 온더록스 잔이 내어졌다.

위스키를 따라주려는 손길을 걷어내고 세정이 직접 병을 기울였다. 세정의 것보다 한참 옅은 색의 위스키가 잔에 채워졌다.

“술은 좀 해요?”

세정은 초콜릿을 집어 먹으며 물었다. 씁쓸한 맛이 남아 있던 혀 위로 은은한 단맛과 위스키의 쓴맛을 닮은 게 퍼졌다.

차분히 대답을 기다린다. 술을 많이 마셔보기는 했을까. 가늠하는 세정의 눈썹이 호연을 따라 잠시간 모였다가 풀어졌다.

호연은 제 앞에 놓인 온더록스 잔을 바라봤다. 분명 소주나 맥주 따위를 먹었을 때 쉽게 취하는 타입이 아니긴 했다.

그런데 위스키와 같은 고가의 술도 같을까. 모르겠다. 한참을 생각한 호연이 가까스로 대답을 골라냈다.

“아예 못 마시는 건 아니에요.”

“좋네요. 나도 그 정도 마셔요.”

그 정도 마시긴. 세정은 호연이 도착하기 전까지 마셨던 위스키의 양을 헤아렸다. 취하고 싶어도 도통 취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이 흐물흐물해지는 감각은 아마, 주당인 최수열 사장이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홀로 이곳으로 와 또 쉬지 않고 마셨기 때문이겠지.

그에 반해 호연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아, 나만큼 마시는구나.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잔을 쥐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속이 타서일까. 갈증이 일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고민스러웠다.

마셔도 될까. 남자가 나를 불러낸 이유를 명확히 알지도 못하는데…….

“마셔요.”

테이블 위에 놓인 스트레이트 잔이 쭉, 밀려와 온더록스 잔에 부딪혔다. 여린 유리 음이 났다.

세정이 먼저 스트레이트 잔을 입술에 붙였다. 살짝 꺾어 올라간 민틋한 턱선과 울렁거리는 울대.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도 얼굴을 찌푸리는 일 하나 없이 초콜릿을 집어 먹고는 혀로 쓱, 밀었다. 그제야 눈썹을 조금 구긴다. 단맛이 싫다는 듯이.

“마시라니까.”

재차 권유하며 제 잔에 다시 위스키를 따랐다. 호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천천히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노란색 위스키를 목구멍 안쪽으로 흘려보냈다.

감당할 수 없는 쓴맛이 올라왔다. 몸이 병적으로 거부했다. 캑캑, 헛구역질에 가까운 헛기침을 하면서 반도 마시지 못하고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그 꼴에 세정이 피식, 웃었다.

“아예 못 마시네.”

그러곤 호연의 말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그게 마치 애도 아니고, 하고 말하던 어투와 비슷했다.

세정은 호연에게로 초콜릿이 담긴 접시를 밀어주었다. 호연은 손을 대지 않는 것으로 거부했다. 재차 잔을 쥐고 쓴 한약을 삼키듯 그렇게 마셨다.

“괜찮아요?”

아니요. 정말로, 아니요.

가까스로 위스키를 삼켜낸 호연의 몸이 덜덜 떨렸다.

몸 깊은 곳이 온통 미끌미끌한 기름인데 그 위로 불덩이가 철렁철렁 떨어지는 듯했다.

치솟은 불길이 혀에도 올라 간지러웠다. 살짝 입술을 헤, 벌리자 뜨거운 숨이 나왔다.

이에 순식간에 토기가 치밀었다. 호연은 불안감에 다시 입술을 잠갔다. 꿀렁꿀렁, 목의 얇은 피부가 요동쳤다.

세정은 토기를 꾹 눌러 참느라 꽉 다물린 호연의 입술 선을 보고서는 정말이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을 가리고 하하, 평소보다 크게 웃었다.

이건 뭐……. 조금만 자극하면 하잖아, 다.

취한 세정은 웃음이 헤프고 취해가는 호연은 불안증이 도졌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세정은 호연의 낮아진 음을 기억한다. 이런 때에는 이런 음으로 말을 하는구나, 싶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왜 불러냈더라.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으나 최수열 사장과의 대화에 술이 빠질 리는 더 없었고, 그러다 보니 조금 마셨고, 이 정도의 취기로는 불면증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더 마시기로 했지. 그런데 언제 백호연 생각이 끼었지.

더 골몰한다.

아마 모든 일정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쯤이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있을 고원 건설 둘째 딸, 이민서와의 저녁 약속이 시간 낭비라고 느껴질 때.

