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11화 (11/98)

제11화

대한민국 미술대전 구상 부문에서 수채화로 최우수상을 받은 애.

그리 말하면 대헌예술대학교에서 백호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연못 위에 피어난 불꽃과 그 아래 몸이 익는 줄도 모르고 먹이를 쪼아 먹는 비단잉어를 그린 수채화는 학교 곳곳에 현수막이 걸릴 정도로 대단한 자랑이었다.

대헌예술대학교 회화과로서는 한동안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수상이었으니 곳곳에서 호연의 이야기를 하는 건 당연하였으나 뭇 학생들 사이에서는 영 다른 것으로 회자되었다.

호연의 외모.

SNS 학교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호연의 글이 꽤 되었다.

이를테면 호연과 같이 강의를 듣는 학생이라든가, 등굣길에 스친 학생이라든가, 동기들과 함께 간 카페의 알바생이라든가.

이미 얼굴로 유명 인사였는데 회화과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널리 알려지자 그녀의 외모만 더욱 불티나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런 시선이 이제는 익숙하기도 해서,

호연은 목을 가린 옷깃을 조금 더 단단히 여몄다. 그날로부터 시간이 일주일이나 흘렀는데도 연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매일 폴라 티를 입고도, 목을 가려주는 겉옷까지 갖추어 입었는데….

동기인 소예가 왜 실내에서 겉옷을 벗지 않느냐며 물어올 때에 당혹스러운 티를 감추지 못했던 게 뒤늦게 후회되었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은 거라고.

어느덧 파르스름한 기운이 가신 밤이었다.

공연기획과 조민주와 함께하는 작업 탓에 늦어진 시간을 확인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졸업을 하려면 학기당 한 번 진행되는 ‘대헌제’에 총 네 번 작품을 출품해야 해서 할 일이 많았다.

“늦겠다.”

걸음을 조금 더 잰걸음으로 바꾸었을 때였다.

“어…….”

다시 걸음이 느려졌다.

* * *

4분기 실적 발표를 앞두고 계열사의 임원진들이 모두 모인 자리.

세정은 고원 건설 둘째 딸과의 맞선이 다시 잡혔다.

한규는 세정이 백 대표의 자택을 방문한 걸 아는데도 침묵했다. 아니, 침묵이라고 할 것도 없지. 보란 듯이 다시 맞선 일자와 장소를 정해 넘겨왔다.

세정의 첫 번째 아내, 임설아는 한규와 친밀한 원경 기획의 막내딸이었다. 두 번째 아내, 하윤주는 세정이 직접 고른 세종일보의 장녀였다.

두 사람 다 혼맥(婚脈)으로 세정의 저변을 늘리고 입지를 공고히 만들어주며 그가 제 능력을 발휘할 때까지 큰 힘이 되었으나 본질적으로는 그 성질이 달랐다.

설아는 한규가 추천한 여자로, 결국은 한규의 사람이었고. 윤주는 세정이 추천한 여자로, 결국은 세정의 사람이었다. 그건 결정적인 순간에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느냐로 갈리는 주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세정은 이번에도 제게 힘이 되어줄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다. 아내가 될 여자에게도 제가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업적 관계를 원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더 잘생기셔서 놀랐어요. 아, 예쁘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수줍게 웃는 고원 건설 둘째 딸, 이민서의 나이는 고작 스물이었다.

세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해가 바뀐 지 두 달이었다. 그러니까 석 달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어린애를 앞에 앉혀두고 계약이니, 결혼이니 얘기를 나눠야 하는 것이다.

노망이 났나. 스무 살이면 소꿉놀이를 해도 할 나이가 아닌가. 그런 애를 세 번째 아내 삼으라며 내놓는 미친 고원 건설 대표는 어떻고.

이런 취급을 당하는데도 맹랑하게 전 부인과의 이혼 사유를 묻는 건 머리가 꽃밭이라 그런 건지.

아, 어쩌라고.

세정은 길쭉한 타원형 테이블, 그 중심에 앉아 있는 한규를 응시했다. 피곤함이 주름마다 덕지덕지 낀 고위급 인사들 사이에서 힘든 기색도 없이 깐깐한 눈빛으로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궁금했다.

저런 고지식한 양반도 무너트린 사랑이라는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은 했으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은선을 새어머니랍시고 데리고 왔을 때부터. 아니, 그 전에 조강지처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며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은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닌 짓. 조강지처의 백을 잃고 싶지 않아 이혼은 하지도 않고 두 여자의 피를 바짝 말리는 미친 염병.

그딴 게 사랑이면 절대.

이번에는 북두 리테일 산하의 북두 홈푸드 실적 발표였다.

“북두 홈푸드 프리미엄 라인 잇미가 북두 홈푸드 최초로 매출 1조 원을 초과 달성하였습니다. 이는 국내 매출 약 7,100억, 해외 매출 약 3,800억을 합산한 수치며 미국 시장은 전년도 대비 47% 성장하여 유의미한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북두 홈푸드는 말 그대로 고공행진 중이었다. 프리미엄 라인 잇미의 매출이 그 증거물이었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현지 생산 능력을 확대하여 3년 내, 베트남에 생산 시설을 확충할 예정이고, 생산량이 최소 4배 증가될 예정입니다. 또한 이로 인해 베트남 현지 기업의 도움이 필요한데 다수의 한국 기업이 진출함에 따라 소극적인 반응이…….”