하루라도 빨리 이 짓을 그만두고 싶었지. 가지 치는 생각 끝에 달린 열매가 백호연이었다, 그래.

모친이 도망가고, 부친이 도박장에서 굶어 죽고, 형제가…….

백호연이 최선임을 인정하게 되었던 날, 신원이 가져다준 종이 한 장에 정리된 인생은 말 그대로 별 볼 일 없었다.

스물두 해의 삶이 이렇게 간단할 수 있나.

어이가 없어서 웃겼지. 동시에 이유 모를 예감이 들었다.

좆 될 것 같은 예감.

실은 그런 예감을 느낀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무슨 일이겠어요. 내가 연락한다고 한 일이 하나뿐이잖아.”

재고의 여지가 없다. 불운했던 가정사를 제외하고는 깔끔한 인생이다. 여자는 바라는 바가 있고, 이제는 저도 취할 이득이 있다.

그러므로 제안한다.

“결혼합시다.”

아, 호연은 벌어지는 잇새로 가장 뜨겁게 달구어진 숨을 뱉었다. 세정은 서늘한 눈빛으로 그 숨을 싹, 감쌌다. 다시 초콜릿 접시를 더 가까이 호연에게 밀어줬다.

“먹어놔요.”

나가서 키스해야 하니까.

* * *

초콜릿을 먹어두라는 가벼운 명령조에 호연은 세정의 스트레이트 잔을 뺏어 마셨다.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끔찍한 불길이 핏줄을 따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온몸이 간지럽고 혓바닥을 뎅강 잘라내고 싶은 아득함.

초콜릿은 아무리 먹어봐야, 정신이 흐려질 리 없으므로 위스키를 택했다. 그때에는 세정이 웃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두통에 머리를 붙들고 신음을 앓는 호연에게 손을 내밀어 잡으라고 했다.

호연은 휘청이며 세정의 몸에 기대었다. 인공적인 온기, 찌르는 듯한 술 냄새와 달리 남자에게서는 시원한 향이 났다. 분명 이것 또한 향수 내음일 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두통이 덜해졌다.

온기 같은 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남자도 얇은 천 아래로 느껴지는 체온에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일까. 이제는 결혼이라는 목적 하나로 결속되어 한배를 탔다는 걸 공고히 해서일까. 마음이 놓였다.

똑바로 걸었던 복도를 이제 세정에게 주도권을 넘긴 채로 걸었다. 호연이 몇 번이고 몸을 세워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디로 보나 남녀의 모습은 제법 연인 같았다.

그러나 남자가 고개 숙여 여자의 귓가로 흘리는 말은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아버지는 백호연 씨를 싫어해요. 반대하시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싫어할 수 있다.

“……어떡해요?”

“어떡하긴.”

남자가 단단한 어투로 호연의 미약한 걱정을 쳐냈다. 동시에 계단을 올랐다. 온몸의 근육이 이미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세정이 호연의 몸을 받쳤다. 힘이 든다는 기색 하나 없이, 취기가 도는 사람 같지도 않게.

“사방에 아버지의 눈이 붙어 있어요.”

문을 열었다. 겨울바람이 넉넉하게 폐부 안쪽으로 깊이 들어왔다. 간절히 바라 마지아니한 시원한 공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남자의 품이 더 숨을 쉬기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 눈앞에서 키스하면 돼요.”

아침에 기사가 날 거고.

뒷말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호연은 키스라는 단어에 속이 끓는 듯했다. 어깨를 잡고 살짝 밀어내는 세정의 소매를 붙들고 표정을 구겼다. 이어지는 말은 진심이다.

“토할 것 같아요.”

“해요.”

답은 명료하다.

세정은 호연의 손목을 가볍게 쥐어 내리고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 눈과 눈이 맞닿는 잠시가 아주 길게 느껴졌다. 자꾸 무너지는 호연의 자세를 당겨 고정했다.

하복부에 붙는 허벅지에 낯선 찌릿함이 들었다. 호연은 몸을 떨었다. 이제부터는 호흡, 잔 움직임 모든 게 자극이었다.

“근데 좀.”

세정의 엄지가 호연의 눈 아래를 느른하게 문질렀다.

“참아.”

입술이 포개어졌다.

눈을 감기 전 낯선 불빛이 확, 퍼진 것 같았다.

* * *

원목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남녀의 입맞춤 사진이었다. 여러 장. 미세하게 틀어지는 각도와 시간에 따라 정렬된.