문제는 이미 점유율을 빼앗긴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순간 자신감을 잃은 발표에 세정이 눈을 들었다.

베트남 현지 유통기업인 라이브 그룹과 손을 잡았다던 엔마트가 떠올랐다.

“동남아를 빼앗기면 되나.”

“그 노른자 땅을.”

당장 눈앞의 성과에도 아쉬운 소리가 이어졌다.

“국내에서는 접근성이 더 좋아졌으면 하는 반응들이 있던데?”

전세현 상무의 물음이었다.

“그 부문은 배달 서비스 어플리케이션 ‘레디 고’에 북두 마트 탭을 신설하여 서비스 범위를 확장할 계획입니다.”

“그래봤자 얼마나 느나. 올두 인수 건은?”

내내 가만히 듣던 한규가 물었다.

“어렵습니다. 회장님.”

“엔마트를 품으면 좋기야 하겠는데요.”

“엔마트는…….”

1,170개짜리 편의점.

은근히 뿌듯하게 말하던 호연이 생각나 세정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때 한규가 쓱, 세정을 보았다.

세정은 금세 표정을 굳히고 눈썹 끝을 매만졌다.

“……이상입니다.”

한규에게서 칭찬과 격려의 문장이 하나 튀어나왔다.

그를 끝으로 실적 발표가 갈무리되었다. 임원 모두가 하나씩 자리를 뜨는 가운데, 세정은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

세정은 근래 엔마트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세보았다.

말 그대로 수도 없음이었다.

세 번째 아내 맞선 후보에도 못 올랐던 엔마트가 그새 가장 필요한 기업이 되어 있었다.

과연 백호연이 정답인가?

연락을 준다고 했었지. 연락을 줘야겠지.

실적 발표를 들으니 세정은 제게 누가 필요한지 확실해졌다. 그런데, 본능적인 거부감은 무엇일까.

습관적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 * *

호연은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완전히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온 메시지가 있었다. 하나는,

[호연아, 오빠야.]

그 두 단어를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뒤죽박죽 끌어안고 살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넘쳤다.

민형이 전화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지만, 호연은 부득불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마음이 초조해서 다시 걸면서 글자를 정독했다. 아, 작은 탄식과 함께 이번엔 호연이 전화를 끊었다.

아…… 병원이라 전화가 어려울 것 같다고.

화면 위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손가락과 함께 키패드를 눌러 단어가 엉망이 되었다.

호연은 그를 죄다 지우고 화면을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고개를 빳빳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내 호연은 다시 키패드를 눌렀다.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글자들을 나열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오빠는……. 어때? 많이 아파? 한국에 올 수 있어?]

호연은 메시지를 보내고 주저앉았다. 길을 지나는 누군가가 힐긋거려도, 속닥거려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어린애처럼 ‘다행이다, 다행이야’만 옹알거리며 울었다.

가로등이 빛이 빗줄기처럼 온몸을 푹, 적셨다.

* * *

안개 속을 파고드는 것 같다. 세정이 있다는 바로 향하는 택시의 차창 밖이 흐리멍덩했다.

떠나온 곳으로부터 거리감이 상당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서울 외곽쯤이 아닐까.

택시에서 내린 호연은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멀어지는 택시의 배기음과 불빛.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제 또래들이 모이는 곳이라기엔 너무나도 조용하고 음산했다.

그리고 인기척이 있을 리 만무한 곳에서 돌연 발소리가 들렸다. 놀란 호연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그쪽을 주시했다.

어둠이 울렁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칠흑처럼 흐린 인영이 몸을 드러냈다.

“백호연 씨?”

제 이름을 알고 있다. 덜컥, 심장이 추락했다.

“잘 찾아오셨네요. 늦으셔서 걱정했습니다.”

이내 나긋한 음성과 반가운 웃음에 천천히 이성이 돌아왔다.

“연락드렸던 서신원입니다.”

민형의 메시지와 동시에 온 또 다른 메시지는 세정의 비서, 신원에게서 온 거였다.

늦은 밤인데 미안하고 안녕하냐는 의례적인 말을 시작으로 세정이 만나고자 한다는 말과 혹여 잠들어 아침에 확인하게 된다면 답장 없이 없던 일로 넘겨도 된다는 것까지.

선택지는 없었다. 메시지를 보게 된 이상 무조건 오는 거였다. 명령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걸 알아 자존심이 상하는데도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안내하겠습니다.”

어둠을 가로지르고, 계단을 내려가고, 벽을 짚고 도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문이 있었다.

문이 열리고도 여전히 조도가 낮았다. 예민해진 청각으로 경쾌한 뉴올리언스 재즈곡이 자각됐다. 보통의 것보다는 차분하고 여유로운, 묘하게 음을 늘려놓은 듯한 나른함. 긴장된 마음을 문지르는 선율.

“저쪽에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신원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세정이 있었다. 호연은 어지럽게 놓인 테이블과 의자를 가르며 그에게로 갔다.

세정은 무대를 마주 보고 앉아 문을 등진 채였다. 늘 세상의 중심에 놓인 남자가 이상스럽게 구석에 앉아 있었다.

노을 색의 위스키가 든 스트레이트 잔이 짙어졌다. 드리우는 그림자에 세정이 고개를 들었다. 취했나, 아닌가를 살피는 호연의 분주한 동공에 픽, 웃으며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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