그를 내려다보는 세 쌍의 눈은 저마다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한규는 마음에 들지 않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불편한 눈이었고 세정은 흥미가 없다는 듯 그만저만한 눈이었으며 호연은 당혹스러움을 비추지 않으려고 애쓰는 눈이었다.

“아침에 기사가 날 거고.”

잠에서 깨어난 호연이 가장 먼저 상기한 말이었다.

그때 석훈이 우당탕, 제 방으로 들이닥쳤었다. 그의 핸드폰 속에 지금 내려다보는 것과 똑같은 사진들이 있었다.

기사 제목이 뭐였더라.

[단독] 재벌의 결혼 경위서(1) 북두 그룹 장남, 기세정의 사랑법

(1)이라는 건 후속 기사가 있다는 뜻인가. 헛웃음이 나왔고 금세 사그라들었다. 호연은 급하게 제 신상이 적혀 있는지 확인했다. 없다. 가슴을 쓸어내릴 때였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신원이었다.

신원은 세정의 분부라고 말하면서 그의 부친, 한규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숍을 갔고 정숙한 옷이 내어졌다.

시에르의 블랙 트위드 재킷과 세트인 스커트. 황금색과 상아색이 조화롭게 배색된 가방과 단정한 실버 액세서리.

자로 잰 것처럼 꼭 맞는 옷을 입었는데 제 옷이 아닌 것처럼 빳빳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사진을 가운데 두고 한규의 짜증스러운 눈길을 받는 일은 또 어떻고.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는데, 세정이 무심하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이상하리만치 안심이 된다.

늘 같은 모습이라 그랬을까. 잘 꾸며진 저를 봤을 때도, 한규가 테이블 위로 사진을 쏟아낼 때도, 늘 같은 모습.

되살아난 기억에 입술이 뜨겁고 시선을 맞대지 못하는 저와 달리 잘 잤어요? 하고 간단하게 선을 살살 문지르는 여유로움.

입을 맞출 때도 그랬어. 입천장을 훑는 혀에 허리를 곧게 세우자 남자는 입술을 살짝 빗겨두며 피식, 웃었다. 긴장하지 말라며 척추뼈를 따라 쓸어내리는 손길에 몸이 소스라치게 떨렸다.

추워요? 낮게 묻는 물음에 고개를 젓자, 근데 왜 떨어, 하면서도 대답을 못 하게끔 다시 입술을 빨던 진득한 시간. 그 순간에도 그래, 세정은 너무나도 능숙했다.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 볼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할 말 없으시면 갑니다.”

지겨운 정적을 깨트린 것은 세정이었다.

세정이 출근을 준비하던 차에 확인한 기사는 영세한 신문사의 단독 기사였다. 싸구려 제목에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것에 불과한.

신원은 어찌할까요, 물었다. 기사의 초입부터 말단까지 죄 소설이었다. 하여 사진만 건성으로 확인한 세정은 그저 두라고 그랬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한규에게 보고가 올라갔고 기사는 금세 내려졌다. SNS를 통해 사진이 도는 모양인데, 이른 새벽이라 사진이 퍼지는 속도보다 북두 그룹의 법무팀이 빨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새도 법적으로 날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만연한 북두 그룹의 법무팀이었다.

그 솜씨를 겨우 스캔들 기사 하나 막는 데 쓰는 거지. 세정은 신원이 보내준 링크의 기사가 삭제되었음을 확인하고는 웃었다.

전화가 오겠지. ……예상대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정을 압축한 음성이 저와 호연을 찾았다. 그러니 지금 이 사진들을 두고 앉아 있는 것이다.

“…….”

침묵이 더 길어진다.

세정의 입꼬리도 따라서 길게 올라갔다. 성난 한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기사를 내리지 말고 사진 속 여자가 고원 건설의 이민서라고 했어야지.

제아무리 딸을 팔아 치우려던 고원 건설의 이감호 회장이라도,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추는 남자에게 딸을 주려 들지는 않겠지만.

그러니까,

백호연과 저를 불러낼 시간에 신문사를 조지고 SNS를 막아야지.

하나면 모를까. 수많은 신문사를 조지고 SNS를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이번에는 북두 그룹 본사로 들어가는 저와 백호연의 모습이 찍혀 나돌고 있겠지.

상상치도 못할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끝난 게임이다.

완벽한 덫을 뿌렸다. 확인 사살도 했다.

지금쯤이면 한규도 제 모든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모든 것이 세정의 셈임을 깨달았을 시간이다.

이 정도면 되었다.

“일어나요.”

세정이 호연에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던 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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